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화변 최악의 비극 <11> 11월은 가장 잔인한 달 공국 문화부 직할 역사연구소

 

“동궁께서 평일에 너무 엄하고 두려운 까닭에 우러러 말씀 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위차(位次)로 들어가시어 신 등을 불러 조용히 하교하소서.”

 

- 영조실록 영조 33년 11월 11일자 기사 중에서 -

 

 <여색>

 

 1756년 경부터 사도세자의 광증은 매우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이즈음부터 해서 사도세자는 세자궁의 내인들을 많이 건드리기 시작했다. 여러 정황을 보건데 쌓일대로 쌓인 울화와 스트레스를 여자로라도 풀어보려고 했던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 건드린다는 게 한중록에 의하면 좀 정상적이지가 않았다. 한중록에 의하면 나인들과 관계를 가질 때 순종하지 않으면 때려처 피가 철철 흐른 다음에라도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 지는 좀 난감한 편이다.

 

 일단 일반적으로 해석한다면 나인들이 사도세자를 피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일반적으로 궁궐의 내인들의 최고의 출세길은 왕이나 왕세자와 동침하는 영광을 얻는 길 뿐이라는 걸 볼 때 이 해석대로 하면 나인들은 이미 사도세자의 광증을 알고 그 광증이 두려워 피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어찌됬든 이렇게 되면 강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병설 교수는 이런 가능성을 매우 염두에 두고 있는 편이다.

 

 그리고 좀 민망한 해석이지만 사도세자의 광증을 고려해봤을 때 관계를 맺을 때 뭔가 일이 꼬이거나 나인들이 잘 안 따를 때 폭행을 가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떤 해석이든지 간에 사도세자가 정상이 아니었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런데 이 때 사도세자는 문득 한 여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한중록에 빙애라고 나오는 여인. 즉 은전군의 어머니인 경빈 박씨였다.

 

 

 

- 광증에 걸린 사도세자는 스트레스를 아랫사람들에게 돌렸다. 덕분에 고생하는 건 아랫사람들 뿐이었다. -

 

 <박빙애>

 

 빙애는 본래 사도세자의 할머니인 인원왕후의 침방(1) 인이었다. 사도세자는 오래 전부터 그녀를 눈여겨보았다가 거상 기간이 끝난 9월에 그녀를 바로 취하였다. 다른 내인들도 많이 건드리던 사도세자였지만 빙애는 특별히 아꼈는지 빙애가 거처하는 방은 꽤 잘 꾸며놨다고 한다.

 

 그러나 본래 빙애는 인원왕후의 내인. 즉 윗사람의 내인이었던 것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내인을 범한 꼴. 사도세자로서는 이것이 영조에게 알려지면 매우 골치아파질 수 있었다. 사도세자로서는 숨기고 싶었겠지만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 법. 11월 경에 가면 영조의 귀에 이 사실이 들어가게 된다. 다만 영조는 이미 다른 일로 사도세자에 대해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태였다. 사도세자가 진현을 7월 이후로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 영조가 분노하였다! 이제 세자에게 가장 잔인한 11월이 시작되었다. -

 

(* 주의: 실록과 한중록 등을 모두 검토할 때 진현으로 인한 소동과 빙애 소동은 모두 1757년 11월 8일~11월 13일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록은 이 소동을 진현과 연관짓는 경향이 있는 반면 한중록은 빙애와 연관이 있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점이 글 쓰는 데 난항을 겪게 했고 이로 말미암아 해석 및 파악에 주의를 요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도 밑에 서술하기는 하겠지만 믿는 것은 독자 여러분들께서 잘 생각해보셔야 할 것입니다. 본인도 본인 의견에 대한 정확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최복 시위 - 실록>

 

11월 8일. 영조는 폭탄발언을 한다. 사도세자가 7월달 이후로 전혀 진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상로가 자신은 밖에 있어 몰랐다면서 손으로 땅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호들갑을 떨만큼 이는 유학을 중시하는 조선에서 문제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유학의 나라이며 효를 중시하던 조선에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주 문안을 드려야 될 의무가 있었다. 그걸 4달 가까이 빼먹은 것이다! 김상로가 밖에 있어 몰랐네 하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적어도 호들갑을 떨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세자는 이 사실을 다음날 듣고 바로 자책의 말을 남기며 자신이 6월 이후로 진현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 사실을 들은 영조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승정원에 하령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세자는 승정원에 하령을 하지 않았기에 11일. 승정원에 자신이 반성하고 있다는 하교를 내렸다. 이 말을 들은 영조는 매우 기뻐하였다. 실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기특하고 기특하다. 조선이 흥하겠구나! 비록 태갑이 허물을 뉘우쳤다 하여도 여기에 지나칠 수는 없겠고, 내가 동짓날 반포한 윤음보다 낫다. 지금 양복(陽復)의 날을 당하여 이러한 하령이 있으니, 지중(地中)에서 올라오는 일양(一陽)보다 낫다. 마땅히 빨리 반포하되 그 과실은 드러내지 말고 그것을 능히 고쳤다는 것을 드러나게 하라.”

