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화변 최악의 비극 <14> 300년 종사는 세손에게 달려있다. 공국 문화부 직할 역사연구소

“지금 세손(世孫)을 보니, 진실로 성취(成就)한 효과가 있다. 한없이 많은 일 가운데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니, 3백 년의 명맥(命脈)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 있다.”

 

 영조실록 영조 37년 1월 5일 자 기사 중에서

 

 

 <노세 노세 이 기회에 노세>

 

 1760년 7월 영조가 경희궁으로 옮기게 되면서 사도세자와 그 가족, 시중드는 내시, 궁녀들만이 창덕궁에 남게 되었다. 이제 세자는 어느정도 숨통이 트이게 된 것이었다. 그러자 사도세자는 창덕궁의 후원에서 말을 몰고 무기도 휘두르고 활을 쏘면서 놀았다.(1)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었다.

 

 

- 비원이라고 불리는 창덕궁의 후원. 영조가 없는 이 곳에서 사도세자는 말도 몰고 활도 쏘면서 놀았다. -

 

 하지만 일국의 세자. 그것도 대리청정을 하는 세자가 공부를 하거나 정사를 돌보지 않는 것에는 문제가 있었다. 물론 사도세자한테도 할 말은 있었다. 스트레스를 이렇게라도 풀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런 류의 놀이는 어릴 때부터 간혹 해온 것. 결국 사도세자는 1761년이 되면 몰래 궁궐 밖으로 나가 놀기 시작했다. 미행을 즐겨 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밖에 나가서 주로 하는 일은 기생 외입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덤으로 훗날 있을 나경언의 고변 등을 통해 볼 때 언제인지 추측할 수는 없으나 사도세자는 북한산성으로 유람을 가기도 했고 안암동의 비구니 가선을 궁 안으로 몰래 들였다고 한다. 물론 몰래 들인 이유야 뻔한 것이었다. 거기에 사도세자는 궁 내에서 환관, 궁녀들과 함께 자주 잔치를 열고 자주 그들에게 상을 내렸다. 감히 추측하건데 유희는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보이나 상을 내린 것은 살해의 위협에 시달리던 환관들과 궁녀들을 달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아니면 자신이 아끼는 자들에게 한없이 베푼 것일 수도 있고. 그리고 이로 인해 동궁의 재정이 빈곤해지자 시전 상인들한테서 거액의 돈을 빌리기를 반복했다. 당연하게도 이 돈을 갚지 않아 상인들은 큰 돈을 강탈당한 셈이 되었다. 이전부터 좀 심각한 기미를 보이기는 했으나 이제 세자의 비행(非行)은 도를 너무나도 지나치게 되었다.

 

 <아들은 싫지만 손자는 귀엽다.>

 

 이 와중에 영조는 점점 세손을 총애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세손은 공부를 좋아했고 총명하기까지 하여 질문에 답하는 것에 막힘이 없었다. 신하들은 세손의 총명함을 칭찬했고 영조 역시 세손의 총명함에 기대를 걸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한 구분이 엄격했던 영조. 그에게 세손은 정말로 사랑스럽고 귀엽고 총명한 존재였다. 자연스럽게 미운 털 박힌 세자보다는 그 아들인 세손을 더 보고 싶어했다. 1760년 9월 10일 자 기사는 이런 상황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

 

시강원(侍講院)에서 아뢰기를,
“금월 13일이 대전(大殿)의 탄일(誕日)이므로, 왕세자가 진현(進見)하겠다는 영(令)이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바야흐로 문후(問候)하는 중에 있으니 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강서원(講書院)에서 아뢰기를,
“왕세손이 진현(進見)하겠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날을 만나니, 네 할아버지의 마음이 갑절 더하다. 이미 내가 배례하지 못하였는데 무슨 마음으로 너로 하여금 와서 절하게 하겠느냐? 너를 본 지 오래이므로 한번 불러 보고싶다. 마땅히 일후(日候)를 보아가며 부를 것이니, 이날은 고요히 있어 내 마음을 편하게 하라.”
하였다.

