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화변 최악의 비극 <13> 폭풍전야 공국 문화부 직할 역사연구소

“전하께서 동궁에게 항상 엄격한 위엄을 가지고 주로 대하셨기 때문에 저하(邸下)가 지나치게 스스로 두려워하고 조심합니다. 어 젯밤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더라도 저하께서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조심하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 영조실록 영조 34년 7월 8일자 기사 중에서 -

 

 <세자의 두려움>

 

 지난번 글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세자의 불안증이었다. 1758년 7월 경 세자는 병에 걸렸는데 이에 영조가 세자를 찾아갔다. 그런데 세자는 영조가 온다는 소리를 듣자 밤이 새도록 자지 못했다. 아버지가 그만큼 두려웠던 것이다. 사실 이런 사도세자의 증세는 이미 이전부터 있어왔다. 영조실록에서 영조 31년(1755년) 4월 28일 기사를 보면 약방 도제조 이천보가 이런 말을 한다.

 

 “삼가 의관의 말을 듣건대, 동궁이 근래에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후(症候)가 있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이런 증세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의관이 대조(大朝)께 품하여 고할 것을 청하였더니, (하략)"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막히고 뛰더니 이제는 영조가 온다는 소리에 잠도 못 이루는 신세. 아버지 영조에 대한 두려움이 세자를 병들게 한 것이었다. 일국의 세자가 왕이 온다는 소리에 잠을 못 이루고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막히고 뛰는 판이니 체면이 말이 아닌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신하들은 어떻게든 영조가 세자를 조금이라도 덜 엄격하게 대하게 하려고 했다. 영조가 두렵기는 했지만 확실히 뭔가 중재를 해야 할 시점이 되기는 했으니까. 몇몇 신하들은 실제로 영조에게는 세자에게 너무 엄격하게 대하지 말 것을 주청하고 세자에게는 진현도 꼬박꼬박 하고 수업도 제대로 들을 것을 권하였다. 그렇지만 딱히 효과는 없었다. 영조나 세자나 변하지 않았다. 하기사 영조 입장에서는 이미 찍힐대로 찍혔고 더이상 아들이라고 여기고 싶지도 않은 세자였고 세자는 이미 정상이 아닌데다가 애초에 싫어하던 것들이기도 하니까.

 

 

- 영조에 대한 세자의 두려움은 매우 심각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엉뚱한 곳에서 풀게 되는데... -

 

 <조용했던 기묘년>

 

 1759년 2월. 영조는 8살이 된 원손 이산을 세손에 책봉했다. 보통 8살이 된 원자나 원손을 세자 혹은 세손에 책봉했으니 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5월에는 정성왕후와 인원왕후의 죽음으로 내려진 삼년상이 끝났다. 그리고 얼마 안 가 66세의 영조는 15살의 새 왕비를 맞아들였다. 그녀가 바로 정순왕후였다.

 

 

 

- 66세 영조는 무슨 이유에서는지 15살 손녀뻘 여인을 아내로 간택한다.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

1759년 당시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나이는 25세였다. 한마디로 10살이나 어린 여인을 졸지에 어머니로 모셔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세손도 마찬가지. 겨우 7살 많은 누나 같은 여인을 할머니로 모시게 되었다. 물론 이것을 가지고 영조를 비판할 수는 없는 것이당시에는 이런 일이 종종 있었고 왕실에서도 전례는 있었다.(1)  

 

 15살 어린 나이에 조선의 국모가 된 정순왕후는 경주김씨로 그 전해에 죽은 부마 김한신의 먼 친척이었다. 경주김씨 자체가 나름 명문가고 김한신의 먼 친척이라고 하나 정작 정순왕후와 그 가족들은 본래 상당히 한미한 집안이었다. 야사에 의하면 정순왕후가 막 태어날 당시 그 가족이 추위에 떨던 걸 마침 근처에 있던 어떤 관리가 보다 못해 도와줬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2) 그러나 정순왕후가 왕비가 되면서 그녀의 집안도 번창하기 시작했고 그 동안 정권을 잡고 있던 혜경궁의 집안과 충돌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건 훗날의 일이지만.

