임오화변 최악의 비극 <15> 관서유람. 공국 문화부 직할 역사연구소

그리고 천리(千里)를 갔다가 돌아오는 예체(睿體)인데도 아직까지 지척(咫尺)에서의 진현(進見)하는 예(禮)를 행하지 못했으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말을 타고 달린 예후(睿候)인데도 약원(藥院)에서의 기거하는 의절(儀節)을 걷어치우지 못하시니, 사람들은 모두 이것으로 저하의 뉘우침과 깨달음이 미진(未盡)한 뉘우침과 깨달음이라고 의심을 합니다.

 

- 영조실록 영조 37년 5월 8일자 기록의 대사간 서명응의 상소 중에서 -

 

 

 <진현을 두고 벌어진 실랑이>

 

 1760년 6월을 마지막으로 세자는 또다시 진현을 그만두었다. 아버지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신하들은 안되겠다 싶었는지 세자에게 진현례를 행할 것을 여러차례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런 상소들은 무시되었다. 물론 세자 자신도 신하들의 시선도 있고 해서 몇 번 영조에게 진현의 뜻을 아뢰기는 하였다. 하지만 영조가 만류하는 반응을 보이자 그래도 진현해야된다는 신하들의 청을 물리치고 진현을 행하지 않았다.

 

 그나마 거의 진현이 성사될 뻔한 적이 있었다. 1761년. 즉 영조 37년 3월 말. 김상익 등이 사도세자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사도세자는 두통, 치통, 복통으로 움직일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전후 상황을 보면 아마 진현이란 말 자체를 꺼내지 않게 하기 위한 꾀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상익 등은 진현을 권유했고 세자는 그럼 연을 타고 가야겠는데 누울 수 있겠느냐고 했다.

 

 연이란 일종의 가마이다. 이걸 타고 가면서 눕겠다는 건 그냥 안 가고 싶다는 걸 은연중에 내비친 셈이다. 그러나 신하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어찌되었든 진현을 가라고 압박을 가했다. 그러다 마침 영조가 만류하는 식의 하교를 내렸고 세자는 이를 핑계로 진현을 하지 않았다.

 

 어째서 사도세자는 진현을 행하지 않았을까? 일판 영조의 명을 핑계를 대긴 했지만 사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버지'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데 굳이 진현해서 싫은 얼굴 보기가 그랬던 것이다.

 

 

- 아들은 아버지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았다. -

 

 그렇다면 영조의 만류는 무엇일까? 일단 가장 가능성이 높은 추측은 의례적인 수준의 만류라는 것이다. 동양의 문화는 겸양을 중시한다. 겸양은 즉 겸손하고 사양하는 것이다. 속내가 어떻든 일단 겸손하게 굴고 사양하는 흉내라도 내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게 동양의 문화다. 영조의 만류 역시 이런 사양하는 흉내를 낸 의례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영조 역시 사도세자를 미워했으므로 사도세자가 진짜로 보고 싶지 않아 만류하는 형식으로 오지 말라는 뜻을 전달한 걸 수도 있다.

 

 

 

- 아버지도 아들 얼굴을 보고싶지 않았던 것 같다.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다. -

 

 <관서를 유람하다.>

 

 4월 22일. 사도세자는 웬일로 유생들을 면대하게 되었다. 이 때 유생들은 사도세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저하께서 강독을 치워버린 지 이미 오래 되었으며 궁료(宮僚)를 접견하지 않은 지도 역시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평상시 좌우(左右)에서 모시는 자는 오직 환관(宦官)이나 액속(掖屬)들이니, 반드시 말을 타고 달리며 사냥하는 것으로 인도하는 자가 있을 것이고, 반드시 재화(財貨)를 늘리며 음악과 여색으로 인도하는 자가 있을 것이고, 반드시 드나들며 유람하는 것으로 인도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이게 웬 말인가?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유선 서지수가 5월 2일 "저하(邸下)께서 비록 대궐 안에 계신다 하더라도 일동 일정(一動一靜)을 중외(中外)에서 모르는 경우가 없습니다. (하략)" 이란 말을 세자 앞에서 하더니 5월 8일 대사간 서명응이 상소를 올려 사도세자의 관서행을 직접 거론하며 관련자들의 처벌을 요구한 것이다! 세자가 관서를 유람했던 것이다!

