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포로 송환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을파소님 글을 보고 적는 글 공국 문화부 직할 역사연구소

 최종병기 활의 마지막 자막, 조선은 포로송환 노력을 안 했다의 진실


 최종병기 활의 경우 저 같은 경우 보지 않았습니다만, 을파소님이나 oldman님 말대로면 마지막 자막은 좀 깨는군요. 조선이 임진왜란이나 정묘,병자호란 당시 포로들을 송환받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 감독이 제대로 몰랐던 것 같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포로' 항목만 검색 좀 해봐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 수 있었을 겁니다. 아니. 하다못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인조편만 봐도 조선이 포로 문제에서 완전히 손 뗀 건 아니라는 것은 알았을 겁니다.

 일단 임진왜란부터 가보죠. 광해군 2년에 비변사가 올린 상소입니다.

“전쟁 초기에 본국의 남녀 중 포로일본에 붙잡혀 가 있는 자가 지금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으나, 지난번에 대마도에서 쇄환한 30명의 경우는 이전에 이미 관작으로 상을 주겠다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 등 한두 사람의 의견에는 지금 만약 상으로 관작을 줄 경우 이후로 쇄환한 자가 30명이 찬다면 마땅히 이 예에 의거하여 일일이 상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대마도에서 쇄환되는 자의 수가 수백 명이나 수천 명에 그친다고 한다면 그래도 우리 나라에서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수가 수천 명이 넘어도 그치지 않을 경우, 일일이 이를 보상해 주고자 한다면 쇄환을 하여 관작을 받는 왜인들의 수는 수백 명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 후로는 해마다 녹봉을 지급해 주어야만 할 것인데, 지급해 주려고 하면 계속하여 지급할 힘이 없을 것이고 지급해 주지 않는다면 잘못이 우리에게 있게 되어 저들의 원망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점이 매우 염려되니, 지금 우선 쌀과 베로 상을 주고 수년이 지난 후에는 그 동안 전후로 쇄환한 숫자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서 적절히 상을 주었으면 합니다. (하략)"

 요약하면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오게 하는 데 도움을 준 일본인들에게 관작을 주었는데 포로 수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관작 주다보면 훗날 골치아파진다는 비변사의 상소입니다. 쇄환에 도움을 준 일본인들에게까지 관작을 줄 정도면 조정의 노력이 상당하다는 반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국교 재개하면서 사명대사를 보내서 포로 3천명의 귀향을 허가받은 것도 유명하지요. 그 외에 기사가 여러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만 올려보겠습니다. 1607년. 즉 선조 41년 자 기사입니다.
 
 회답사에 쇄환사를 겸칭하도록 명하였다. 여우길(呂祐吉) 등이 떠난 후에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전후 성교(聖敎)를 보건대 사신의 행차에 우리 나라 피로인(被擄人)들을 모두 쇄환코자 한다 하였습니다. 무릇 이를 보고 듣는 자로서 누군들 감격치 않겠습니까. 구구하게 이런 거조를 하는 것은 백성을 위해 굽히는 것이니, 사신의 명호를 회답 겸 쇄환사라고 칭하고 중국 조정에 주문(奏文)할 때에도 이러한 뜻을 언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하략)