 

 하지만 세손 책봉과 새로운 왕비의 등장 정도를 제외하고는 딱히 1759년에는 사건이 없었다. 살인이라던지 시전상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 일이 있었던 것 같고 폭력도 행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유출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부자간에도 딱히 큰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고요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이었을 뿐이다. 어디까지나 태풍이 불기 직전의 폭풍전야의 고요에 지나지 않았을 뿐임이 머지않아 명백해진다.

 

 <아버지를 욕하다>

 

 1760년 들어서 사도세자의 광증은 더욱 악화된다. 이제는 환상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히 앞에 아무도 없는데 앞에 사람이 있다고 할 정도였다. 혜경궁은 안되겠다 싶었는지 세자가 지나는 길에 사람이 보이지 않게 하도록 조치했고 나중에는 가마에 뚜껑을 덮고 사방에 장막까지 쳤다고 한다.

 

 점점 광증이 심해지는 가운데 광증의 절정은 사도세자의 생일 때 드러났다. 사도세자의 생일날 사도세자는 광증이 도져서는 아버지 영조를 욕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증세였다. 더군다나 자신의 아들,딸들이 옷을 갖춰입고 축하하러 오자 "부모도 모르는 것이 자식을 어찌 알리."하면서 쫓아냈다. 발광이 심각해지더니 이제는 아버지까지 욕하는 말도 안 되는 일까지 벌어진 것이다.

 

 문제는 이 광경을 선희궁. 즉 세자의 생모가 봤다는 것이다. 한중록에 의하면 선희궁은 세자의 광증에 대해 듣기는 했으나 선뜻 믿지 못했는데 이 광경을 그 때 가서야 직접 보게 된 것이다.

 

 그래도 세자는 간혹가다 영조한테 진현을 하기는 했다. 물론 그 빈도는 다른 세자들의 경우보다 매우 적었지만. 어찌되었든 사도세자가 6월에 영조한테 진현을 한 것은 확실한 듯 하다. (3)

 

 그러나 영조가 7월에 경희궁으로 옮기고 사도세자는 그대로 창덕궁에 남아있게 되었다. 거리가 멀어지면서 사도세자는 다시 진현을 하지 않게 되었다.

 

 <초라한 온양행>

 

 그러던 중 사도세자는 병이 났다. 다리에 부종의 일종인 습종이 난 것이다. 이 일은 영조한테도 알려졌다. 사도세자쪽에서는 영조에게 치료를 위해 온양 온천으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온양 온천은 오래전부터 치료 효과가 유명하여 왕실에서도 행궁을 짓고 간혹 거둥하여 온천욕을 하기도 했다. 세종,세조,현종 등이 온양에 거둥한 적이 있었고 그 외에도 왕실 사람들이 온양에 가서 온천욕을 한 적이 꽤 있었다. 그러나 영조는 처음에는 이를 거부했다. 대신 영조는 훈세(한약을 끓일 때 나오는 증기를 이용하여 환처의 피부를 훈증하거나 약액으로 환처를 씻어 주는 치료법)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였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미워해서 그러는 광경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걸 가지고는 영조가 세자를 미워한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영조 자신도 가려움증이 심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온양으로 가지 않고 온양의 온천물을 떠오는 방법으로 치료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4) 온양 거둥 자체가 백성들에게 민폐가 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관들이 온천행이 필요하다고 하자 결국 영조는 세자의 온천행을 허락했다. 7월 18일에 출발해 8월 4일에 돌아오는 16일간의 여정으로 그 중 9일은 온양에서 머무는 걸로 일정이 짜여졌다.

