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양병설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공국 문화부 직할 역사연구소

<서론>

 

 10만 양병설은 꽤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이 주장에 대해 말들이 많은 편이지요. 개인적으로 10만양병설에 대해 생각한 것은 있었으나 크게 관심은 없었는데 오항녕-이덕일 논쟁을 접한 후 우연히 집에서 10만 양병설과 관련되어 흥미로운 기록을 발견하면서 한번 써보고자 했습니다. 사실 작년부터 계획하던 것입니다만 사정상 지금 와서야 올리게 됬네요. 내공이 얕긴 하나 한번 끄적여보겠습니다.


-과연 이이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을까? 이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난립하고 있다.-

 


<오항녕-이덕일 논쟁>

 2009년 5월 한겨레는 이덕일의 글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이글루스 등에서 많은 반발이 있었으나 모두 무시되었다. 하지만 이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덕일은 한겨레에서 글을 연재하면서 10만양병설을 비판했다. 이덕일은 십만양병설이 선조수정실록에 등장하는데 선조수정실록은 율곡전서 안에 있는 김장생이 지은 이이의 행장을 보고 썼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율곡의 행장에서 유성룡이 후회하면서 '이 문성(成)은 진실로 성인이다'라고 했는데 이이가 문성의 시호를 받은 것은 인조 2년. 즉 유성룡이 사망한 지 17년 후라며 이를 근거로 10만 양병설이 김장생 등 서인들의 조작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그 이외에도 처음에는 연월미상이던게 송시열의 율곡 연보에서 임진왜란 10년 전이라고 나오는 등 후대로 갈수록 연월이 더 정확해지는 이상현상이 발생한 것과 군역을 피해 백성들이 도망친다며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켜야 했다고 이이가 주장하는 부분을 들기도 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이덕일의 전형적인 '서인, 노론은 악의 축.' 주장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 연재 당시 이덕일은 '반박 환영'의 입장을 밝혔지만 아무래도 진짜로 반박문이 투고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듯 합니다.(이 부분에 대해 당시 이글루스에 쓰여진 글들 중 하나에서는 반박문을 보냈는데 한겨레에서 씹었다는 식의 글이 있었습니다만) 

 


http://imgnews.naver.com/image/015/2007/04/19/2007041980677_2007041997361.jpg

- 이덕일은 반박 환영이라고는 했지만 실제 반박이 올거라고 생각치 않은 듯 하다. 그러나 아주 강력한 반박이 오게 되는데-


 

 그런데 반박문을 투고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오항녕 교수였습니다.



 

http://image.yes24.com/momo/TopCate96/MidCate03/9523753.jpg


- 무명의 오항녕 교수는 이미 유명할대로 유명한 이덕일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오항녕 교수는 이덕일의 주장을 반박하였습니다. 10만 양병설 관련 주장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오항녕 교수는 신도비문과 사계집에는 해당 부분이 이 문정(文靖)으로 나와있다는 사실을 먼저 지적한 후 1814년판 율곡전서에는 이문성이라고 나와있으나 1749년판 율곡전서에는 이문정으로 나와있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또한 이이가 황해감사 시절 군적을 잘 정비한 것을 들어 10만 양병설을 옹호하였습니다.

 

* 이 문정은 송나라의 명신 이항을 지칭하는 말로 선견지명이 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오항녕 교수는 유성룡의 후회하면서 한 말은 '이이는 참으로 이항 같이 선견지명이 있는 위인이구나'라고 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이덕일은 바로 반격했습니다만 군적 정비와 10만 양병설의 연관성에 대한 지적을 제외하고는 그닥 논리 등에서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엉뚱한 서지학자 운운 했다가 바로 오항녕 교수에게 '자신의 논거가 무너진 것도 모른다'는 비판을 들었습니다. 이 논쟁은 이렇게 일단락됬습니다. 다만 오항녕 교수는 이때의 논쟁을 자신의 저서인 '조선의 힘'에 그대로 실어버려서 이덕일에게 또 한 방 먹였습니다.

