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의 난은 사실 사도세자가 태어나기 이전에 벌어진 사건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임오화변 시리즈에서 다룬 바 있는 나주벽서사건 및 토역경과장 사건 (http://rozanov.egloos.com/799020 참고)이 이 이인좌의 난과 관계가 있기에 다루어 봅니다.
<반란의 계기>
경종 시절 벌어진 목호룡의 고변을 즈음하여 소론은 두 갈래로 나뉩니다. 바로 노론에 온건한 완소와 노론에 강경한 준소였습니다. 연잉군이 일단 노론의 후원을 받고 있던 고로 완소는 연잉군에 우호적이었으나 준소는 연잉군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연잉군 역시 준소를 좋아할 리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경종이 죽고 연잉군이 집권하자 연잉군. 즉 영조는 준소의 영수 김일경을 죽입니다. 거기에 더해 노론세력들은 공격을 가해 소론세력들을 제압하고 축출해냅니다. 다만 영조의 배려로 완소 세력들은 소수나마 발을 붙일 수 있었지만 준소는 거의 작살이 나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되자 이에 분노한 준소세력들은 반역을 모의합니다. 어차피 노론의 지지를 받으며 집권하고 자신들을 죽이고 축출해낸 영조를 그들은 내심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약간의 완소도 섞인 후 남인 및 약간의 북인 잔당들까지 끌어들여 거대한 반역 계획을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조직 구성과 준비>
이 준소 및 약간의 완소, 남인, 약간의 북인이 뭉친 이 거대한 조직은 조금 특이한 점이 있었다. 바로 지도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도자라고 해봐야 단순히 지방 지부 단위의 책임자 정도였지 이 조직 전체를 통솔할 리더가 없었습니다. 아니 애초에 이들이 보안을 이유로 만들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보안에 관심을 뒀는지 반역 조직 가담자들도 다른 지역의 조직에 대해 잘 알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반군 조직은 충청도, 경기 남부, 경상도, 전라도, 한양, 평안도 등에 지부를 두고 동조자들을 모으고 세력을 키웠습니다. 각 지방 지부 및 그 조직의 주요 구성원들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있었습니다.
충청도 및 경기 남부: 이인좌(윤휴의 손녀사위), 정세윤, 권서봉
전라도 : 태인현감 박필현. 박필몽, 정사효(?)
경상도 : 정희량, 이웅좌(이인좌의 동생)
한양 : 남태징, 민관효, 심유현
평안도 : 이사성
이들은 무기 및 자금 확보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들은 도적들과도 제휴했으며, 정희량은 자금 확보를 위해 한양에서 사기를 치기도 했으며, 조총 등의 확보를 위해 이사성으로부터 부족하나마 무기를 제공받기도 했습니다. 다만 반군의 계획에 의하면 주력은 경상도의 정희량이었기에 무기는 중점적으로 이들에게 돌아갔고 충청도 지부나 전라도 지부에는 무기가 별로 돌아가지 않았다. 다행히라고 해야할지 무기 부족은 영조가 함경도민들이 조총을 소지하는 것을 허가. 함경도지역에 엄청난 양의 조총이 풀리면서 해결되었습니다.
참고로 반군의 계획은 충청도 지부, 전라도 지부, 경상도 지부가 거병한 후 평안도의 정예군이 이에 호응해 남진하고 한양에서 내응하는 식이었습니다. 충청도 지부의 경우는 경상도 지부가 진격할 때 선봉 역할을 맡기로 했습니다. 차기 임금은 소현세자의 후손 밀풍군으로 정해졌고 이들은 반란 성공을 위해 경종 독살설 등으로 민심을 소란스럽게 만들기 시작합니다.(다만 그들은 실제로 경종이 독살됬다고 믿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계획이 꼬였습니다.
<고변, 반역, 그리고 진압>
한편 영조는 이런 걸 까맣게 모른채 열심히 탕평으로 노,소 균형을 맞추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노론은 계속 소론을 공격했고 결국 참다참다 못한 영조는 비상수단을 발동합니다. 바로 환국이었습니다.
