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화변 최악의 비극 <7> 광증이 나타나다. 공국 문화부 직할 역사연구소

"뇌성보화천존이 뵌다. 무서워 무서워."

 

-한중록 중에서-

 

 <옥추경>

 

 이미 이야기했지만 사도세자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때 부터 사도세자는 유교 경전이나 역사서와는 담을 쌓고 노는 데만 집중했다. 그나마 보는 책들이 있기는 했는데 이것은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 그닥 취급이 좋지 않던 소위 '잡서'들이었다. 사도세자가 죽기 며칠 전 서문을 쓴 '중국소설회모본'에는 '금병매' 같은 중국의 소설들부터 '성경직해' 같은 천주교 서적까지 무려 93종의 서적 제목이 적혀있다고 한다. 이는 사도세자 자신이 얼마나 잡서에 빠져있었는지 잘 알려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잡서에 빠져있던 사도세자이니 만큼 그가 도교의 경전인 옥추경에 흥미를 가진 것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들의 탄생과 홍역, 양위 소동으로 다사다난했던 1752년 겨울. 사도세자는 어디에선가 옥추경을 공부하면 귀신. 특히 번개를 다루는 신인 뇌성보화천존(혹은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을 부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옥추경을 밤마다 보기 시작했다.

 

 사도세자는 옥추경에 흥미를 느낀 것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고대부터 사람들은 번개를 두려워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제우스나 페룬(1), 인드라 같이 번개를 다루는 신들은 보통 주신으로 여겨졌다. 설령 주신이 아니더라도 번개를 다루는 신은 그 지위가 상당히 높았다. 그런 신을 부릴 수 있다니 사도세자로서는 혹할 만도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사도세자가 심야에 정신이 아득해지더니 뇌성보화천존이 뵌다며 무섭다고 말하는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정병설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벼락신에게 신이 들려' 자신이 뇌성보화천존에게 부림을 당하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사도세자의 병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옥추' 두 자를 감히 말하지 못하게 되었고 덕분에 단오에 왕이 신하들에게 주는 옥추단(2)도 옥추(玉樞)라는 이름이 무서워 받지를 못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다가 '우레 뢰(雷)', '벽력 벽(霹)' 같은 글자는 쳐다보지도 못하고 천둥이 치기라도 하면 귀를 막고 엎드렸다가 다 그친 후에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런 증상이 1752년 겨울에 나타났더니 53년에는 경계증을 보이고 1754년 쯔음 되면 완전히 고질병이 되었다. 혜경궁은 이 까닭에 한중록에서 옥추경이 원수라고 적었다.

 

 

 

-뇌성보화천존 그림. 출처는 '개벽이 뭐꼬'. 옥추경에서 묘사된 뇌성보화천존의 모습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심해지는 꾸중>

 

 이 와중에 사도세자는 임유혜(3) 라는 이름의 궁녀를 가까이 하게 되었다. 그래서는 어느 순간 덜컥 그녀를 임신시키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사도세자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보통 조선의 세자들은 제왕수업에 충실하면서 왕을 보필하는 일에만 종사하였다. 그래서일까. 세자 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거의 모든 조선의 왕들은 세자 시절에는 후궁이 없던 경우도 많았고 있어도 그 수는 소수였다. 세자들 중에서 예외가 있다면 양녕대군과 문종 정도였다. 하지만 문종의 경우 어떻게든 후사를 보기 위해 세종이 일부러 후궁들을 많이 붙여준 경우였다. 그리고 양녕대군은 소문난 망나니 세자. 사도세자는 덜컥 겁이 났다. 양녕대군과 같은 짓을 저지른다고 아버지 영조에게 혹독한 꾸중을 들을 것이 뻔했다. 안되겠다 싶은 사도세자는 아이를 낙태시키려고 하였으나 아이는 생명을 보전하여 1754년 2월에 태어났으니 그 아이가 은언군 이인이었다.