 

 * 여담으로 한국고전번역원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 성균관대 문헌정보학과의 신승운 교수는 율곡전서의 형태 서지에서 이문성과 이문정 문제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에 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이 형태 서지가 언제 올라왔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것이 이 논쟁 이전에 올라왔다면 이는 이덕일이 자료 확인을 제대로 안 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상식적인 의문들>

 

 일단 이 논쟁 자체는 오항녕 교수의 승리로 끝났습니다만 그렇다고 이것이 10만 양병설의 승리라고 보긴 무리가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무리가 있거든요. 일단 여기서 10만양병설과 관련되어 생각해볼만한 2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1. 10만 양병이 가능할까?

 

 일반적으로 군대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는 엄청나게 많은 돈이 듭니다. 많은 돈을 잡아먹는 고로 전근대국가 예산의 상당수는 이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군대는 순수한 소비집단일뿐 그 자체로 소득이 나오지 않습니다. 재정 부담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전쟁이 터지면 국고가 부족해지는데 이는 군대에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커지는 데 반해 수입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과는 시스템이 다른 유럽쪽의 이야기지만 16세기 후반 상비군을 운용하는 유럽 국가들은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 정도밖에 없었습니다.(스페인 20만, 프랑스 8만, 네덜란드 2만) 조선의 경우 인구가 천만명정도인 고로 역시 인구가 비슷한 스페인처럼 10만이 넘는 군대를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스페인이 저 정도의 군대를 운용하고 있던 것은 워낙 많은 곳에서 전쟁을 치루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조선은 그렇게 재정이 넉넉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조선은 백성들이 배부르고 등 따습게 사는 것을 중시하는 이념을 가진 국가였습니다. 그런 나라에서 세금을 마구 거두는 것은 욕 먹기 딱 좋은 행위였습니다. 연구가들에 의하면 당시 조선의 세율이 생산량의 10~20% 정도였을 거로 보던데 이 정도로는 10만 군대를 창설하기도, 유지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특히나 경장을 외치며 민생 안정을 중시하던 이이가 이를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 이이가 순수한 소비 집단인 군대를 10만이나 늘리자는 말을 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입니다.

 

2. 10만이나 양병할 필요가 있었을까?

 

 일단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시점은 1580년대로 보입니다. 일단 이덕일 등의 말을 빌리자면 1583년이군요. 이 때 조선이 잘 알고 있었을지도 의문이지만 한 번 주변 지역들의 정세를 살펴봐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명은 조선에 매우 우호적이었던 고로 조선을 침공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여진족은 아직 분열되있었으며 누르하치 역시 건주여진에 속한 자신의 부족들 중 한 부족의 수장 자리에 막 오른 상태였습니다. 물론 조선은 간혹가다 여진족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만 여진족 공격에 필요한 병력은 많아야 3~4만이면 충분했습니다. 10년 후 임진왜란을 일으킬 일본은 노부나가가 죽은 후 하시바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가 오미지역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호죠, 다테가 건재하며 쵸소카베, 시마즈가 각자 자신이 위치한 시코쿠, 큐슈를 막 통일하려고 하는 찰나였습니다. 이렇게 사분오열된 일본의 상황을 이이가 알았을지도 의문이지만 적어도 당장 일본의 위협이 가시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이가 10년 후를 예상하고 엄청난 비용이 들어갈 게 뻔한 10만의 군대를 양성하자고 주장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제 3의 자료>

 

 오항녕-이덕일 논쟁에서는 나름 많은 자료들이 나왔습니다.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율곡전서 및 그 속에 있는 김장생의 행장, 김장생의 문집인 사계집 등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오항녕 교수도, 이덕일도 모두 언급하지 않은 다른 서적에서 10만 양병설과 관련되어 뜻밖의 기록이 실려있었습니다. 그 서적은 바로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입니다.

 

어우야담 인륜 편의 덕의 부분에 이 10만 양병설에 대한 부분이 실려있습니다. 여기에 의하면 니탕개의 난이 진압된 후 이이가 "예로부터 나라에서 한번 군대를 쓰면 전쟁이 그치질 않습니다. 나라가 백년 평안하면 백성들은 전쟁을 알지 못합니다. 지금 비로소 군대를 썼으니, 이후로 전쟁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미리 팔도의 정예병 10만을 선발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할 것을 청합니다' 라고 말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오항녕-이덕일 논쟁에서 중점이 된 유성룡의 후회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세에 나는 소인의 이름을 면치 못할 것이다. 평소에 숙헌이 10만 군사로 대비할 것을 청했는데, 내가 사리에 어두운 짓이라 여겼으니, 지금 크게 후회된다. 숙헌은 높은 식견이 있었다. 우리 무리는 부끄러워 죽겠다. 애석하구나. 그때 내가 경연 자리에 참여하여 그 말에 찬성하지 않았음이여!"

