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화변 최악의 비극 <8> 벽서와 토역경과장 공국 문화부 직할 역사연구소

"아! 조선(朝鮮)의 당은 충(忠)·역(逆)이나 군자(君子)·소인(小人)의 당이 아니라 바로 노론·소론·남인·북인의 당이다."

 

영조실록 영조 31년 9월 22일자 기사

 

 

<벽서>

 

 벽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소위 흉서, 괘서 등이 벽에 걸렸다는 기록이 자주 보이는데 벽서는 이를 지칭한다. 주로 익명으로 작성된 벽서는 조선시대에 주로 일반민의 개인적 감정 때문에 걸리는 경우가 다수였다고 하지만 체제, 정권 비판용으로 걸리는 일이 많았다. 이런 체제, 정권 비판용 벽서가 발견되면 보통 대대적인 조사를 거쳐 옥사가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런 체제, 정권 비판용 벽서는 주로 영조가 집권하고 있을 때 많이 발견되었고 그 때마다 크고 작은 옥사가 있었다.

 

영조 31년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벽서 사건은 영조시대의 다른 벽서 사건과는 그 규모와 의의가 다른 초대형 사건이 되어버렸다. 이 사건의 시작은 1755년 2월 4일 전라감사 조운규가 나주의 객사에 흉서가 걸려있다고 보고하면서 시작했다. 영조는 이 보고를 받고 웃으며 “이는 황건적(黃巾賊)의 유인데, 틀림없이 무신년 때의 여얼(餘孼)이다. 그러나 무신년에 최규서(崔圭瑞)가 고변(告變)하였을 적에도 나는 오히려 동요되지 않았으며, 오광운(吳光運)·홍경보(洪景輔)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고 말하며 벽서를 건 범인을 잡게 하였다. 그리고 1주일 후 벽서를 건 용의자로 나주에 유배되어 있던 윤취상(1)의 아들 윤지와 그와 친한 임천대, 이효식 등의 무리들이 잡혀왔다.

 

 이후 윤지와 그 무리들을 추국하면서 영조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준소에 속해있던 이들은 계를 만들어 자신들과 입장이 같은 사람들을 모으며 반역을 계획하였다. 나주 역사에 벽서를 붙인 것도 민심을 어수선하게 만들어 반역하기 쉽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영조를 분노하게 한 것은 이들이 영조 입장에서 원수라고 할 만한 김일경의 후손들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김일경을 옳다고 보는 것이었다. 국문을 받던 전 나주 목사 이하징은 국문을 받으면서 "신은 김일경(金一鏡)의 상소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신하로서의 절개가 있다고 말할 만하다고 여깁니다.”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영조가 분노할 만도 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국문을 받았으며 그 중 상당수가 죽거나 유배되었다. 윤지는 고문을 받다 죽었고 이하징, 이효식, 김주천 등은 처형되었으며, 신치운, 임천대, 이광사(2), 민효달 등은 유배되었다.

 

 아직 이광사, 민효달, 임천대의 처우가 결정되지 않았던 3월 초. 이 사건으로 기세를 탄 노론은 영조 초엽에 관작이 박탈되었다가 회복된 유봉휘, 그리고 소론의 주요 인물이었던 조태구의 역률을 추가 시행하고 소론의 영수인 이광좌의 관작 추탈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동안 노론의 소론 공격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오던 영조도 이에 호응하여 유봉휘, 조태구의 역률을 추가 시행하고 이광좌의 관작을 추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노론, 소론 간의 균형추가 노론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탕평이 무너진 것이었다.

 

 물론 영조는 역모 사건에서 이름이 나온 소론 인사들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하기는 했지만 이로써 탕평이 무너진 것은 분명하였다. 이미 그 전에도 건저, 대리, 삼수의 역으로 상징되는 자신의 역적 혐의를 지우려고 하는 과정에서 노론의 힘이 강대해지기는 했으나 나름 유지되오던 탕평이었다. 그런 탕평책을 정면으로 부술 수 있는 선택을 한 것은 잇따르는 준소 세력의 역모에 영조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 동안 영조는 정말 꾹꾹 잘 참고 있었다. 경종 시절 소론이 노론에 온건한 완소와 노론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던 준소로 분열된 후 준소는 줄곧 영조를 적대시하였다. 그들은 이미 남인 등과 연계하여 조선 전역에 걸친 비밀조직을 만들어 영조 4년에 대대적인 반란인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었고 이후에도 효장세자를 독살하고, 영조 6년에 궁궐을 폭파시키는 방책 등이 포함된 거대한 역모를 꾸민 적이 있었다. 그리고 영조 9년과 10년에 각각 남원과 대구에서 괘서 사건을 일으켰고 영조 24년에도 비슷한 사건을 충청도에서 일으킨 바 있었다. 일반적인 임금들이었다면 저 중 하나만 터져도 바로 탕평책을 취소했겠지만 탕평책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영조였기에 그나마 지금까지 탕평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영조도 끝내는 분노가 폭발하였고 이후 탕평은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 탕평을 유지하려고 했던 영조지만 이제는 그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토역경과장> 