 회답사에게 쇄환의 임무까지 줬군요. 조선 조정이 백성들을 다시 송환받으려고 나름 노력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정묘, 병자 호란때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정묘호란이 끝난 직후인 1627년 11월 황해감사 장신의 상소부터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중남(仲男)등이 개시(開市)하는 일로 다시 나와서 독촉하니, 시종 막기는 어려울 듯하고, 본도 백성은 부모·처자를 잃은 자가 많은데 몸값을 내면 돌려보낸다는 말을 듣고부터는 재산을 아끼지 않고 전택(田宅)과 노비(奴婢)를 팔아 값을 준비할 계책을 하고 있으니, 저들에게 지극한 정을 펴게 할 뿐만 아니라 국가에서도 잃었던 백성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개시한 뒤에 부모 처자를 잃은 자들이 모두 많은 비용을 아끼지 않는데 부모와 처자를 만나게 되면 비록 그들이 요구하는 값을 다 치르려 할 것이고, 저들은 그 절박한 정상을 살피고는 다시 값을 올려서 요구하면 반드시 더 준비하여 귀환시킬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신은 양서(兩西) 지방 백성들은 저 적들의 이용 대상이 되어 병란을 겪지 않는 해가 없을까 염려됩니다. 그리고 저 적들은 상대방의 정세를 잘 탐지하는데, 이런 길이 열리고 나면 반드시 부모를 붙잡아두고 그 자제로 하여금 우리 나라 사정을 통보하게 하고서야 값을 치르고 데려오기를 허락한다면 이로 인해 나라에 사단이 생길까도 염려됩니다. 꼭 시행하려 한다면 잡혀간 사람들의 성명(姓名)을 기록해서 책을 만들어 역학(譯學)에게 보내서 그들의 생사여부와 남녀 노소의 값이 얼마인가를 물은 뒤에 몸값 지불을 원하는 자로 하여금 액수에 맞추어 준비해 가게 해야 할 듯합니다.”

 포로 속환의 값을 미리 정하자는 상소입니다. 왜 포로 속환 값을 정하냐면 속환을 위해서 돈을 아끼지 않고 지불했다가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고 나라의 사정을 후금 측이 알게 될까봐였습니다. 이걸 미리 막자는 거지요. 이 상소에서 알 수 있듯이 조정 관리들은 이런 포로 속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조선 쪽에서도 포로 송환에 관심을 기울였음을 이듬해 의주부윤의 상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의주 부윤 엄황(嚴愰)이 치계하였다. “용호(龍胡) 등이 파시(罷市)하고 돌아갈 때 신과 속환 차사원(贖還差使員)을 불러 말하기를 ‘전에 상경하였을 때 접대관이 말하기를 「포로를 데리고 오면 사들이겠다.」고 하였으므로 이번에 2백여 명을 데리고 왔다. 그런데 팔린 숫자가 삼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니, 어찌 이와 같이 약속을 저버리는가. 우리들 중에 혹 값을 약속하고 포로를 남겨 두었다가 추후에 와서 받아가려는 자가 있을 경우 값을 따져 사들이기로 약속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신들이 그들과 더불어 값을 따지면서 몇 차례 흥정을 하여 1인당 청포(靑布) 65필로 정하고는 즉시 문서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남녀 30인은 값을 정하고 남겨두었으며 그 나머지 많은 사람들은 모두 도로 데리고 들어갔는데, 우리 나라 국경을 쳐다보면서 통곡하는 포로들의 소리가 하늘까지 닿는 듯했습니다.”

 속환 차사원이 존재하고 용호(용골대)가 포로를 약속대로 다 사가지 않느냐고 하니까 의주 부윤이 어떻게 어떻게 해서 30인 정도를 청포를 줘서 속환을 받아내는 장면입니다. 추측컨대 일반적으로 민간인들이 사가는 형태였지만 안되면 조정에서 사들이는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즉 조정 차원의 노력이 존재한 거였습니다!

 병자호란 이후로 가면 이런 조선의 노력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도승지 이경석이 몸값 못 내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조정이 돈을 내고 사들이자고 청하는 것이 윤허되고, 최명길은 포로 몸값을 청이 마음대로 불러 송환이 더 힘들어지는 상황을 막기 위해 포로 송환 상한가를 정하자고 청했습니다. 거기에 국가 예산인 관향은을 사용해서 송환을 시키자고 하니 윤허되고 몇년에 걸쳐서 송환 노력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겨우 돌아온 여성들의 이혼 문제에 대해서도 최소한 인조 자신은 "여자들의 잘못은 전혀 없다."는 개념찬 입장을 고수했고요.

 이런 속환 문제에 대한 관심은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다음은 1640년 12월에 논의된 내용들입니다.