 

 이 사실을 안 영조는 세자를 엄청나게 꾸중했다. 한중록에 의하면 평소에도 꾸중이 많았지만 이 때는 꾸중이 한 달 이상이나 지속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세자는 두려워 움츠러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불똥이 엉뚱한 데로도 튀었다. 세자는 일단 가까이 하기는 했으나 영조가 두려워 임신한 후에는 양제를 돌보지 않았고 영조도 그렇거니와 선희궁마저 양제를 나몰라라 하였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혜경궁이 양제를 돌봐주었는데 이를 안 영조가 혜경궁에게 "남들하는 투기도 아니한다"며 꾸중을 한 것이다.(4)

 

 사실 이는 황당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여인들의 질투는 칠거지악으로 취급되어왔다. 그러므로 가장 금기시해야 될 것 중의 하나였는데 그런 질투를 안 한다고 꾸중을 한다니. 혜경궁도 우스울 뿐이라고 한중록에서 적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이즈음부터 해서 영조의 꾸중은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공부하기를 싫어했던 사도세자는 이 즈음부터 서연을 여는 일이 드물어지기 시작했던 것이 제대로 원인 제공을 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더해 서연은 본래 '낙선당'에서 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사도세자는 어찌어찌 서연을 열 때도 낙선당 대신 자신의 침실(저승전이 아닌가 싶음)에서 여는 일이 많았다.  물론 서연 자체가 꽤나 고달픈 것이었던 만큼 휴강을 하는 경우가 오래전부터 잦기는 했으나 사도세자는 그 정도가 심했고 이에 실망했는지 꾸중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물론 그 강도나 횟수가 상당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보여주는 사건이 하나 있다. 1754년 12월. 대사간 신위가 사도세자에게 영조가 삭직과 귀양을 명한 4명의 신하들에 대한 처분을 취소해줄 것을 바라는 상소를 올렸다. 사실 상소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영조는 신위를 귀양 보내는 한편 세자에게 "사람이 아들을 두는 것은 장차 효도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60의 늙은 나이에 신위에게 속여 업신여김을 받았는데, 너는 문자에 대하여 어찌하여 상세히 살피지 않았는가?” 라고까지 말하며 혹독하게 꾸짖었다. 사도세자는 용서를 빌기 위해 석고대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영조의 이런 행동들은 아무리 봐도 영조가 지나친 것이었다. 유교 사회에서도 영조식으로 아들을 막 대하는 것은 꺼리는 바였다. 그러나 영조의 권력이 강했던 탓인지 신하들은 이에 대해 뭐라고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황이 나빠지면 나빠졌지 더 나아지지 않는 이런 상황이 몇년 간 계속 반복되자 사도세자는 결국 병을 얻었다. 정신병이었다.

 

 <광기>

 

 한편 이런 상황에서 사도세자의 병은 점점 깊어지기 시작했다. 비록 사도세자의 병 자체가 이미 10대 초반때부터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지만 아직까지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홍역을 앓아 몸이 쇠약해지고 영조의 양위 소동으로 마음 고생이 심하던 1752년 겨울. 심신이 쇠약한 상태에서 옥추경을 본 뒤로는 그 증세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증세를 보고 김태형 박사는 사도세자에게 공포증과 일반불안장애가 생겼다고 추정하였다.(5)

 

 사도세자 자신도 이를 알고 있었다. 사도세자가 1753년 혹은 1754년에(6)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에게 울화증이 있으며 울화가 극하여 괴롭고 의관들과도 상의할 수 없으니 몰래 약을 지어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즈음부터 해서 사도세의 광증이 심해지게 된 것이다. 홍봉한이 이 때 약을 보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확실한 것은 약을 보냈다고 해도 효과가 있지는 않았을 거란 점이다. 아니 애초에 광증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그 약이 명약이었다고 해도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할 수 있겠다.

 

 

 

-슬슬 사도세자의 정신은 한계로 치닫고 결국 심하지 않았던 광증이 도지기 시작한다.-

 


(1) 페룬: 슬라브인들의 전통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 슬라브 신화에 나오는 신들 중에서도 으뜸 신이다.