 

 숙헌은 이이의 자입니다. 그리고 어우야담은 율곡전서(161)보다는 늦지만 적어도 1620년에는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조수정실록보다는 명백히 빨리 완성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은 북인으로 여겨지는 인물로 인조반정 후 역모 혐의로 아들과 함께 사형당한 인물입니다. 즉 서인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성혼의 문인이기는 했으나 파문당했다고 합니다.)

 

 이 제 3의 자료는 이덕일이나 오항녕 교수 모두의 의견을 반박할 여지를 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이의 자인 숙헌이 언급됬다는 것 자체가 두 사람 모두에게는 그닥 좋은 것이 아닙니다.

 

 먼저 이덕일부터 언급하자면 어우야담은 이덕일의 주장을 완전히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어우야담에는 월까지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니탕개의 난을 언급함으로써 언제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며, 어우야담에서는 이문성이나 이문정이 아닌 숙헌이라고 되어있기 때문에 조작이라고 보기도 힘들어졌습니다. 특히 유몽인이 서인에 의해 참수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습니다. 서인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인물의 저서에서 숙헌이란 글자만 다를 뿐 사실상 같은 내용의 기록이 나왔으니까요.

 

 오항녕 교수는 이덕일보다 덜하지만 그래도 이 어우야담으로 말미암아 주장의 손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어우야담은 야담집입니다. 그런 율곡전서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야담집에서 숙헌이란 글자로 유성룡의 후회가 등장했다는 것은 곧 10만 양병설 자체가 원래 야담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율곡전서에 나온 기록은 제자들이 야담으로 돌아다니던 것을 이율곡을 높이기 위해 집어넣었다는 말이 가능해집니다. 특히 행장이란 것이 고인의 좋은 행적 위주로 넣는 사사로운 기록이라 과장이나 실제 확실하지 않은 소문도 넣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가능성은 높아집니다. 더군다나 율곡전서가 편찬된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로 선조실록의 기록 부실이 잘 말해주듯이 임란 이전 선조때의 문헌 자료가 조선시대 답지 않게 부실하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더욱 확실해질것이라고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10만 양병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단순한 개인의 망상일수도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이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이율곡이 병조판서로 재직하였고 평소 경장을 외친 만큼 국방 문제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유성룡이 국방 문제에 대한 이이의 견해에 예산 등의 사유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0만 양병까지 주장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터지자 사람들은(유성룡도 포함해서) 이이가 말했던 국방 문제에 대한 인식을 생각하며 후회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록도 부실해진 상황에서 기억이 옅어지고 왜곡되면서 언제부터인가 '이이가 10만명의 군대를 양성하자고 했었지' 이런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야담으로 퍼지고 퍼지면서 이이의 제자들은 율곡전서를 편찬하며 행장으로 선생님의 좋은 업적이라 하여 그 야담을 집어넣었을 것입니다. 다만 이는 조작이나 왜곡이 아니고 그들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선생님이 실제로 그렇게 말했었다고 기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유몽인은 야담으로 퍼진 약간 다른 이야기를 수집하여 적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우야담의 기록과 율곡전서가 내용이 비슷하지만 약간은 다른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다만 주의할 점은 어우야담이 야담집이라는 겁니다. 즉 사료적 가치가 낮은 편입니다. 더군다나 유몽인이 사형당한 후 어우야담은 편집되지 못한채 전승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본들이 존재하고 서로간의 차이도 있습니다. 특히 제가 참고한 것은 만종재본으로 유몽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전혀 다른 편차와 수록 순서로 재편집된데다가 원본에서 많이 변개된 도남본을 따른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일단 제가 가진 책에 의하면 원본에 가까운 청패본과 대부분의 이야기가 동일한 성격을 띄고 있다고는 합니다만 다른 판본의 어우야담을 확인하지 못한 고로 이 부분을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일단 역자 현혜경씨에 의하면 자신의 견문에 입각하여 기술했고 사실에 입각하거나 사실지향적인 서술태도를 보이고 있다고는 합니다만 근본이 야담집이니)