“그저께 등대(登對)하였을 때 삼가 성상의 하교를 받들었는데, 오늘날 쇄환하는 일은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일 국가에서 속환(贖還)하는 비용을 마련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비록 나누어 징수하더라도 사람들이 원망하거나 괴롭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조정에서 태평하게 그대로 방치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한정없는 저들의 욕심에 우리가 속환하겠다는 말을 먼저 꺼내면 높은 값을 요구하여 괴롭힐 것이 뻔합니다. 정역(鄭譯)과 친한 아래 무리에게 조용히 염탐하도록 해서 그들의 속환을 허락할 의사가 있음을 알고 나서 의주에 있는 제신에게 정역과 값을 작정하게 한다면 우리 백성을 속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영리한 사람 하나를 가려 보내어 제신에게 상세하게 유시하게 하소서.”

한인(漢人)은, 임진년에 나왔다가 우리 나라에 남아서 이미 우리 백성으로 편입되어 각기 가업(家業)이 있는데도 뒤섞여 쇄환당하였으니, 이 점이 첫째 원통함이고, 향화인은 우리 나라에 오래 거주하면서 자손을 기르고 있으며, 심지어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요역을 면하려고 그들 마을에 투속한 자들까지도 잘못 함께 체포되었으니, 이 점이 두 번째 원통함이며, 도망쳐 온 사람은 당초 진영에서 패하여 흩어진 자들로서 일시적으로 면역(免役)을 바라서 포로가 되었었다고 거짓으로 말한 것인데도 고을에서 수색할 적에 역시 면치 못하였고, 혹은 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쳐 왔거나 또는 속환되었으나 문서를 분실한 자도 모두 붙들려 감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 점이 세 번째 원통함이다. 인심이 이로 인하여 술렁거려 장차 진정시킬 수가 없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글을 짓되, 해부(該部)로 하여금 조사해서 처리하게 해 달라는 말을 하고서, 세 신하에 관한 일은 그 끝에 넣는 것이 좋겠다.”

 이 두 기사만 봐도 조선의 포로 송환에 대한 열의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 조선과 청의 평화협상에 의하면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은 무조건 청으로 보내라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조정으로서는 내키지 않지만 따를 수 밖에 없었죠. 그래도 영 내키지 않은 판이니 이런 명령이 떨어집니다.
 
“달아나 돌아온 사람을 잡아 보내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니, 배종(陪從)한 재신(宰臣)을 시켜 용(龍)·마(馬)두 장수에게 말하고 값을 주어 사서 돌려보내게 하라.”

 그러니까 무조건 도망치는 형태로 돌아왔다고 청으로 보낸 건 아닙니다. 백성을 보살피고 돌봐야될 조정의 책임감도 있으니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도 그냥 속환시키려고 합니다. 나중에 현종때 가면 도망쳐 돌아온 포로 출신을 불쌍히 여겨서 모른척하고 청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고향에서 살 수 있게 조치를 했습니다. 뭐... 들켜버려서 곤욕을 치루기는 했습니다만.

 물론 모두 제대로 송환된 건 아닙니다. 한몫 잡으려던 청나라 쪽에서 몸값을 비싸게 부르는 판이니 조선쪽에서 상한가를 정하려고 해도 제대로 될 턱이... 하지만 조선으로써는 나름 포로 송환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런데도 영화 자막에 그런 말을 넣다니.. 참으로 조선 조정은 억울합니다.

 여담: 그나저나 현재의 국군은 과연 전쟁이 터질 때 이런 포로 송환 문제에 조선 조정 수준의 관심이나 가질련지 어째 의문이 듭니다. 어디서 들은 이야기일 뿐이지만 베트남 전쟁 때도 그닥 포로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지금 보이는 여러 마인드들 보면 관심 없는게 맞을 듯요. 참 암울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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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Jes 2011/08/28 12:51 #

    뭐 사실 후금 포로 속환가가 높아진 게 누군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조선의 어느 재상이 자기 자식 사오려고 과도하게 높은 값을 불렀던 이유도 있음... 딱히 조선이 포로 속환에 적극적이었다고 하기도 힘들고.
  • 로자노프 2011/08/28 16:26 #