 

 전후 사정은 이렇다. 사도세자는 그 이전부터 병이 있다고 했지만 사실 이는 꾀병이었다. 여기까지는 별 거 아닐수도 있지만 세자는 꾀병을 핑계로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 구실을 만들고, 내시로 하여금 대신 비답을 쓰게 한 후 자신은 일행들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간 것이었다!

 

 사실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사도세자의 평양행은 단순한 유람 목적이었다. 온양을 다녀온 후 세자는 밖을 나가고 싶어했는데 그것이 잘 되지 않자 이미 미행을 시작한 상태였다. 그러나 한양만을 돌아다니는 걸로는 질렸는지 세자는 더 멀리 가보고 싶어했다. 그런 사도세자가 선택한 곳은 평양이었다.

 

 그럴만도 했다. 평양은 조선시대 당시 진주와 함께 2대 색향. 즉 기생으로 유명한 고을이었다. 한양을 기준으로 남쪽은 진주요. 북쪽은 평양이 기생으로 조선 팔도에서 알아주었다. 더군다나 평양에는 당시 화완옹주의 시삼촌인 정휘량이 있었다. 정휘량이라면 자기가 평양을 다녀온 걸 널리 알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사도세자는 4월 2일 ~ 4월 22일 사이 평양을 유람했다.

 

 평양을 유람하면서 한 일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후 정황을 통해 볼 때 사도세자는 기생들과 잔치를 벌이며 즐기고, 당시 고양이 그림을 세밀하게 그린 것으로 유명한 화가 변상벽을 만나 초상화를 의뢰한 것은 확실해보인다.(1) 이렇게 세자는 유명 화가한테 그림을 그리게 하고 기생들과 놀면서 즐기고 또 즐겼다. 하지만 정휘량은 대접에 지칠대로 지친 나머지 나중에는 피를 토했다고 한다.

 

파일:Byeon Sangbyeok-Myojakdo.jpg

- 변상벽이 그린 묘작도. 고양이를 정말 놀라울만큼 잘 그렸다. -

 

 사도세자의 평양행은 일단 출발 즉시 소문이 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사실을 완전히 숨기지 못했다. 애초에 세자의 유람이니 만큼 수십명 정도의 수행원들이 달라붙었을 것이다. 수십명이 말 타고 달려가고 그들에게 정휘량이 허리 숙이고 이랬을텐데 이런 상황에서 자연히 소문이 안 날 리가 없었다. 최소한 한양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미 관서 유람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던 것 같다. 거기에다가 세자가 돌아온 이후에는 이 사실이 더욱 구체적으로 널리 퍼지기에 이르렀다. 아마도 사도세자의 수행원들이 입을 가볍게 놀렸던 게 아닌가 싶다.

 

파일:Hyewon-Juyu.cheonggang.jpg

- 뱃놀이 하는 기생들을 그린 그림. 사도세자는 평양에서 이러고 놀지 않았을까? -

 

 어찌 되었든 사도세자는 소문이 소문이니만큼 자숙해야 했다. 웬일도 안 열던 서연도 열고 진현까지 하였다! 거의 1년 만이었다. 이 때 영조는 세자가 좀 더 살이 찐 것 같다고 말하였다.