 

 

 

- 영조는 자신이 명백하게 아들보다 세손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대우가 천지차이다. 세자가 오랜만에 진현을 하겠다고 하니 병을 치료하는 중이라며 막기만 하고 세손이 진현한다고 하니 너를 본지 오래됬다면서 일후를 보아가며 부르겠다고 답하였다. 아들보다 세손이 더 보고 싶다는 것을 드러낸 부분이다. 그리고 1761년 쯤 되면 이제 그 총애가 심상치 않은 정도로까지 흐르게 된다. 1761년 1월 5일자 기사를 한 번 살펴보자.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을 하며 왕세손에게 시좌(侍坐)하도록 명하고, 세손에게 하문하기를,
“공(功)을 성취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사업(事業)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떤 것이 사(事)가 되고, 어떤 것이 공(功)이 되며, 어떤 것이 업(業)이 되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사와 업은 모두 해야 할 도리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직 하늘의 도(道)만이 크고 오직 요(堯)임금만이 그것을 본받았다고 하는데, 대체로 하늘은 높은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본받았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요임금은 바로 성인(聖人)이며 성인으로서 극도의 경지에 나아갔기 때문에 하늘과 덕(德)이 합쳐졌으니, 스스로 그것을 본받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열 살된 아이의 견해로는 〈이 정도 되기가〉 참으로 어렵다.”

 (중략) 

“우리 나라가 거의 희망이 있다. 그리고 이른바 부인(婦人)에 대해서 마씨는 문모(文母) (2)라고 하고, 유 시독(劉侍讀)은 자식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는 의리가 없으니 읍강(邑姜)(3)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하였는데, 어느 학설이 옳은가?”
하자, 대답하기를,
유 시독의 학설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많은 신하가 있은 뒤에야 정치를 할 수 있겠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신하가 비록 적더라도 임금이 훌륭하고 신하가 현명하면 정치를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부인(婦人)도 정치를 도울 수 있는가?”
(중략)

  임금이 말하기를,

“어진 이를 불러오게 하는 일이 쉽겠는가 어렵겠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몸소 어진 덕(德)을 행하면서 어진 이를 오게 한다면 쉬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순(舜)임금에게는 다섯 사람의 신하가 있었는데, 순임금의 성덕(聖德)으로 단지 다섯 사람만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다섯 사람만 말한 것은 가장 어진 사람만 열거하여 말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진 사람이 늘 좌우에 있으면서 너에게 게을리하거나 하던 일을 버려두지 말라고 권면하면 고달프지 않겠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어진 이가 저로 하여금 어질게 하려고 하는데, 그의 말을 들어야만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순임금과 무왕은 하늘처럼 높아서 미칠 수 없겠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비록 높다고 하더라도 힘써 행하면 이를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강관(講官)에게 앞으로 나아오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지금 세손(世孫)을 보니, 진실로 성취(成就)한 효과가 있다. 한없이 많은 일 가운데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니, 3백 년의 명맥(命脈)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 있다.”

 

 상당히 길게 인용하였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가지이다. 첫째는 10살 밖에 안 된 세손의 학식이 이미 10살이라고 보기는 힘들 정도로 상당히 깊었다는 것이다. 10살 어린이의 생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명쾌하고 논리적인 답변. 세손이 총명하고 아주 열심히 공부했다는 것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영조가 과연 귀여워할 만 했다. 거기에 두번째는 영조가 그런 세손을 칭찬하면서 '300년 명맥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있다' 고 한 것이다. 전후 맥락을 짚어볼 때 칭찬으로 한 말 같지만 조선의 명맥이 '오직 세손에게만 달려있다'는 칭찬은 예사로운 칭찬이라고 보기는 힘든 부분이다. 이것은 영조가 슬슬 세자 대신 세손이 왕위를 잇는 안을 고려하고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http://www.koreanhistory.org/image/webzine/010/003.jpg

 

- 세손은 총명함과 공부로 영조를 기쁘게 했으나 동시에 영조가 딴 생각을 하게 했다. -

 사도세자와 혜경궁 역시 영조가 유별나게 세손을 총애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사도세자는 혜경궁과의 다음 대화를 볼 때 영조의 의도 자체를 눈치챈 것으로 보인다.(4)

 

"아마도 무사치 못할 듯 하니 어찌할꼬."

"안타깝소마는 설마 어찌하시리이까

"어이 그러할까. 세손을 귀하게 대하시니 세손이 있는 이상, 날 없애도 상관없지 않은가."

"세손이 저하(5) 아들인데 부자가 화복이 같지. 어찌 다르리이까?"

"자네는 잘못 생각하네. 더욱 날 미워하시어 살 길이 점점 어려우니 나를 폐하고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으면 어찌할까본고."

"그럴 리 없습니다!"

"두고 보소. 자네는 귀히 대하시니 내 부인이로되 자네는 물론 자식들도 예사롭겠지만 나는 병이 들어 이러하니 어찌 살게 하겠는가."

 

사도세자 역시 이 변화를 직감하고 사실상 체념에 가까운 상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정신병에 시달리던 세자가 이를 직감한 판이고 영조가 이미 직접적인 언급을 한 상황. 슬슬 대소신료들도 영조의 의중을 파악해나가고 있었다. 물론 아직 비극이 오려면 조금 기다려야했지만.