 

 그러면서 영조는 세자에게 하유할 것이 있다며 세자와 대신들과 간원, 홍봉한을 입시하게끔 하였다. 그런데 상황이 반전됬다. 초경(2)에 영조가 갑자기 최복을 입고 숭화문 밖에서 엎드려 통곡하고 그 뒤에서 세자가 역시 엎드리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신하들은 기가 막혀 영조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영조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승지가 동궁의 하령을 가지고 와서 아뢴 데에 뉘우쳐 깨달았다는 말이있으므로 얼른 지나쳐 보고는 놀라고 기쁨을 금치 못하여 장차 경 등을 불러 자랑하고 칭찬하려고 하였는데, 자세히 보니 정신을 쏟은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동궁을 불러 묻기를, ‘옛날부터 허물을 뉘우치는 임금은 반드시 자기가 잘못한 곳을 나타나게 하기를 한(漢)나라 무제(武帝)의 윤대(輪對)의 조서(3)와 같이 한 다음에야 백성이 모두 믿을 것인데, 지금 네가 뉘우친 것은 어떤 일이냐?’고 하였으나, 동궁이 대략만 말하고 끝내 시원하게 진달하지 못하였다.”

 

 변덕이라고 해야 될까. 뭐라고 말을 해야 될 지 모를 판국이었다. 다만 신하들은 세자가 말을 어물쩡 거린 것을 영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보았다. 사실 신하들은 어느정도 이 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영조가 두려워 그 동안 딱히 말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가 이쯤 되면 달라진다. 신하들은 영조가 너무 엄격했다고 말하며 빨리 위로 올라가시라고 말하였다.

 

 일단 그 말에 따라 위로 올라가서 제전에 나아가더니 갑자기 세자한테 전위한다고 발표하였다. 승지는 놀라서 황급히 붓을 던졌다. 그러자 영조는 신하들을 불러들이고 세자를 입시시킨 후 세자를 꾸중했다. 보다 못한 신하들은 영조가 너무 엄격했다며 자애롭게 대할 것을 청하였다. 참고로 이 때 홍봉한의 발언을 보면 사도세자가 영조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다.

 

“동궁께서 평상시에도 입시하라는 명령만 들으면 두려워서 벌벌 떨며 비록 쉽게 알고 있는 일이라도 즉시 대답하지 못하였던 것은 대개 군부에게 기뻐함을 얻지 못하였고 너무 엄외(嚴畏)한 데에 연유하여 그러한 것입니다.”

 

 이 말처럼 너무나도 두려운 아버지한테서 엄청나게 꾸중을 들은 탓일까?  밖으로 나간 세자는 까무러치고 말았다.

 

<빙애 소동과 자살 소동 - 한중록>

 

 일단 한중록에 의하면 영조는 사도세자가 빙애를 데려간 거에 대해 단단히 분노하였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사실을 실토하라고 강력히 꾸중했고 세자는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영조는 이에 그치지 않고 빙애를 잡아오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이 때 사도세자는 빙애를 잡으러 온 하급 관리를 협박해 빙애를 잡아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다 영조가 빙애의 얼굴을 모른다는 걸 안 세자는 빙애 또래의 나인을 빙애라고 속여서 데려가게 한 후 빙애는 남편을 잃은 화완옹주의 처소에 숨겼다. 하지만 이를 들켜 또 꾸지람을 호되게 들어야 했다.

 

 결국 이렇게 꾸지람을 호되게 들은 사도세자는 양정합 우물에 떨어져 자살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곧 시종들에 의해 구해지게 되었다.

 

 참고로 실록에서는 이 사건이 낙상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정병설 교수는 이 까닭을 세자의 자살을 그대로 기록할 수는 없다는 식으로 은폐 비스무리하게 보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록의 각종 기록들을 볼 때 이런 가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비록 영조 즉위 이후 퇴색한 감이 있지만 사실을 그대로 적는 실록의 특성을 고려해볼때 낙상이라고 기록된 이유는 아마 영조에게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한 세자 쪽 사람들이 축소 보고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낙상이라고 보고되어도 세자한테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당연히 이 일과 관련된 관련자들이 대거 섬으로 유배되야 했다.