 

그런데 아직 영조가 뒷목 잡을 일은 끝나지 않았다. 나주 괘서 사건으로 역적을 토벌한 기념으로 영조는 5월 2일 토역 정시를 열었다. 그런데 답안지를 거두어 채점하는 과정에서 심정연이란 자의 답안지 밑에 파리 머리만한 글씨로 무언가 써져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병조의 아전이 답안지 대신 심정연이 쓴 상변서라고 쓰여진 종이 한 장을 발견해 병조판서에게 바쳤는데 역시 그 내용이 불측했다. 그 내용이 매우 불측했기에 심정연은 사실이 확인되는 즉시 붙잡혔다.(3) 그리고 또다시 국문이 시작되었다.

 

 심정연은 이인좌의 난 때 처형된 심성연의 동생. 당연히 이 사건은 준소와 관계가 있었고 이 사실을 안 영조는 바로 준소의 잔당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이 일로 초안을 잡아주었으며 춘천에서 역모를 꾀한 윤지의 삼촌 윤혜, 김일경의 증손자 김도경, 그리고 앞서 나주 벽서 사건으로 귀양가있던 전 승지 신치운 등 준소의 잔당들이 대거 붙잡혀와 친국을 당한 후 처형되었다. 나주 벽서 사건과 토역 경과장 사건으로 죽은 사람은 총 200여명에 달하였으며 그 중 김일경의 후손이 11명이나 되었다.

 

 이 때 영조는 심히 분노한 나머지 나인들이 눈치만 보다 저녁밥을 올리지 못하고, 윤혜를 친국할 때는 분노가 절정에 달해 숭례문 문루 위에 올라 갑옷을 입고 군악을 연주하며 친국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윤혜를 효수한 뒤에는 여러 신하들에게 그 목을 돌려보이며 술을 마셔 대취해 장막에서 잠들었다고 한다. 갑옷을 입고 윤혜를 친국할 때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한 김재로(무려 노론), 이종성 등이 이런 거조를 보고 만류하였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사실 준소가 보여준 그 동안의 역모 행적이나 이 토역 경과장 사건 당시 관계자들의 분노는 영조가 충분히 분노할 만한 것이었다. 친국당한 자들의 발언들은 다음과 같다.

 

 심정연

 

 - “훈척과 권우를 받는 신하들을 제거하고자 하여 이 사람들을 무함하였습니다.”

 

 - "음흉하고 부도(不道)한 말로써 임금을 향해 망측한 계책을 내었으니, 신의 흉한 마음이 탄로났습니다.”

 

 윤혜

 

 - “제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에 상고하느라 썼습니다.”(4)

 

 김도성

 

 - “신은 심정연과 서로 알아서 함께 흉서를 만들었는데, 흉서 가운데 제일 부도(不道)한 말이 신에게서 나왔으니, 실로 신이 주장한 것입니다. 심정연의 시권(試券)에 이르러서는 올봄 동가(動駕) 때에 심정연이 이것을 상소하고자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이번 과거에서 시권에 써서 올린 것입니다.”

 

 유수원

 

 - “신은 신치운·박사집과 친밀하게 사귀어 침체된 바가 신치운과 다름이 없게 되었는데, 이는 오로지 조제(調劑)한 소치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는 성상을 비방하고 아래로는 조제한 여러 신하를 욕하여 몰래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쌓아왔습니다. 그리고 매양 서로 만날 때마다 흉언과 패설을 많이 하기를 김일경과 박필몽처럼 하였고, 때로는 혹 김일경과 박필몽보다 더 하였는데 신도 거기에 난만하게 수작하여 참여했습니다. 대개 신은 여러 역적 가운데 비단 흉적을 알 뿐만 아니라 이는 실로 당준(黨峻)의 마음에서 말미암아 나라를 원망하기에 이르렀으며,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에서 항상 헤아리기 어려운 패설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신치운

 

 - “성상께서 이미 이처럼 의심하시니, 신은 자복을 청합니다. 신은 갑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逆心)이며, 심정연의 흉서 역시 신이 한 것입니다.”(5)

 

 

<천의소감>

 