 

 다만 한중록에 의하면 사도세자가 영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누이 화완옹주에게 온천행이 가능할 수 있도록 부탁 내지는 협박(5)을 했다고 한다. 다만 사실관계등을 볼 때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무엇보다 당시에 대한 한중록의 사실 묘사에 문제가 있다. 

 

 

- 온양온천의 전경. 현재도 많은 사람이 찾고 있는게 이 온양 온천이다. -

 하지만 영조 입장에서는 마지못해 보내는 온천. 덕분에 세자의 행렬은 상당히 초라했다. 사도세자의 온양행을 수행할 병사들의 수는 520명. 보통 왕의 행차때는 수천명이 따라붙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상당히 초라한 행렬이었다. 거기에다가 영조실록에 의하면 '사부(師傅)·빈객(賓客)이 한 사람도 따르는 자가 없었으니, 식자(識者)들이 근심하고 탄식하였다' 라고 되어있다. 세자를 모시는 세자시강원 사람들이 한 명도 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혜경궁조차도 한중록에서 너무나도 초라한 행렬이었다고 했을 정도였다.

 

 한중록에 의거한다면 당시 혜경궁의 행보는 상당히 예사롭지 않았다. 당시 사도세자는 혜경궁에게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바둑판을 던졌다고 전해진다. 가정폭력.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가정폭력이었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자신이 사도세자에 의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고 말하며 경모궁을 뵙고 싶지 않았다고 썼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언제 마지막이 될 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세손이 막내 외삼촌 홍낙윤 등을 궁궐로 불러달라고하니 그 김에 아예 일가친척들을 다 불러들여서 만나기도 했다. 혹시 모르니 미리 작별인사를 해두자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혜경궁은 사정이 나았다. 어찌되었든 그녀는 세자빈이고 그녀를 살해했다가는 나라가 뒤집힐 것이 뻔했다. 오히려 목숨이 위태로웠던 쪽은 내시들과 궁녀들. 이들은 말 그대로 파리목숨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사도세자가 사람이 달라졌는지 갑자기 매우 멀쩡해진 것이었다. 거둥행렬이 폐를 끼치지 못하게 엄명을 내리고 길을 지나는 과정에서는 위엄있는 모습을 보였다. 궁궐에서 벌어지던 상황과는 매우 딴판이었다. 오죽하면 소문으로 사도세자의 광증에 대해 들었던 충청도 사람들이 세자에 대한 서울 사람들의 말이 모두 모함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온천행이 초라한 것은 변치않았다. 훗날 정조가 지은 행장에서는 경연을 열었다지만 정작 당시 상황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왕세자가 온천 행궁에 머물다.'란 문장의 반복적인 나열밖에 없다. 딱 하나 조금 내용이 추가된 부빈이 있는데 콩밭에 군마가 뛰어들어가는 상황이 벌어져 밭 주인에게 보상을 해주었다는 정도였다. 반면 1750년에 있던 영조의 온양 거둥 당시에는 영조가 회의도 열고 정무도 보았다는 식의 기록이 아주 많이 보인다. 비록 세자지만 대리청정을 하는 세자인데 실록의 기록에서는 온천 행궁에 머물다의 나열뿐이니 그다지 화려한 행차는 아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뭐... 어찌되었든 세자가 자유시간을 보내고, 마음 놓고 푹 쉴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9일이란 일정은 너무 짧았다. 세자는 다시 돌아가야했다. 온양에서 돌아온 세자는 어디서 들었는지 황해도 평산의 온천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그 곳에 가고 싶다고 말하였으나 평산이 좁다는 말에 관둬야했다. 하지만 한 번 나가서 잘 쉬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세자는 다시 한 번 밖을 나가고 싶어했다. 그리고 이제는 몰래 궁 밖을 나가며 미행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미행 나가서 하는 일은 기생을 들이고 흥겹게 노는 것이었다.  

 

 

- 바깥에서의 행복한 경험에서였을까. 사도세자는 한층 더 폭주하기 시작한다. -

 

 (1) 잘 알겠지만 바로 인목대비와 광해군. 인목대비는 광해군보다 9살 연하였으나 그의 계모가 되었다.