 

(2) 옥추단: 급체 등에 사용되는 구급약

 

(3) 한중록에서는 양제라는 이름으로 주로 나오는 숙빈 임씨. 보통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딱 한번 영조가 혜경궁을 꾸중하는 장면에서 이름이 언급된다.

 

(4) 단 이는 혜경궁 자신의 주장일뿐이므로 신뢰하기에는 뭔가 좀 모호한 감이 있다.

 

(5) 하지만 정병설 교수에 의하면 김태형 박사의 사도세자 진단에는 몇가지 오류가 있다고 한다.

 

(6) 확실히 단언할 수는 없으나 그 편지가 쓰여진 계절은 '더위를 먹어서'라는 문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여름일 가능성이 크다. 


덧글

  • 누군가의친구 2011/07/31 00:19 #

    그러고보니 저 은언군 후손이...(...)
  • 로자노프 2011/07/31 00:22 #

    아마 철종이었죠? 나름 안습 임금이던 강화 도령.
  • 모에시아 총독 2011/07/31 08:49 #

    사도세자가 광증이 있었다는 것은 처음 알았네요.
  • 로자노프 2011/07/31 11:35 #

    그거 유명한 논란거리인데....
  • 한단인 2011/07/31 09:59 #

    [남들하는 투기도 아니한다]

    와.. 진심 뿜었습니다. 당사자는 오죽할까요. 물론 사실이라는 전제하의 얘기지만..


    덧. 김태형 박사의 진단이 몇가지 오류가 있다는 점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요?
  • 로자노프 2011/07/31 11:40 #

    1.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 일단 정병설 교수에 의하면 김태형 박사가 저지른 오류는 3가지입니다.

    첫째는 김태형 박사는 15살 이후에 갑자기 발병했다고 주장했는데 한중록에 의하면 이미 10대 초반에 이미 이상 징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김태형 박사는 사적에서만 발병했다고 하는데 정병설 교수에 의하면 세자에게 사적 영역 따윈 없었다고 합니다.

    셋째는 왜 극도의 위기 상황에서는 발광하지 않았는가의 문제인데 정병설 교수가 국문학과라 딱히 쉽게 정의내리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두려워하는 사람 앞에서라 정신을 놓은 상태에서도 쉽게 발광하지 못했을 거라고 추측하더군요.


    일단 제가 알아본 건 이정도입니다.
  • 오스왈드 2011/07/31 17:09 # 삭제

    저 사견입니다만...
    정신질환도 유전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렇다면 최숙빈 가문에 뭔가 질환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사람 좀 많이 죽여서 그렇지 숙종의 정신상태는 정상이거든요
    늙어서 빼고....
    영조 사도세자 이 부자는 빼고
    정조도 뭔가 비정싱적인 면이 보이고
    순조 헌종도 뭔가 좀 이상해 보여요...
    이런 면에서 보면 숙빈 가문에 뭔가 유전 질환이 있고 그게 아마 드러난 것 같습니다
    연산군 케이스 빼면 최숙빈 직계가 뭔가 좀 아스트랄하긴 하거든요..
  • 로자노프 2011/07/31 20:11 #

    물론 유전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만... 숙종 자신도 한성깔 하기로 유명한 모친도 혀를 내두를정도로 성격이 좀 괴팍했다는 점 때문에라도 성격 문제는 왕실에서 내려온 문제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뭐... 그걸 떠나서 사도세자 문제는 개인적으로 후천적 요ㅗ가 더 크다고 보고요,.
  • 오스왈드 2011/07/31 17:22 # 삭제