 토역경과장 사건까지 마무리되자 영조는 준소 등이 주장하는 자신의 역모 관련 혐의에 대해 변호하고, 집권의 정통성을 밝히게 하기 위해 6월에 김재로 등으로 하여금 천의소감을 짓게 하였다. 확실하게 이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9월. 김재로가 천의소감의 서문을 지어 바치자 영조는 대노하였다. 김재로의 서문이 당색이 짙었던 것이다. 대노한 영조는 "60세 늘그막에 태아검이 손에 있다."며 분노하였다. 결국 이천보 등의 노론 신하들이 집단으로 상소를 올려 당론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상소해야 했다. 영조는 당색을 행하는 풍속이 심하다며 이를 강력히 질책하고 태아검이 무디지 않았다는 경고의 말을 남겼다. 그러면서 조선의 당은 충,역의 당이 아닌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의 당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 어떤 당도 충신의 당도, 역적의 당도 아니며 동시에 노론을 견제하겠다는 영조 자신의 생각이 담긴 발언이었다. 이런 우여곡절끝에 천의소감은 11월에 완성되었다.

 

 

<사도세자는 무엇을 했는가>

 

 사실 나주 벽서 사건은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영조가 직접 처리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도 사도세자는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연재가 사도세자 중심의 연재이니 만큼 사도세자의 행적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단 나주 벽서 사건이나 토역경과장 사건 때 사도세자는 어느때나 다름 없이 대리청정 중이었다. 영조는 사건을 처리할 때 역적들을 사형시키는 현장에 꼭 사도세자가 나가게 하였으며 친국을 하다가 돌아오면 하루도 빠짐없이 세자를 불러 밥 먹었는지 물어보신 후에 갔다고 한다. 여러 정황을 미루어 볼 때 친국이나 사형 자체가 불길한 일인 만큼 이미 미운 털이 박혀있던 세자를 통해 불길한 일을 씼으려는 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사도세자는 대리청정 당시 소론 인사들의 국문과 처벌을 청했던 노론 측의 상소들을 윤허하지 않는 일이 많았다. 훗날 이 일. 특히 이종성을 처벌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친 소론적 성향을 가진 세자를 노론이 미워하여 제거하고자 하였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한중록에도 사도세자가 소론에 동정적이었다고 적는 바람에 이런 주장은 더욱 탄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사도세자가 이를 윤허하지 않은 것은 거의 영조의 뜻이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미 영조는 나주 벽서 사건 및 토역경과장 사건 당시 국문장에서 이름이 오르내리던 이종성, 박문수, 이철보 등의 소론 중진들을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역적과 관계되어 있다고 고한 자들을 엄하게 고문하였다. 특히 진술 과정에서 이름이 나오기도 했던 박문수한테는 직접 염려하지 말라고 말할 정도였다. 거기다가 천의소감의 서문 문제로 불같이 분노하고 노론으로부터 당색을 행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받아내었다는 것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세자가 노론 측의 상소를 윤허하지 않은 것은 영조의 입김이 상당히 작용했을 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실록을 볼 때 사도세자가 상소를 윤허하지 않은 것은 영조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봐야 될 것이다. - 

 

 

 

 *  이번 연재는 한중록보다는 절대적으로 조선왕조실록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했습니다. 덤으로 한편으로 할 지 두 편으로 할 지 고민했으나 한편으로 하는 게 낫다고 보아 한 편으로 했습니다. 덕분에 몸이 고생합니다.

 

 

(1) 소론으로 김일경과 함께 경종 시절 노론 세력 제거에 앞장섰으나 영조 즉위 후 처형되었다. 아들 윤지는 제주로 귀양갔다가 이 때 죄가 감형되어 나주에 유배된 상태였다.

 

(2) 동국진체로 유명한 서예가. 큰아버지인 이진유가 이 사건과 연관된 고로 연좌되어 유배되었다. 유홍준의 완당 평전에 의하면 "나에게 뛰어난 글씨 재주가 있으니 내 목숨을 버리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부르짖은 탓에 영조의 동정심을 사서 귀양형에 그칠 수 있었다고 한다. 단 귀양지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죽었다. 훗날 김정희에게 크게 비판받는다.

 

(3) 단 심정연이 지은 글의 내용은 확인할 수 없는데 진술 내용 등을 통해 볼 때 경종 독살설을 주장한 것 같다.