 

 

-사도세자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를 막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죽음>

 

 1761년 들어 세자의 의대증은 또 심해지게 되었다. 이전에는 옷이 맞지 않으면 불태우는 정도였지만 이제 의대증은 점점 심각한 경지에 이르렀다. 사람을 죽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1761년 1월. 세자는 자신이 총애하던 경빈 박씨. 즉 박빙애를 칼로 죽였다. 옷을 갈아입다가 의대증이 발병한 것이다. 아버지와 다투고 화완옹주의 처소에 감추기도 할 만큼 총애했던 여인일지라도 의대증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이 때 이재난고 등에 의하면 갓 돌을 넘긴 박씨의 아들 은전군도 칼에 베였고 영조는 은전군을 밖의 연못에 던졌다고 한다. 이 때 정순왕후가 이를 알고 연잎 위에서 가는 숨을 쉬고 있던 은전군을 구해주었다고 하는데 여러 정황을 미루어 볼 때 정순왕후가 구해줬다는 부분은 후대의 윤색으로 보인다. 당시 영조와 세자는 따로 살고 있던데다가 당시 기록 등에 의하면 영조는 박씨의 죽음을 나경언의 고변이 있고서야 알게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1761년 봄에는 영의정 이천보, 우의정 민백상, 좌의정 이후가 연달아 죽었다. 이 세명의 죽음을 두고도 말이 많은 편이다. 실록에서는 병사라고 기록되어있으나 각종 인명사전은 그들이 세자의 관서유람에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고 한다. 하지만 관서유람은 삼정승이 모두 죽은 이후의 일이다. 정병설 교수는 연달아 일어난 삼정승의 죽음을 사도세자와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했다. 특히 이후가 죽기 10일 전에 임금과 간쟁한 것을 그 근거 중 하나로 들었다. 그러나 상황을 볼 때 이 삼정승의 죽음은 단지 우연일 뿐. 사도세자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중록이나 정병설 교수의 연재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므로 일단 적어두는 바이다.

 

(1) 다만 7월 달에 온양온천으로 거둥했으니 실질적으로는 8월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2) 마씨는 한나라의 학자 마융. 문모는 주나라 문왕의 비로 후덕하기로 소문난 태사를 말한다.

 

(3) 유시독은 북송의 학자 유창. 읍강은 주나라 무왕의 아내를 가리킨다.

 

(4) 사실 이 부분은 한중록에서는 관서유람에 대한 기록 뒷부분에 있으나 세손과 관련된 부분이라 특별히 앞으로 당겼다.

 

(5) 정병설 역 한중록에서는 마누라라고 되어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표기대로 저하로 수정하였다.


덧글

  • 누군가의친구 2011/09/25 08:09 #

    오히려 총명한 세손(정조)의 존재가 영조로써는 칼을 꺼내게 만든 요인이 되고 말았군요.
  • 로자노프 2011/09/25 11:32 #

    그렇게 된 셈이죠. 쪕.
  • 신노스케 2011/09/25 08:54 # 삭제

    저쯤되면 사도세자와 정조 관계도 매우 좋지 않았으리라 짐작됩니다
    정조도 그 원인을 알았을 것이고요
    그래서 사도세자 추숭에 그리 정렬적으로 임했는지도..
  • 로자노프 2011/09/25 11:33 #

    글쎄 사이가 좋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실록이나 한중록이나 모두 그 쪽 부분 묘사는 그닥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정조는 자라면서 깨달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 잘읽고 있습니다. 2012/12/11 15:00 # 삭제

    정조는 천재였군요.. 늦었지만 정말 잘 읽고있습니다.

    뭐랄까 숙종의 유전자 자체가 천재와 광기를 모두 가지고 있다가
    광기가 제대로 발현된 부분이 사도세자, 천재가 제대로 발현된 부분이 정조가 아닐까 합니다.

    저도 정조가 자라면서 들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살아계신 어머니와의 대화,
    귀여워해주신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할아버지와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닫지 않았을까 조심스래 생각해 봅니다.

    개인적으로 사도세자는 아들을 사랑했을것 같습니다.
    후천적으로 얻은 정신병이니 만큼..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만족을 못시키는 자신에 대한 불만도 분명 있었을껍니다.
    거기에 만족을 시켜주는 자신의 아들을 보면서 마음을 비웠겠죠.
    아 얘가 있으니 그래도 됬다...하는 안도감도 있지 않았을까요.
    사도세자가 진심으로 아들을 미워했다면..
    자신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에 불만을 품고 죽였겠죠. 이미 살인도 몇번 했던 사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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