    비회원은 수정이 안 되나 봅니다
    이런 점 때문에 두 개 쓰니 용서해 주십시오

    일단 세자가 첩을 두는 것은 흔한 것이었습니다
    세자 기간이좀 길었던 세자의 경우 첩이 있었죠
    성종 아빠 도원군도 첩이 있었고 -물론 시기상 사저의 첩이 궐로 들어온 것이겠죠-
    인종도 첩을 두었지요
    영조도 첩이 있었고
    순종도 엄마의 권유로 여인들과 동침한 적 있다 합니다
    사실 저 사건의 문제는 첩을 둔 것이 아니라 이상할 정도의 영조 반응과 그 여인들의 기구한 일생이지요
    후자야 다 아실 것이고, 전자가 문제인데...
    공부 못할 양이면 몸이라도 건강하라고....
    왕이든 왕비이든 자식을 많이 두어 후사를 튼튼히 하는 것이 일등 의무인 시대에서 저 행동은 은근히 권장되어야 하는데 왕이 길길이 날뛴 것을 보면....
    한중록도 실록도 승정원일기도 적지못할 그 어떤 사건이 있지 않았나 싶고 여인들. 특히 임씨 여인이 그 사건에 연류되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앞 내용을 보니 왜 정조가 그렇게 문체반정 포함해 잡서에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 로자노프 2011/07/31 20:12 #

    저 역시 어느 정도 서술은 해두었습니다. 다만 사도세자처럼 세자 시절 후궁을 임신 시킨 전례는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알기론 문종이나 양녕대군 정도인데 문종은 거의 세종이 권장한 것이고. 더군다나 사도세자의 여자 밝힘증은 나중에 가면 좀 심각해집니다. 이 사건에 대해 서술한 것은 이에 대한 복선이기도 합니다.
  • 오스왈드 2011/08/03 08:00 # 삭제

    제가 연구하는 주제가 한중록이다 보니 좀 어설프게나마 심리학을 공부했는데...
    영조는 솔직히 보면 뭐랄까
    이런 사람들 있죠
    남편 혹은 부인이 잘 되면 됬고 내 자식이 출세하면 그걸로 만족하고 그냥 내 공이나 잊지 말고...
    혹은
    그게 무슨 소용인가 내가 잘 되어야 하지....
    이런 사람도 있겠죠
    뭐가 옳은지는 모르겠으나 영조는 후자적 성향이 매우 강해 보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이고 자기가 정한 목표는 기를 쓰고 이루고, 나와 동등하려는 사람은 인정하고 싶지 않고, 남의 감정 헤아리는 능력이 선천적으로 부족하고....
    여기에 위태했던 환경이 결부되어 그런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리라 봅니다
    다만 왕이라는 자리와 거기 걸맞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저런 사람들이 자기 일은 완벽하게 하려 하지요-
    의식적으로 남 말을 듣고 헤아리려는 훈련을 했고 그러다보니 탕평이니 균역이니 하는 좋은 업적들도 이루어졌고 정말 제대로 캐치해야 알아들을 수 있는 백성들의 소리도 꽤 많이 들을 수 있었죠
    문제는 공적인 영역은 잘 지켜지는데 사적인 영역인 부자관계 -아무리 세자라도 자식일 뿐이지요- 에서는 그게 안 지켜진 것이지요
    정성왕후의 비극도 여기서 기인한 듯 합니다
    총애를 받은 정순왕후 문숙의 선희궁 영빈은 신하로서 본분에 만족하고 직언은 하되 바싹 엎드리거나 그냥 총애 그 자체에 만족하는 삶을 선택해 영조의 사랑을 받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조 자신의 성격적 결함이 이 모든 비극이 화근이라 보여집니다
  • 로자노프 2011/08/03 13:49 #

    맞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다만 정성왕후의 경우는 조금 생각해 볼 게 있는데 정병설 교수는 정성왕후가 첫날밤에 영조 자신이 보기에는 자신의 컴플렉스를 건드리는 발언을 한 게 원인이라고 봤고 박시백 화백은 세제 시절 정성왕후의 친척 서덕수가 역모 사건에 깊숙하게 연루되면서 자기까지 곤역을 치룬 것 때문에 부부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고 보더군요.
  • 들꽃향기 2011/08/03 12:25 #