 

 <여담: 율곡 이이가 주장한 국방 개혁은 어떤 것일까?>

 

 일단 위에서 저는 이율곡이 국방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고 서술했습니다. 그리고 국방 문제에 대해 나름 인식이 있었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율곡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지 않았다면 이이가 구상한 국방 개혁은 어떤 것인지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당시에 대한 자료가 매우 부족한 고로 어쩔 수 없이 김장생이 쓴 행장을 위주로 참고하자면 이이는 1583년에 여섯 조목을 아뢰었는데 이 중에는 군마의 비치, 군민의 양성, 변방 방비의 강화 등이 있었습니다. 군민 양성은 민생 안정과도 연관이 있긴 하지만 국방과 관계되었다고도 볼 수 있고 변방 방비, 군마 비치는 확실히 국방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오항녕 교수는 이이가 황해 감사로 있으면서 군적을 정리했다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추측해보면 이이는 당시 200년 가까운 평화에 젖어 문란해질대로 문란해진 국방 문제를 정비하고자 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즉 문란해질대로 문란해진 군마의 문제나 군적의 문제를 재정비하고 이를 토대로 변방의 방어를 새롭게 하고 군대를 다시 정비하려던 것입니다. 이는 10만 양병과는 거리가 있지만 재정비 위주이니만큼 민생을 안정시키면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국방 개혁입니다. 이이가 하려던 국방 개혁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요? 감히 한 번 추측해봅니다.




덧글

  • 대공 2011/08/09 19:23 #

    이런 뒷 이야기가 있었군요. 잘 보고 갑니다
  • 로자노프 2011/08/09 20:24 #

    감사합니다.
  • Real 2011/08/09 19:53 #

    계사년에 조선이 17만 대군을 임진왜란 시기에 동원한바 있었다는 점등을 고려해보고 용인전투에서 신속하게 5만명이 동원된걸 보면.. 10만 대군 문제는 좀;; 상비군 문제일 가능성이 있겠습니다만.. 조선자체가 농병일체라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그 점도 과연 이라는 의문이 나오긴하죠.
  • 로자노프 2011/08/09 20:25 #

    징병 자체라면 모르겠는데 저 10만이란게 상비군을 의미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일단 병농일치라고는 해도 이즈음이면 사실상 군포로 대신하는 판이라
  • MessageOnly 2011/08/09 20:01 #

    잘 읽었습니다.
  • 로자노프 2011/08/09 20:25 #

    감사합니다.
  • 모에시아 총독 2011/08/09 21:18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런 측면도 있었군욤.
  • 로자노프 2011/08/09 21:36 #

    감사합니다.
  • 번동아제 2011/08/09 21:19 #

    개인적으로 이이의 10만 양병설 자체가 사료적 근거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점 자체에 대해서는 동감이구요. 다만 조정 내부 사정에 대해 어느 정도 정통했던 백사 이항복이 지은 율곡비명 같은 곳에서도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거론한 것을 보면, 이이가 그런 류의 발언을 했을 개연성은 비교적 높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이가 말한 10만 양병설의 실체가 과연 무엇이냐는 것인데...이수광의 지봉유설이나 유형원의 반계수록 같은 것을 보면 임란전 조선의 군액 중에서 보인, 수군을 제외한 정병 기보병을 17~18만으로 잡고 있습니다.

    이 수치가 허왕되게 보이지 않는 것이 유성룡이 1594년에 국왕에게 보낸 차자에서 “기병 중 상번자의 숫자 2만3700명이고, 보병 중 상번자의 숫자가 1만6200명이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대략 상번군이 4만인데, 통상 조선군이 4~8번 교대 근무를 하므로 4번 교대 근무였다면 16만, 8번 교대근무였다면 32만이 나옵니다. 임란 직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상좌도 문서를 보면 4번 교대로 명시하고 있으므로 유성룡이 말한 4만x4번=16만이 나오고 이것은 이수광이나 유형원이 언급했던 17~18만에 근접하죠.