 

 (2) 훗날 그 관리는 정순왕후의 청을 받아들인 영조에 의해 정승이 되었다.

 

 (3) 1760년 10월 기록 중에 4달째 세자가 진현을 안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근거한 것이다.

 

 (4) 물론 이 시도는 실패하고 영조 역시 온양으로 거둥하여 온천욕을 해야했다.

 

 (5) 특이하게도 한중록에서는 사도세자가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을 인질로 잡고 화완옹주를 협박했다고 한다. 다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정후겸이 화완옹주의 양자가 된 건 사도세자가 죽은 이후의 일이다.


덧글

  • 야스페르츠 2011/09/17 23:20 #

    잘 보았습니다.

    남자는 언제나 어린 여자를 탐하는 법...(틀려!)
  • 로자노프 2011/09/17 23:24 #

    로리콘이냐!!!!!!
  • 누군가의친구 2011/09/18 01:49 #

    로리콘 문화는 옛부터 있었으니...(...)
  • 로자노프 2011/09/18 10:35 #

    ;;;;;;;;;;;;;;;;;;;
  • 네비아찌 2011/09/18 07:44 #

    아무래도 궁을 벗어나면서 환경적 스트레스가 줄어들자 정신증상이 잠시 호전된거 같네요. 그래도 온양에 더 오래 머물렀다면 거기서도 정신증상이 나타났으리라 생각됩니다.
  • 로자노프 2011/09/18 10:35 #

    거긴까지는 잘 모르겠네요.
  • 신노스케 2011/09/18 09:08 # 삭제

    영조가 정순왕후를 들인 것은 영빈 사후를 염려한 듯 합니다
    실제 한중록에는 영빈이 새 중전을 맞아야 한다고 말을 하지요
    전혀 그럴 필요도 없는데다
    중전 없이 말년을 보낸 임금도 있고-문종-
    광해군 조에서 보듯이 새 중전이 아이라도 낳으면 어마어마한 파장이 생기리라는 것을 모를 사람도 아니었고요
    새 중전이 들어오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영빈이 왜 그랫을지 생각해보면...
    아마 세자 사후와 자신의 죽음 이후를 고려한 듯 합니다
    이미 영빈과 영조는 세자를 포기한 듯 하고 세손에 기대를 걸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혜경궁의 지위가 애매해지죠
    그냥 종친부 여인이거나 궐에 살더라도 객처럼 얹혀지내게 되죠-실제 순조 시기 정순왕후는 혜경궁의 위치를 효으왕후 밑으로 격하시키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명부를 통솔할 여인이 필요했고 부득이 새중전을 간택했으리라 봅니다
    세손은 건드리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전 정순왕후 역시 영빈 사후에야 정치적 발언을 했으리라 짐작합니다
    영조같이 호오가 강력한 사람이라면 그 큰 결정에 동조한 영빈의 힘을 쉽게 새 중전에게 주지 앟았으리라 봅니다
  • 로자노프 2011/09/18 10:35 #

    틀린 말씀은 아니라고 봅니다.
  • BB 2011/09/19 02:40 # 삭제

    실록을 보든 한중록을 보든 세자는 진짜 미칠 수밖에 없을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_-; 진짜 유전병일까요. 영조의 환경 때문이었을까요. 거기다 말들이 정말 많아서 어디까지가 진짜일지도 알 수 없구요.

    저도 요즘 사도세자 관련 글을 쓰고 있는데, 많이 참고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__)
    그리고 28년 12월의 양위소동에 대해서 제 생각을 따로 적었으니 시간 되신다면 봐 주셨으면 합니다. 해당 포스팅에 적어 두었습니다.
  • 로자노프 2011/09/19 17:59 #

    뒤늦게 봤네요. 죄송합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환경이라고 보는게 적절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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