 

 <11월 소동의 전말>

 

  11월 소동의 원인을 어떻게 봐야 될 지는 솔직히 힘든 감이 있다. 일단 실록에서는 진현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처럼 서술하는 반면 한중록은 콕 집어서 빙애 문제 때문에 일어났다고 서술하고 있다. 더군다나 실록의 낙상 기사를 볼 때 진현 지적과 빙애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거의 동일한 시간대가 된다. 이는 이 글을 쓸 때 상당한 난관으로 작용하였다.

 

 고심 끝에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두 가지 사건이 모두 같은 시간대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다만 실록 등을 볼 때 공적으로 문제제기 할 때는 진현 문제로 시작했다고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어째 중언부언이 되고 있는데 일단 개인적으로 생각해본 전말은 다음과 같다.

 

 '영조는 7월 이후로 세자가 진현을 오지 않는 다는 데 화가 났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다가 11월 경에 세자가 윗사람의 내인이었던 빙애를 데리고 산다는 것을 알고 분노가 폭발하였다. 안되겠다 싶었던 영조는 일단 진현 문제로 이야기를 꺼내었다. 영조는 이 때 세자가 진현 문제와 빙애 문제에 대해 사죄하기를 바랬다.

 

 그러자 세자는 일단 사과하면서 승정원에 반성의 뜻을 담은 하교를 보냈고 영조는 이에 기뻐하였다. 그러나 찬찬히 다시 훑어보면서 영조는 반성문에 진현과 빙애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대로 화가 나서 세자를 추궁하고 최복 시위를 벌였다. 세자는 이 꾸중으로 인한 긴장 탓에 까무러치고 그 뒤로는 절망한 나머지 자살까지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동궁의 아랫사람들은 자살 미수 건을 영조가 아는 것을 두려워해 단순 낙상으로 보고했다.'

 

 이것이 개인적으로 생각해본 이 소동의 전말이다. 개인적인 생각이 많이 담겨있고 작성하면서도 좀 뭔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지만 이것보다 더 좋은 추론이 나오지를 않아 일단 이렇게 적는 바이며 좋은 지적이 있다면 바로 수정해야 될 것이다.

 

<최복 시위 논란>

 

 한창 아랍에서 민주화 운동이 고조되고 있던 올해 초. 즉 2011년 초엽에 사도세자 문제를 두고 이덕일과 정병설 교수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그 중에서 바로 1757년 11월 11일의 최복 시위 문제도 있었다. 이덕일은 이 사건을 두고 명백한 영조의 시위 행위였다고 보며 아주 부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정병설 교수는 당시가 상중이었으므로 영조가 최복을 입은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 이덕일에 대해 역사 쪽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의 비판적 평가나 당시 논쟁에 대한 평가가 전반적으로 정병설 교수의 판정승이라는 점을 볼 때 일단 이것만 보면 정병설 교수 쪽 주장이 옳아보인다. 그러나 문제가 좀 있었다.

 

 전반적으로 호평을 받고 있으며 고증에도 신경을 쓰는 편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정확히는 효종,현종편)에서는 어디서 자료를 얻었는지는 몰라도 왕이 최복을 입는 기간을 4~9개월이라고 하고 있다. 문제는 인원왕후의 초상이 3월 말이었고 최복 시위는 11월의 일이므로 그 사이의 기간이 7개월. 즉 중간에 속해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로 jes님과 유문기님과 논의를 가졌었다. 논의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에 따르면 예기나 오례의에서는 연제 의식은 13개월이며 왕의 평상복은 연제 이전까지는 최복이 맞는 것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다만 명사에 의하면 정사를 볼 때는 면포나 포포를 입으며 정사를 본 이후에는 다시 최복으로 갈아입어야 한다고 나온다. 이 이야기대로면 정병설 교수의 주장이 맞는 셈이 된다.

 

 유의할 것은 실록에 따르면 최복을 입을 때는 근신해야 된다는 것이다. 즉 최복을 입은 것 자체는 당시 상황 상 정상이나 정황등을 볼 때 이 경우 시위의 의도가 있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듯 하다. 다만 주의하자면 이것은 이덕일의 주장과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이 때의 논의에서 얻은 결론에서는 최복 입은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고 봤지만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에 의하면(개인적인 기억이 맞다면)최복을 입은 것 자체를 매우 부정적으로 봤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많은 도움을 주신 jes님과 유문기님께는 정말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됬습니다. 연재에 도움을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추신 1 : 이번 화의 제목은 앨리엇의 시 황무지의 유명한 문구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에서 따왔습니다. 사실 사도세자에게 1757년 11월은 정말로 잔인한 달이기도 했고요.