 

 그러다 6월 경에 사도세자는 학질(말라리아)에 걸렸다. 이로 말미암아 사도세자는 자리보전을 꽤 오래했고 8월 경에나 나았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관서 유람에 대한 정보는 영조한테 들어가지 않았다. 승지들이나 대신들, 환관, 궁녀들이 소문이 영조에게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됬든 별 탈 없이 여름이 지나갔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는 일. 9월 20일. 영조는 5,6월의 일기를 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승정원 일기를 열람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언사한 것에 대해 상고하고 아뢰라고 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승지 이현중은 대단한 것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럴만도 했다. 5월자 일기에 관서 유람에 대한 사실이 들어있었으니까. 그러나 영조의 추궁에 어쩔 수 없이 이현중은 "지척의 전석(前席)에서 신이 과연 속였습니다. 만약 보실 만한 글이면 전하께서 반드시 이미 보셨을 것이요, 보시지 않은 것은 전하께서 보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어찌 상고해 내서 보지 않으십니까?” 라고 말하였다. 결국 영조는 직접 5월의 일기를 열람했고 서명응의 상소 내용을 본 후 대노했다.

 

 

 

- 관서유람을 뒤늦게 안 영조는 폭발했다. 사실 관서 유람은 임금이 알면 폭발할 만한 사안이긴 했다. -

 

 다음 날 홍봉한과의 대화를 보면 영조는 대충 세자가 밖으로 나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찌 천리(千里)나 멀리 가리라고 생각하였겠는가?” 라고 한 말을 볼 때 대궐 밖을 나가 미행을 한 일만 대강 들었을 뿐 관서 유람은 상상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파장이 일었다. 승지들이 대거 삭직되고 내시들이 처벌을 받았다. 사도세자는 바로 대죄하였고 정기적으로 받던 약방의 진찰도 거절하였다. 그리고 영조에게 해야 될 진현례도 행하였다. 의외로 영조는 승지들을 삭직하고 내시들을 처벌하고, 사도세자가 일단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자 이 일을 재론하지 말라고 하였다. 생각보다 빠르고 간단한 마무리였다. 사도세자로써는 의외이긴 했지만 어쨌든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만 영조는 이 즈음부터 모종의 결심을 단단히 한 것 같다. 10월 8일. 영조는 세손의 가례를 검소하게 할 것을 명하며 "3백 년 종사를 이을 사람은 곧 세손"이라는 말을 하였다. 1월에 세자와 문답한 후 칭찬하면서 한 말을 여기서 또 한 것이었다. 멀쩡하게 세자가 있고 세자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불확실하던 상황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슬슬 영조가 대처분을 결심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http://www.koreanhistory.org/image/webzine/010/003.jpg

 

-영조는 이즈음해서 후계자로 세자 대신 세손으로 하기로 맘을 먹기 시작한 듯 하다. -

 

 <왜 사도세자는 평양에 갔는가?>

 

 사실 관서유람을 가지고는 말이 많았다. 일반적으로 유람이라는 평이 많았으나 정조가 지은 사도세자의 행장에서는 적당의 음모를 막기 위해 평양으로 갔고 홍계희가 역모를 꾸민다고 하자 돌아갔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이덕일 등은 쿠데타를 위해 평양에 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정휘량이 소론계였고 당시 정권은 노론계(정확히는 홍봉한과 그 수하들)가 쥐고 있었으니 나름 일리있는 추측이다.

 

 하지만 행장이란 물건은 애초에 고인의 좋은 점만을 드러내려는 목적이 강한 것이니만큼 그 해석에 주의를 요해야 한다. 필자 역시 십만양병설 관련 글을 쓸 때 별 수 없이 김장생이 쓴 율곡 행장을 참고하기는 했으나 나름 해석에 주의하려고 하였다. 행장의 사료적 가치는 낮은 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장만 보고 한중록이나 실록, 연구가들의 주장을 틀렸다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덕일의 주장 역시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애초에 쿠데타. 즉 역모를 위해 간 거라면 참으로 이 역모는 어설프기 그지 없다. 어떻게 하면 한양 내에서 소문이 짜하게 퍼지고, 사도세자가 돌아온 이후에는 사도세자가 관서에 간 것을 모르는 사람이 영조 말고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애초에 역모를 하려면 비밀 유지가 필수 아니던가? 더군다나 역모 혐의라면 그걸 아는 즉시 영조가 세자를 제거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알면서 보고 안 한 신하들도 단순 파직 정도가 아니라 유배나 처형을 했을 것이다. 세자의 역모 혐의를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것은 신하들의 불충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그러므로 신료들 역시 바로 영조에게 이 사실을 알렸을 가능성이 높다.