영조 3년인 1726년 7월. 영조는 노론 신하들의 소론 공격에 질린 나머지 조정에 있던 노론 신하들을 대대적으로 파직하고 그 자리에 소론. 그 중에서도 완소나 청류 계열의 인사들을 대거 앉히는 환국을 단행합니다. 이른바 정미환국이었습니다. 그러자 반역 세력 내부의 약간의 완소 세력들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소론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 환국으로 이사성이 평안도에 부임하게 되는 좋은 효과를 거두긴 했지만 내부의 흔들림이 더 컸습니다. 결국 일부 이탈자들이 발생, 그들이 고변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다만 이 고변이 나온 시점에서 충청도 지부의 이인좌, 정세윤이 성급함을 이기지 못해 원래 거병 날짜보다 앞당겨 거병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고변자들이 조직을 제대로 파악한 것도 아니라 조정에서도 실체 파악이 원활하지 않던 상황에서 이들은 덕분에 청주성을 쉽게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고변자들의 정보를 조합하고 청주성이 함락됬다는 소식을 듣자 조정은 기민하게 대응합니다. 먼저 신속하게 한양의 남태징, 평안도의 이사성을 계략을 써서 쉽게 제압한 후 조정은 완소계의 오명항을 총사령관으로 한 진압군을 편성하여 진격시킵니다.
이 때 이인좌의 성급한 거병을 본 정희량이 거사날짜를 앞당겨 안음에서 거병하고 안음과 그 인근의 거창, 합천 등지를 3일만에 제압합니다. 다만 충청도로 가는 길목이 막혀 이들은 충청도로 진격하지 못합니다.
오명항은 이리 된 이상 가까운 곳에 있는 충청도군부터 박살내기로 결정합니다. 오명항은 안성에서 이인좌의 군대와 격돌. 쉽게 이들을 격파해냅니다. 참고로 안성 전투에서 오명항은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네요. 그리고 죽산에 있던 정세윤의 군대도 격파. 이로써 충청도 군대를 대파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충청도군이 대파되고 이인좌가 잡히며 충청도, 경기 남부는 제압됩니다.
한편 이인좌의 성급한 거병에 역시나 당황한 전라도의 박필현 역시 서둘러 거병합니다만.... 애초에 숫자가 800명 밖에 안 된데다가 당초부터 협력 여부가 미심쩍었던 전라 감사 정사효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서 자연 와해됩니다.
주력이었던 영남군의 경우 그래도 좀 오래 버텼습니다. 그러나 경상도 감사 황선이 반격을 개시하며 이들도 박살이 나고 맙니다. 결국 이렇게 이인좌의 난은 끝났습니다.
이 반란의 가담자들은 당연히 전원 사형되었고 국문받은 자들은 딱 1명을 제외하고 전부 죽어서 나갔습니다. 그리고 승전한 자들은 포상을 받았습니다. 다만 오명항은 그 해에 죽었고 황선은 반란이 진압된 직후 누군가에 의해 독살당하는 바람에 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황선을 독살한 자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반란의 계기>
경종 시절 벌어진 목호룡의 고변을 즈음하여 소론은 두 갈래로 나뉩니다. 바로 노론에 온건한 완소와 노론에 강경한 준소였습니다. 연잉군이 일단 노론의 후원을 받고 있던 고로 완소는 연잉군에 우호적이었으나 준소는 연잉군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연잉군 역시 준소를 좋아할 리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경종이 죽고 연잉군이 집권하자 연잉군. 즉 영조는 준소의 영수 김일경을 죽입니다. 거기에 더해 노론세력들은 공격을 가해 소론세력들을 제압하고 축출해냅니다. 다만 영조의 배려로 완소 세력들은 소수나마 발을 붙일 수 있었지만 준소는 거의 작살이 나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되자 이에 분노한 준소세력들은 반역을 모의합니다. 어차피 노론의 지지를 받으며 집권하고 자신들을 죽이고 축출해낸 영조를 그들은 내심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약간의 완소도 섞인 후 남인 및 약간의 북인 잔당들까지 끌어들여 거대한 반역 계획을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조직 구성과 준비>
이 준소 및 약간의 완소, 남인, 약간의 북인이 뭉친 이 거대한 조직은 조금 특이한 점이 있었다. 바로 지도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도자라고 해봐야 단순히 지방 지부 단위의 책임자 정도였지 이 조직 전체를 통솔할 리더가 없었습니다. 아니 애초에 이들이 보안을 이유로 만들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보안에 관심을 뒀는지 반역 조직 가담자들도 다른 지역의 조직에 대해 잘 알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반군 조직은 충청도, 경기 남부, 경상도, 전라도, 한양, 평안도 등에 지부를 두고 동조자들을 모으고 세력을 키웠습니다. 각 지방 지부 및 그 조직의 주요 구성원들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있었습니다.
충청도 및 경기 남부: 이인좌(윤휴의 손녀사위), 정세윤, 권서봉
전라도 : 태인현감 박필현. 박필몽, 정사효(?)