 

추신 2 : 지난 번 연재 글에서 사도세자가 100여명을 죽였다는 부분은 미처 말을 못했는데 그닥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죽인 건 사실인데 이걸 확인할 수 있는게 선희궁이나 영조의 발언 정도 뿐입니다. 과연 사도세자가 아무리 미치고 칼을 휘두르는 일이 잦았다고 해도 과연 100여명이나 죽였을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1) 침방 : 바느질을 하는 곳

 

(2) 초경 : 저녁 7시에서 9시 사이

 

(3) 윤대의 조서 : 윤대는 서역의 소국으로 한 무제가 그 곳을 장악한 후 윤대를 거점으로 흉노를 압박코자 하였으나 말년에 포기했다고 한다. 윤대의 조서란 기원전 89년 상홍양이 이 곳에 둔전을 두고 군대를 배치하자고 건의하였을 때 무제가 이를 기각하며 조서를 내려 이는 백성을 우대하는 것이 아니라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일을 가르킨다.

 

 


덧글

  • 델카이저 2011/08/29 17:32 #

    - 심리적으로 연쇄강간범의 심리가, 강간을 하면서 타인에게 고통스러운 것을 강요하면서 자신의 권력관계를 확인하고 이에 기뻐하는 심리라고 하더군요.. 한 마디로 약자를 괴롭히기죠;; 사도 세자의 경우 굉장히 거친 XX를 하면서 자신이 아버지에게 맨낼 깨지지만 사실 별볼일 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식으로 심리를 가졌던 것이 아닌가 싶네요..

    아무리 동궁의 눈에 드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라고 해도, 아버지에게 저렇게 미움받는데다가 정상적인 XX를 할 가능성도 별로 없어보이는 세자의 침소에 드는 일을 좋아할 나인은 없었을 듯 합니다. -_-;;


    - 유교 정부라서 그런가.. 저 수준 되면 그냥 세자 그만 두게 하던가, 아니면 죽게 내버려 두는게 나을 텐데.. 이도 저도 아니니.. 참;;;; 뭐 결국 죽이기야 합니다만;;;
  • 로자노프 2011/08/29 21:35 #

    1. 동의하는 바입니다.

    2. 애초에 유학과 관계없이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다는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특히 동생 없는 세자를 폐위시키는 건 매우 힘들고요.
  • 델카이저 2011/08/30 09:08 #

    아 사도세자에게 남자 동생이 없었군요;;;;

    하긴 장자 계승이 확고부동한 원칙인데.. 영조로서도 골치 아팠겠습니다. ㅡ.ㅡ;;
  • 회색인간 2011/08/29 21:22 #

    정신적 광증 때문에 뒤주에 가둬 죽인 셈이군요.....근데....들마나 소설에선 정치적으로 살해된 선인의 입장으로만 나오니 ㅋㅋㅋㅋㅋ
  • 로자노프 2011/08/29 21:34 #

    들마나 소설?
  • 회색인간 2011/08/29 22:11 #

    정적들의 음모로 살해되었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죠.....엠비시 드라마 이산을 보면.....급진적 개혁을 하려다 정적들의 모략에 의해 뒤주행.....소설인 사도세자도 그런 이야기였고요.....이번에 에스비에스 드라마인 야뇌 백동수도.......이건 무협극이라 고증따윈 없지만요.....
  • Jes 2011/08/29 22:10 #

    뭐 thanks to에 넣어준 것은 고마운데... 내인이 아닌 나인입니다... 초파일, 모과 등과 같은 이유로...
  • 로자노프 2011/08/29 22:16 #

    수정하겠습니다.
  • 오스왈드 2011/08/31 12:32 # 삭제

    비슷한 것이 ...
    연쇄 살인마-지금은 저승에 있는- 정남규도 어릴 때 동네 남성으로부터 성추행 당한 경험 있고 학창 시절 못된 급우들로부터 당한 적 있다 하지요
    그리고 그걸 약한 여성들에게 풀었죠
    수사관들이나 사람들이 차라리 그들을 공격했으면 동정표라도 얻지 않겠냐 했더니...
    정남규 왈 그건 생각할 수도 없다....
    자기보다 강한 상대에게 받은 상처를 약한 자들에게 푸는 싸이코패스적 행동이라 하지요...
    사도세자도 그렇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러니 혜경궁이 투기를 하지 않은 것이고요 -저건 투기가 아니라 동정의 대상이지요 여성 입장에서는...
    문제는 저런 상황이 사도세자가 정략에 희생당했다는 근거 부족의 설을 오히려 지지해주고 있지요
    설마 아버지가 저렇게 했으랴....
    부자 관계 안 좋았던 광해군 - 선조, 숙종 - 경종, 인조 - 소현세자도 저 지경은 아니었으니까요....
    정말 저 둘의 전생은 무엇이었을지...
  • 로자노프 2011/08/31 14:07 #

    그러게나 말입니다.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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