    아무래도 단어 사용 등에서 실수가 있었던 듯. 뭐.. 그래도 저 영화처럼 막장은 아니었다는 건 확실하죠.
  • 꼬마니체 2011/08/28 18:50 #

    김류 가 자기 첩과 서녀를 돌려주면 천금을 주겟노라 운운해서....
  • 로자노프 2011/08/28 21:21 #

    김류말고도 한명 더 있을걸요. 몸값높인 장본인.
  • 전위대 2014/06/03 18:55 #

    이정구란 쉐이였죠. 천냥 주고 아들 데려왔다던가... 그래놓고 화냥년을 주깁시다. 화냥년은 예절의 원쑤!라고 외치는 뻔뻔함을...
  • 萬古獨龍 2011/08/28 17:20 #

    한걸 안했다하면 안돼죠.
  • 로자노프 2011/08/28 21:21 #

    맞습니다.
  • 앨런비 2011/08/28 18:15 #

    달아났다가 문제 일으킨 사람때문에 사신에게 고개숙인 현종은 도대채 뭔지 ;ㅅ;
  • 로자노프 2011/08/28 21:21 #

    그러게나 말입니다.
  • 을파소 2011/08/28 21:28 #

    소극적이었다, 적극적이지 않았다 같은 게 아니라 아예 없었던 거처럼 단정적인 표현을 쓰니 문제죠. 그 차이는 굉장히 크니까요.
  • 로자노프 2011/08/28 21:35 #

    맞습니다. 암요.
  • Mr 스노우 2011/08/28 22:13 #

    전쟁 일으키고 사람 장사한건 청나라인데 까이는건 언제나 조선이라는 현실이...-_-;
  • 로자노프 2011/08/28 22:14 #

    그러게요. 쩝
  • 누군가의친구 2011/08/28 23:38 #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을 한번이라도 검색해야 하지 말입니다.ㄱ-
  • 로자노프 2011/08/28 23:55 #

    맞습니다.
  • 메이즈 2011/08/29 13:04 #

    포로 송환 노력을 하지 않으면 벌어지는 일 중 하나가 적군에게 부역하는 자들이 늘어난다는 것이죠. 아군 포로들에 대한 송환 노력을 하는 건 그 포로들이 자칫 적군에게 붙어버릴 경우 그만큼 적이 늘어나는데다 아군의 사정을 잘 아는 포로들의 이적 행위로 적이 아군의 상황을 파악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적에게 잡히면 그걸로 잊어버리는데 전투에서 죽는다면 모를까, 포로가 되었으면 살 길을 찾아야 하니 그런 행동을 하게 됩니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포로를 사실상 적에게 붙은 것으로 취급을 하다 보니 나중에는 정말로 일본군 포로들이 줄줄이 미군에게 충성을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 좋은 사례죠. 북한군이야 국군 포로건 한국 민간인이건 상대를 인간으로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가망이 전혀 없는 막장 오브 막장 집단이라 포로가 되느니 싸우다 죽는 길을 택할 거라 생각, 이래도 괜찮다고 여기는 지는 모르겠지만 상대가 중국군처럼 '상식을 어느 정도 가진' 적이 아니라는 보장은 없고 그렇게 되면 이적행위가 속출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울 텐데 너무 안일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 로자노프 2011/08/29 13:35 #

    맞는 말씀입니다. 진짜 한국군 장성들은 좀 정신줄 차려야 됩니다.
  • 不慍_불온 2011/08/29 17:29 #

    역사적 사실보다는 감독이 표현하고 싶은 주제를 위한 설정이겠죠.
    암튼, 저 영화에서 자막(특히, 마지막 자막)은 사족같이 느껴지더군요.
  • 不慍_불온 2011/08/29 17:30 #

    과녘에 홍심이 없을 정도로 고증을 했던데.. 쇄환 노력 정도야 감독이 충분히 알고 있었을듯...
  • 로자노프 2011/08/29 21:34 #

    글쎄... 표현 주제라고 해도 에러.. 그냥 보고싶은 것만 본 걸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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