 

 홍계희가 역모를 꾸몄거나 사도세자를 해치려 하였는지도 의문. 애초에 그가 역모를 꾸몄다면 영조가 가만히 두었을 것 같지도 않고 적어도 정조 초기 홍계희의 후손들이 줄줄이 벌을 받을 때도 반역 혐의가 거론되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2) 또한 사도세자를 해치려 했는지도 의문인 것이 정조가 처음 즉위한 후 자신의 원수들을 거론했을 때는 이미 죽은 홍계희는 거론되지 않았었다. 홍계희가 거론된 건 한참 지난 후. 즉 홍계희 일족이 완전히 몰락한 1790년대 이후였다.

 

 결국 가장 타당한 해석은 사도세자가 유람을 위해 평양으로 갔다는 것이다. 세자가 국토를 순시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놀고 즐기기 위해서 평양으로 갔던 것이지 별 것 없었다. 하지만 사실 이것도 문제기는 했다. 고작 놀기 위해서 대리청정하는 세자가 내시보고 비답을 쓰라고 하고 평양에 갔으니까. 이는 세자가 비정상이었기 때문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고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광증은 더욱 더 심해질 뿐이었다.

 

 

 

- 사도세자의 행동은 이미 충분히 이상하기는 했지만 이제 더욱 더 나락으로 빠질 일만 남게 되었다. -

 

* 홍계희 등의 영조로 하여금 사도세자를 만나보게 해서 세자를 위기에 빠뜨리려고 했다는 설은 개인적으로 신뢰도도 낮고 딱히 연관성도 없는 것 같아서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원인이 된 안윤행의 글은 다시 세자가 있는 창덕궁으로 환궁할 것을 권하는 것이었지 영조로 하여금 사도세자를 만나보라고 권했던 것이라고 보기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1) 하지만 변상벽이 그린 초상화를 사도세자는 생전에 받지 못했다. 10년 후에야 그 초상화는 정조와 혜경궁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이 그림은 지금 남아있지 않다.

 

(2)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홍인한 숙청 당시 한정. 홍계희 일족이 정조 암살 음모를 꾸민 것이 발각된 이후에는 반역 혐의까지 추가되었다.


핑백

  • 임오화변 최악의 비극 &lt;15&gt; 관서유람. | Freedom Developers 2011-09-30 15:16:39 #

    ... 그러자 신하들은 안되겠다 싶었는지 세자에게 진현례를 행할 것을 여러차례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런 상소들은 무시되었다. 물론 세자 자신도 신하들의 이글루스 &#8216;역사&#8217; 테마 최근글 Posted on September 30, 2011 by acousticlife. This entry was posted in Rss an ... more

덧글

  • 누군가의친구 2011/09/30 15:28 #

    이제 비극의 막바지로 가는군요.(...)

    PS:
    각주 1번 하니...
    한국전쟁 당시 서울 탈환과정에서 폭격등으로 인해 왕의 어진을 모아둔게 홀딱 타버렸으니 말입니다. 철종어진만 봐도 거의 절반 이상이...ㄱ-
  • 로자노프 2011/09/30 15:52 #

    뭐.. 아직 비극의 그날 사이에 2편은 남았습니다.

    덧 : 그건 이야기가 다른게 전쟁 이후 부산에서 방치됬다가 불타버렸다는 말도 있더군요. 진짜 그 때 남은건 손에 꼽죠...
  • 야스페르츠 2011/09/30 18:40 #

    행장을 가지고 실록을 뒤집으려 하다니.... 역시 떡사마로군요... 쳇..

    ps.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행장의 결정판이라면 이누야샤 김억추 대감이 계십니다요. ㅋㅋㅋ
  • 로자노프 2011/09/30 21:42 #