    결국 이이가 말한 것은 단순한 10만 양병이 아니라 최소한 육군 정병만 17~18만에 달했던 조선군에서 정예병력 10만을 선발하자는 이야기였거나, 아니면 교대 근무가 아닌 방식 (다시말해 무교대 長番)을 적용하자고 주장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죠.

    위 댓글에서 말씀하신 상비군이란건 결국 무교대 장번 방식을 말하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이것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입니다. 임란 이전에 내금위 등 경호 병종이 아니라 실전투병력 중 장번 근무자는 사실상 갑사 밖에 없는데 갑사를 10만으로 늘리자는 것은 조선의 재정 형편을 고려하면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죠. 조선 후기에도 불과 4000~6000명 수준의 훈련도감 장번 근무자들 때문에 수백년간 재정 부담을 논쟁을 벌입니다. 별다른 관료 경험이 없는 인물이라면 이런 주장을 할 수 있겠지만 조정 사정에 정통한 이이의 경력으로 봐서 이렇게 재정 상황상 불가능한 주장을 할 인물은 아니라고 보입니다.

    다시 말해 이이가 10만 양병을 주장한 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장번 10만명을 양성하자는 주장이라기보다는 기존의 교대제 근무방식을 유지하더라도 좀 더 정예병력을 추려서 훈련을 강화하자는 차원 정도의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 로자노프 2011/08/09 21:38 #

    번동아제님의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확실히 그것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17~18만이 전시 특수 상황으로 그런 것일 가능성은 없나요?
  • 번동아제 2011/08/09 21:51 #

    조선 전기의 군제의 뼈대는 시종 일관 "무보수 교대제 근무를 통한 병력 정원 확대"입니다. 재정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유사시 동원 병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시스템이므로 훈련 수준이 극도로 낮을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적 가지고 있죠.

    쉽게 말해 총 16만명을 2삭8번 근무시킨다고 가정하면 16개월에 2개월씩 교대 근무하는 겁니다. 평시 실제로 근무하는 병력은 2만이 되죠. 전시에는 상번 중인 병력뿐 아니라 비번인 나머지 총 7번 병력이 모두 동원되므로 전시에는 병액대로 16만을 동원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합니다. 정원을 아주 많이 잡으면서도 국가의 부담은 최소화되죠.

    애당초 제도 설계 자체가 이런 시스템이었므로 전시라고해서 새삼 병력 정원(병액)을 확대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굳이 군사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무보수 교대제 근무"에서 누락되어 있고, 재정적 부담을 지고 있는 보인을 동원하거나, 그도 아니라면 방군수포 대상 병력을 줄이는 선택을 하면 됩니다.

    유성룡이나 이수광, 유형원이 거론한 것은 분명히 정병 기보병의 병액이 분명하고, 조선 군제의 기본 특성상 임진왜란이라는 특수상황에서 증액된 병액일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판단됩니다. 유일하게 가능성을 고려해볼 수 있는 것은 전쟁 직전에 번차를 줄였을 가능성입니다. 즉 8번 근무를 4번으로 축소하는 식이죠. 물론 이렇게 하면 평시 근무자가 늘어나지만 전체 병액은 그대로입니다.
  • 번동아제 2011/08/09 21:59 #

    논지와는 상관이 없지만...위에 제가 처음 쓴 댓글에서 갑사가 장번이라고 표현했지만, 조선 초기에나 장번이었지 임란 당시에는 갑사도 교대제 근무였습니다. 무교대 장번이란 것은 필연적으로 결국 보수 지급을 전제로 하는데, 조선에서 보수를 지급하는 관료 전체 정원이 3000~5000명 수준이었습니다. 아무리 적게 준다고해도 보수 지급을 전제로 하는 상비군 병력을 만 단위 이상 확보하는 것은 조선의 재정 지출 구조상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로자노프 2011/08/09 22:12 #

    그렇다면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고 하면 이는 훈련의 강화 차원에서 이해해 볼 수도 있겠군요. 근데 문제는 이 양자가 기를 양(養)자라는 것이 좀 맘에 걸립니다.
  • 번동아제 2011/08/09 22:30 #

    훈련의 질이라는 것이 실상 아주 편차가 크기 때문이죠. 임란 직전 조선 정병 중 보병은 사실상 방군수포화되서 평시 교대 근무 자체도 군포 수납으로 대신하는 상태였고, 정병 중 기병은 상번은 하더라도 잡다한 사역에 동원되어서 사실상 "수도 주둔 노동부대"가 된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실제로 전시가 되면 정상적으로 동원될 수 있는 병력이므로, 단순히 서류상의 병력이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실전에 투입될 수 있는 훈련은 전혀 되지 않은 상황이었죠. 이런 정병 기반의 지상군은 동원 가능 여부를 떠나 실전에서 활용 여부를 논하자면 "있다와 없다"의 경계지대에 존재하는 군대입니다. 실제로 굴러가고 있는 수군과는 상황이 전혀 달랐죠.