경상도 : 정희량, 이웅좌(이인좌의 동생)
한양 : 남태징, 민관효, 심유현
평안도 : 이사성
이들은 무기 및 자금 확보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들은 도적들과도 제휴했으며, 정희량은 자금 확보를 위해 한양에서 사기를 치기도 했으며, 조총 등의 확보를 위해 이사성으로부터 부족하나마 무기를 제공받기도 했습니다. 다만 반군의 계획에 의하면 주력은 경상도의 정희량이었기에 무기는 중점적으로 이들에게 돌아갔고 충청도 지부나 전라도 지부에는 무기가 별로 돌아가지 않았다. 다행히라고 해야할지 무기 부족은 영조가 함경도민들이 조총을 소지하는 것을 허가. 함경도지역에 엄청난 양의 조총이 풀리면서 해결되었습니다.
참고로 반군의 계획은 충청도 지부, 전라도 지부, 경상도 지부가 거병한 후 평안도의 정예군이 이에 호응해 남진하고 한양에서 내응하는 식이었습니다. 충청도 지부의 경우는 경상도 지부가 진격할 때 선봉 역할을 맡기로 했습니다. 차기 임금은 소현세자의 후손 밀풍군으로 정해졌고 이들은 반란 성공을 위해 경종 독살설 등으로 민심을 소란스럽게 만들기 시작합니다.(다만 그들은 실제로 경종이 독살됬다고 믿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계획이 꼬였습니다.
<고변, 반역, 그리고 진압>
한편 영조는 이런 걸 까맣게 모른채 열심히 탕평으로 노,소 균형을 맞추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노론은 계속 소론을 공격했고 결국 참다참다 못한 영조는 비상수단을 발동합니다. 바로 환국이었습니다.
영조 3년인 1726년 7월. 영조는 노론 신하들의 소론 공격에 질린 나머지 조정에 있던 노론 신하들을 대대적으로 파직하고 그 자리에 소론. 그 중에서도 완소나 청류 계열의 인사들을 대거 앉히는 환국을 단행합니다. 이른바 정미환국이었습니다. 그러자 반역 세력 내부의 약간의 완소 세력들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소론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 환국으로 이사성이 평안도에 부임하게 되는 좋은 효과를 거두긴 했지만 내부의 흔들림이 더 컸습니다. 결국 일부 이탈자들이 발생, 그들이 고변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다만 이 고변이 나온 시점에서 충청도 지부의 이인좌, 정세윤이 성급함을 이기지 못해 원래 거병 날짜보다 앞당겨 거병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고변자들이 조직을 제대로 파악한 것도 아니라 조정에서도 실체 파악이 원활하지 않던 상황에서 이들은 덕분에 청주성을 쉽게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고변자들의 정보를 조합하고 청주성이 함락됬다는 소식을 듣자 조정은 기민하게 대응합니다. 먼저 신속하게 한양의 남태징, 평안도의 이사성을 계략을 써서 쉽게 제압한 후 조정은 완소계의 오명항을 총사령관으로 한 진압군을 편성하여 진격시킵니다.
이 때 이인좌의 성급한 거병을 본 정희량이 거사날짜를 앞당겨 안음에서 거병하고 안음과 그 인근의 거창, 합천 등지를 3일만에 제압합니다. 다만 충청도로 가는 길목이 막혀 이들은 충청도로 진격하지 못합니다.
오명항은 이리 된 이상 가까운 곳에 있는 충청도군부터 박살내기로 결정합니다. 오명항은 안성에서 이인좌의 군대와 격돌. 쉽게 이들을 격파해냅니다. 참고로 안성 전투에서 오명항은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네요. 그리고 죽산에 있던 정세윤의 군대도 격파. 이로써 충청도 군대를 대파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충청도군이 대파되고 이인좌가 잡히며 충청도, 경기 남부는 제압됩니다.
한편 이인좌의 성급한 거병에 역시나 당황한 전라도의 박필현 역시 서둘러 거병합니다만.... 애초에 숫자가 800명 밖에 안 된데다가 당초부터 협력 여부가 미심쩍었던 전라 감사 정사효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서 자연 와해됩니다.
주력이었던 영남군의 경우 그래도 좀 오래 버텼습니다. 그러나 경상도 감사 황선이 반격을 개시하며 이들도 박살이 나고 맙니다. 결국 이렇게 이인좌의 난은 끝났습니다.
이 반란의 가담자들은 당연히 전원 사형되었고 국문받은 자들은 딱 1명을 제외하고 전부 죽어서 나갔습니다. 그리고 승전한 자들은 포상을 받았습니다. 다만 오명항은 그 해에 죽었고 황선은 반란이 진압된 직후 누군가에 의해 독살당하는 바람에 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황선을 독살한 자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덧글
조선 붕당의 균형 깬 것은 둘째치고
큰 아들 작은 아들이 모두 정상적 삶을 못 살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