 

(4) 윤혜가 가진 문서 중 조선 임금들의 이름이 적힌 문서가 나와 이에 대해 추궁하자 한 말. 조선시대에 심각한 불충 행위라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5) 영조 1년에 사형된 이천해의 발언과 매우 비슷하다고 한다. 이천해의 발언은 영조의 명으로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치운을 국문할때 영조가 이성을 잃어 기록하지 말라는 명을 까먹은 덕에 기록되었고 덕분에 훗날의 사가들이 이천해의 발언까지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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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자노프의 작은 둥지 : 임오화변 최악의 비극 외전. 이인좌의 난 2011-08-13 21:53:00 #

    ... 이인좌의 난은 사실 사도세자가 태어나기 이전에 벌어진 사건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임오화변 시리즈에서 다룬 바 있는 나주벽서사건 및 토역경과장 사건 (http://rozanov.egloos.com/799020 참고)이 이 이인좌의 난과 관계가 있기에 다루어 봅니다. &lt;반란의 계기&gt; 경종 시절 벌어진 목호룡의 고변을 즈음 ... more

덧글

  • Falmehawk 2011/08/06 16:27 #

    "게장을 먹지 않았습니다." 이 참 후덜덜.
  • 로자노프 2011/08/06 17:52 #

    굽히지 않는 기개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영조 입장에서는 욕이 절로 튀어나올 상황이죠.
  • 델카이저 2011/08/06 18:25 #

    이것들이 단체로 처 돌았나;;;;;; 저 정도면 임금이 빡쳐서 다 죽여버려도 열 두번도 쓸어버렸겠습니다. ㅡ.ㅡ;;;

    사람이 참고 또 참으니까 만만하게 보인 건지, 아니면 나름의 가치관을 지키려고 지X을 하는 건지...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 불가군요;;;
  • 로자노프 2011/08/06 18:34 #

    아무래도 준소는 진지하게 영조가 경종을 독살한 찬탈자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실 그러지 않고서야 저 수많은 역모와 임금 빡치게 만들 행위를 하지는 않았겠죠.
  • 야스페르츠 2011/08/06 18:42 #

    이 정도면 진짜 대박 역모 사건이네요... ㄷㄷㄷ
  • 로자노프 2011/08/06 18:59 #

    일단 준소가 일으킨 역모 사건들이 ㄷㄷㄷ 더군다나 나주 벽서나 토역 경과장 보면 정말 준소 세력들은 영조에게 원한이 상당했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누군가의친구 2011/08/07 08:57 #

    그래서 게장과 인삼은 같이 먹지 않는다나요?ㄲ(그 당시 인삼 처방을 주장한게 영조.)

    그러저나 저 발언을 기록한 사서덕에 후세에 무시무시한 발언을 알수 있었군요. (그러고보니 태종이 자신이 낙마한거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한거를 태종이 지시한 내용까지 적은 사관도 있었지 말입니다.ㄲ)
  • 로자노프 2011/08/07 09:05 #

    1. 게장과 감이고 인삼차는 경종이 죽기 직전의 처방이지 게장, 감과 같이 처방한 게 아닙니다.

    2. 이상한게 조선 전기에는 왕이 기록하지 말라고 해도 대놓고 어겼는데 영조랑 정조때는 사관들이 참 왕의 말을 잘 따르더군요. 직업 정신이 좀 약해진건지...
  • 누군가의친구 2011/08/07 09:12 #

    1. 지적 감사합니다.

    2. 태종때는 사관이 츤데레였나보죠.ㄱ-
  • 누군가의친구 2011/08/07 09:17 #

    혹은 영조와 정조가 사관에게 기아스를 걸었다던가 말입니다.(어이...)
  • 로자노프 2011/08/07 09:27 #

    기어스? 아... 혹시 당수가 포스팅한 적이 있던 그 문제 많은 애니에 나온다고 하는 거 말이군요. 그럴 수도 있으려나...
  • 오스왈드 2011/08/08 07:59 # 삭제

    떡사마님이 매우 좋아하던 소재였죠
    그래서 저도 한 때 믿었던 적 있고...
    하지만 저 나름대로 조사해보니 사도세자 죽음과 저 사건은 무관에 가까운....
    굳이 이유를 대자면
    영조의 기본 정책인 탕평이 무너진 것과 그로 인해 세자 정책에서의 기본도 무너질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 정도...
    아님 영조의 본성이 드디어 드러나 부자 비극의 시초가 된 정도..
    이 이상은 없는 것 같네요
    굳이 찾자면 왜 소론 대신 조재호가 사형을 당햇을까 정도.....
  • 로자노프 2011/08/08 13:40 #

    조재호 사사의 경우는 예방 차원에서 벌인게 아닌가 싶습니다. 만에 하나 소론이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세력 반전을 꾀할까봐요. 근데 정조 시절에 사도세자의 죽음을 통해 세력 반전을 꾀한건 오히려 남인이었더랬죠
  • 한단인 2011/08/12 17:26 #

    본문과는 상관이 없긴 한데 영조 어진을 보니 참.. 원로배우 이순재와 이미지가 상당히 흡사하군요. 정조 이산 때 이순재씨가 캐스팅된 것은 정말 잘된 것인 듯..
  • 로자노프 2011/08/12 17:50 #

    이순재씨가 이런 데 잘 어울리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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