    그러니 이런 막대한 병액을 추려서 실제 훈련이 제대로 된 군대를 갖추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選兵 대신 養兵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이가 실제 주장했던 발언이 승정원일기나 사초 같은 곳에 정확하게 축차축구 식으로 정확하게 남아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존하는 문헌에 무슨 단어로 기록되었는지도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힘들다고 보입니다. 제가 처음 단 댓글에서 "그런 류의 발언"이라고 애둘러 표현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점에 대해 선조는 아주 유명한 말을 합니다. 兵寓於農, 雖曰好制, 而我國則無兵, 只驅農民以戰, 宜其敗也
    (병농일치제가 좋은 제도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조선)는 군대가 없다. 단지 농민을 몰아 싸움할 뿐이니 패할 뿐이다)
  • 리리안 2011/08/09 21:58 #

    흥미롭네요. 일단 조선의 힘부터 읽어봐야겠습니다..
  • 로자노프 2011/08/09 22:12 #

    감사합니다.
  • 누군가의친구 2011/08/09 22:18 #

    저 논쟁과는 상관이 없지만 율곡 이이나 서애 유성룡이나 둘다 세종대왕급 구축함 2,3번함 함명으로 붙여졌지요.(...)
  • 로자노프 2011/08/09 22:21 #

    아 그런가요. 근데 둘다 문관이군요. 뭐.. 세종대왕부터가 무인은 아니시지만요
  • 누군가의친구 2011/08/09 22:25 #

    아, 그런데 이유는 있습니다.
    율곡 이이함의 경우 10만양병설...(...)
    서애 유성룡함의 경우 전시재상...

    사실 3번함은 권율함이 될뻔 했으나 권율이 육군장수에 임진왜란때 수군사령관이라 할 삼도수군통제사에게 곤장을 친것때문에 가뜩이나 육군에 대우가 밀려 불만인 해군이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그 삼도수군통제사가 원균이라는건 중요하지 않습니다...ㄱ-)
  • 2011/08/10 00:41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로자노프 2011/08/10 08:15 #

    맞는 말씀입니다.
  • 야스페르츠 2011/08/10 04:11 #

    잘 보았습니다. 어우야담이라니... 조선사에 약한 저는 그저 어우동이 떠오를 뿐...(도주)
  • 로자노프 2011/08/10 08:15 #

    어우동.... 성종때의 그 여자 말이죠?
  • 그레이트 2012/02/13 14:17 # 삭제

    임진년 이전에서 조선 백성들의 인구가 700만 정도였다는데 그 이후

    병자호란 타이밍에선 200만이 안되는 인구라니..얼마나 죽은건지..ㄷ
  • 2014/01/18 05:03 # 삭제

    율곡 이이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몇 해 전, 왜가 침략할 것이라는 혜안을 가지고 도성에 2만, 8도에 각각 1만의 병력을 두자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다.
    결국 이는 아집이 쎈 선조와 유성룡등 대신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결국
     왜에 의해 조선이 초토화되는 전란을 겪어야했다.
    이 때문에 오히려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은 현대에 더욱 주목받게되었는지도 모른다.
    당시로선 10만의 병력을 모집하는 것이 큰 어려움이었으며, 전쟁의 위협이 그다지 크지 않은 상황에서 큰 낭비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로인해 당시 조선이 입은 피해는 헤아릴수 없을 정도였다.
    약500만명의 백성들이 죽었거나 다쳤고 나라가 약50년 가까이 힘들어졌으며
    국력이 약해져 후로도 수많은 침략을 당해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분명,
    예측 가능한 위험에 대해서는 약간의 피해를 감소해서라도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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