    조금 늦은 시점이긴 합니다만, 다산이 정약종이 어려서부터 도가 및 각종 잡서에 빠져있는 얘길 하면서 젊으이들이 잡서를 읽는 풍조가 있었음을 얘기하는데, 이런걸 보면 사도세자 역시 어찌보면 이런 시대적 풍토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 망상이 들기도 합니다. ㄷㄷ
  • 로자노프 2011/08/03 13:50 #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봅니다. 당시 사회가 소설 등의 잡서가 유행하고 있었으니. 근데 정작 아들 정조는 그런 잡서들을 안 좋아했죠.
  • 오스왈드 2011/08/03 14:28 # 삭제

    정성왕후와의 관계는 정병설 교수나 박시백씨 모두 문제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정병설 교수의 첫날밤 손이 곱네요 일화는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고..
    나이 대면 둘 다 십대 초반이고 당시 연잉군은 아빠 숙종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을 시점이니 굳이 출신의 미천함 따위는 큰 문제 아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박시백씨의 주장은 그 이전 상황을 설명 못 해줄 것이고요
    제가 보기엔 답은 정말 간단합니다
    그냥 부인이 싫었던 것입니다
    정성왕후는 화협옹주 같은 케이스라 보여집니다
    화협옹주도 별 이유 없죠
    아들이 아니라는 죄로 ...
    정성왕후도 별 이유 없이 단지 영조 마음에들지 않은 이유로 소박맞은 케이스라 보여집니다
    첫날밤 일화는 후일 영조 측에서나 다른 임금들이 어찌되었던 저 사건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만든 것으로 보여집니다
    다만 화협옹주는 그래도 다른 옹주들에 비하면 받을 만큼은 받았는데
    그 이유는 화협옹주는 아빠가 자기 안 좋아한다는 것 알고 바싹 엎드렸을 것 같네요
    반명 정성왕후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고요
    한중록의 묘사 등을 통해 보면 세자를 위해 정성왕후도 꽤 발언을 했으 것으로 보입니다
    아님 적어도 챙겨주기나 위로 정도는 많이 했을 것이고...
    그게 영조는 더 싫었던 것 같고요...

    보통 사람들은 그냥 싫어서 라면 말도 안 된다고 하겠지만
    영조의 심리는 보통 인간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그냥 싫은 사람이 있죠
    다만 그게 티를 내냐 안 내냐 차이일 뿐이지요
  • 로자노프 2011/08/03 15:59 #

    확실히...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 오스왈드 2011/08/03 19:54 # 삭제

    영조를 보다보면
    이중인격이 아예 생활이 되었다 해야하나..
    남 말대로 싸이코패스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한 없이 조였다가
    어떤 때는 한 없이 풀었다가
    누구는 막 대하고 누구는 한 없이 풀어주고....
    자기자신에게는 검소했다가 반면 자식에게는 아낌없이 베풀고...
    중종도 그런 경향이 있었지만 중종은 다분히 정치적인 것 같은데 영조는 인간 자체가 그런 것 같은....
    사도세자 뿐 아니라 영조도 병원에넣고 제대로 연구했으면 합니다

    정조는 아빠와 할아버지의 장점만 모은 듯 합니다
    하늘이 조선에 베푼 선물이랄까요...
  • ttttt 2012/07/15 21:46 #

    신하를 컨트롤하기 위해 아랫사람이 함부로 짐작하고 깝칠 수 없는 독재자가 됐는데
    그게 아들에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아버지가 된 케이스인가요.
    강아지를 키울 때, 주인이 그렇게 굴면 개가 제대로 길이 안 들고 불쌍해지죠.
    주인과 의사소통이 안 되지만 주인 손에 목숨을 의탁한 개는 항상 눈치보고, 신경질적이 되고,
    풀이죽어있고, 자잘한 저지래를 하면서 화풀이를 하다가 언젠가는 사고를..
    그냥 적어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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