    그러게나 말입니다. ㅎㅎㅎ
  • 신노스케 2011/10/01 13:59 # 삭제

    그런데 행장의 주장을 돌이켜보면
    도적의 모의를 알면 그냥 왕에게 말하면 그만이고
    쿠데타 기도는 사도세자 상태를 알면 불가능에 가까운데...
    왜 그렇게 꼭 억지 해석을 하는지....
  • 로자노프 2011/10/01 16:58 #

    그러게나 말입니다. 참.... 맞는 말씀입니다.
  • BB 2011/10/02 03:28 # 삭제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다른 사이트에서 사도세자 관련 글을 썼었는데, 어제 완결냈습니다.
    http://www.pgr21.com/zboard4/zboard.php?id=freedom
    여기서 "그 때 그 날"이라는 제목을 가진 글들. 네 닉네임 눈시BB로 검색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많은 부분에서 로자노프님의 글과 겹치지만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싶은 건 그냥 적었고, 로자노프님의 생각이 맞다 싶은 건 다로 여기를 링크했습니다. (__); 부족한 글이지만, 봐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관서행에 대해서... 로자노프님도 유람으로 결론 내리셨지만, 돌아오자마자 그 답지 않게 유생들을 만나고, 유생들도 말썽꾸러기 꾸짖듯 하는 모습, 세자가 급히 진현한 모습 등을 보면 큰 일을 하고 온 게 아니라 큰 잘못을 저질러서 안절부절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동감하구요. 그래도 9월은 누군가가 귀뜸이나마 해 준 게 아니었을까 싶네요.

    그것과는 별개로 관서행이 4월인데 비해 300년 종사 세손 어쩌고 하는 얘기가 있던 게 1월이라는 걸 생각하면 영조가 진현하지 말라고 한 건 진심으로 세자를 보기 싫어서일 것 같습니다.

    이전에 쓰셨던, 실록에 기록되지 않은 전교. 그 전후에 신하들은 심심하면 세자에게 잘 해라 그러고 영조는 "내가 뭘 잘 못 했냐? 세자가 공부 안 하니까 그런 거지"라면서 역정을 내죠. 이 해 2월에 세자에게 갑자기 좋은 모습을 보여 준 건 이 부분에서 진심인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좋게 대해 줫는데 세자는 진짜 병이든 꾀병이든 여전히 공부를 안 했고, 8월에 가서 완전히 터진 거구요.

    그 직후 왕손을 세손으로 책봉하더군요. 그 때 전교가 어떤 내용이든간에 영조는 마지막 기회를 줬고, 늦어도 8월 즈음에는 '다른 생각"을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 후에는 마치 정성왕후에게 그랬듯, 정말 싫어하는 자식이라서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역모를 뒤집어 씌울 건수만 찾은 게 아닐까 하는 게 쟁각입니다.
  • BB 2011/10/02 03:35 # 삭제

    아 그리고 이 때 진현을 계속 청하던 신하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도 그런 결정적인 변화를 느꼈던 것 같고... 의외로 이렇게 사도세자 편을 든 건 그가 죽는 날까지 계속된 것 같습니다.
    영조가 정조에게 원수라고 했던 김상로가 사도세자가 죽던 그 때 그를 옹호했던 죄가 있다고 실록에 기록돼 있더군요. 그 김상로조차 이 정도면 그 때 분위기는 다 반대였고, 홍봉한도 영조가 겨우 설득해서 끌어들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 로자노프 2011/10/02 16:30 #

    맞는 말씀입니다. 저 역시 거의 모든 면에서 님과 의견이 같습니다. 다만 300년 종사 세손의 경우.. 1월에도 있고 10월에도 있었습니다. 사실상 신하들에게 각인을 시킨 것 같습니다. 후계자는 세자가 아니라 세손이라고
  • 눈시 2011/10/02 21:00 #

    아, 그렇군요; 그 정도면 각인이라 봐도 무방하겠네요.
    이글루스 새로 아이디 만들었습니다. :) 로자노프님 임오화변 시리즈 끝날 때까지 열심히 읽겠습니다.
  • 로자노프 2011/10/02 21:25 #

    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이 포스트는 더 이상 덧글을 남길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