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화변 최악의 비극 <6> 다사다난 공국 문화부 직할 역사연구소

“내가 시를 읽을 것인데, 네가 눈물을 흘리면 효성이 있는 것이므로 내 마땅히 너를 위해 내렸던 전교를 반한(反汗)하겠다.”

-영조실록 영조 28년 12월 14일자 기록-



 <새 후계자의 탄생>

 1752년 3월 3살밖에 안 된 세손이 죽었지만 당시 혜경궁은 임신 상태였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혜경궁은 아이를 낳았다. 왕실 입장에선 다행스럽게도 이 아이는 아들이었다. 신하들은 즉각 이 아이의 명호를 원손이라 할 것을 주청하였고 영조는 몇 번 거부했다가 결국 원손으로 명호를 정하였다. 세손의 죽음으로 낙심했던 영조는 새로운 후계자의 탄생을 크게 기뻐하였으며 태어난 다음날 바로 원손의 복을 아끼는 하교를 내렸다.

 참고로 그 전해 11월(1) 사도세자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크게 기뻐하며 깨어난 즉시 흰 비단에 꿈 속에서 본 광경을 그렸다고 한다. 왕의 상징인 용이 태몽에 나타났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어찌 보면 이건 이 아이가 훗날 왕이 될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해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태어날 때 용꿈이 없었다. 어쩌면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비극을 하늘이 암시해주었던 것일수도 있다.

 

 

http://www.koreanhistory.org/image/webzine/010/003.jpg

 

                              - 그 아이의 성인 때의 모습. 당연히 눈치챘겠지만 그 아이가 정조였다.-

                                       
 <홍역>

 영조나 사도세자, 그리고 왕실 사람들과 조정 신료들은 새로운 후계자의 탄생을 기뻐했지만 그 기쁨은 너무 일렀다는 것이 금방 드러났다. 하필 10월 들어서 홍진이 대유행하기 시작했고 곧 홍진이 궁궐과 왕실을 덮친 것이다. 한중록에 의하면 화협옹주가 먼저 홍진에 걸리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고 곧 궁궐에도 홍진이 들이닥쳤다. 홍진이 궁궐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자 아직 4주도 안 지난 원손은 서둘러 처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러나 그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사도세자를 시작으로 혜경궁까지 홍진에 걸려버렸다. 그리고 세자의 병세가 조금 나아지려고 하자, 이젠 갓난 아기였던 원손이 홍진에 걸려버렸다. 잘못하면 후계자들을 모두 잃을 수 있던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사도세자와 혜경궁, 원손의 홍진 증세는 곧 나아지기 시작했다. 영조는 이를 기뻐하며 약방 도제조 김약로 등에게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그러나 화협옹주는 결국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아주 등지고 말았다. 유일하게 사랑받지 못했던 옹주의 불행한 요절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이제 다사다난했던 1752년은 이 정도로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초대형 사건이 남아있었다.

 <양위 소동>

 1752년(영조 28년) 12월 8일 영조는 선화문에서 관원들을 불러모으고 대신들을 입시하게끔 하더니 갑자기 대소 공무를 동궁에 들여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대신들이 즉각 반대하며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고 오히려 대사간 서지수를 귀양보냈다. 대비인 인원왕후가 이를 만류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고 승지들이 전교의 회수를 청했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그렇지만 신하들도 지지않고 시골에 있던 대신까지도 한양으로 올라와 계속 양위 전교의 회수를 청하며 왕을 만류하기 위해 만나고자 하였다. 이렇게 왕과 신하들간의 양위를 둘러싼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사도세자는 홍역에서 겨우 회복된 상태에서 영조의 양위를 만류하느라 진을 빼야 했다.

 

 그렇게 실랑이가 일주일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12월 14일. 밤 3경 경에 세자가 영조의 앞에 서 있으니 영조는 세자로 하여금 "너는 무엇 하러 나왔는가?" 하면서 자신이 시를 읽을 테니 만약 시를 다 읽을 때까지 눈물이 나면 효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전교를 회수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영조는 시경 육아(蓼莪) 편에 있는 육아시(2)를 읽기 시작했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시를 다 읽을 때 쯤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의정 이종성(소론)이 세자에게 한 말을 따라 전교를 회수해야 한다고 청하였다. 그런데 영조가 세자에게 소학의 편제를 읽게 하고 다시 세자보고 나가라는 명을 내렸을 뿐 전교를 회수하지 않았다! 약속 위반이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영조는 입시한 대신, 재신, 유신, 승지들을 모조리 귀양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 다음날 대비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후 효장세자의 묘에 들렀을 때 "자전의 허락을 받았다"며 전위하겠다고 말하였다. 신하들이 가마를 붙잡고 만류하고 사도세자는 홍역에서 막 나은 몸임에도 합문 밖으로 나아가 추운 뜰에 나와 앉아서 이를 만류하였지만 역시나 요지부동이었다.(3)

 

 

 

- 아들과의 약속을 어긴 영조는 그 다음날 뜬끔없이 인원왕후의 허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

 

 한편 영조가 자전의 허락을 받았다고 말하자 경악한 신하들은 대비전으로 나아가 전위 허락을 취소해달라고 청하였다. 인원왕후는 이런 신하들의 주청을 즉각 승낙하며 자신의 귀가 어두워 실수했다고 말하였다. 이렇게 입장이 변하자 영조는 누가 대비의 전위를 위조하였느냐고 말하기는 하였지만 명분이 없어진 고로 그 다음 날 전위를 취소해야 했다. 이렇게 1752년 마지막 달의 소동은 끝났고 또 한 해가 지나갔다.

 

 <양위 소동의 이유>

 

 사실 영조가 양위 소동을 벌인 적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이미 사도세자가 5살일 때와 6살일 때 연거푸 선위 소동을 일으켰고 15세일 때 또 다시 선위소동을 일으켜 결국 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한 적도 있었다. 이 때의 소동들의 목적은 전자의 경우 영조 자신의 신원이 주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후자의 경우 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때의 전위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딱히 분명하지 않다. 건저, 대리, 삼수의 역으로 상징되는 영조 자신의 신원 문제는 이미 대리청정 이전에 모두 역모가 아닌 것으로 규정내리면서 신원을 이뤄냈고 대리청정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 양위소동의 이유는 무엇일까?

 

 한중록에서는 이를 당쟁과 연관시키고 있다. 노론인 정언 홍준해가 소론 출신의 정승 이종성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를 보고 노해서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것이다. 사도세자 역시 비슷한 내용을 담은 편지를 이종성에게 보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홍준해의 상소는 10월 말. 즉 선위 소동이 벌어지기 무려 1달도 전에 있던 일이었다. 영조의 편집증적 성격등을 고려한다고 해도 이런 해석은 좀 무리가 있다.

 

 이에 대해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 서술한 대천록에서는 흥미로운 주장을 하고 있다. 영조는 1751년 효장세자빈이 죽은 후 효장세자빈의 시녀였던 문씨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 영조는 문씨를 엄청나게 총애했으며 이듬해 문씨는 임신을 하였다. 마침 세자와 영조의 관계도 악화되고 있었던 찰나이기에 문씨가 아들을 낳는다면 후계가 뒤바뀔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생각에 기세등등해진 문씨가 어느 날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사도세자의 생모 선희궁에게 대들었다. 이를 들은 인원왕후는 바로 문씨를 불러 세자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매질을 가했다. 그리고 자신이 총애하는 후궁이 대비에게 매를 얻어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영조가 대비에게 시위하기 위해 전위소동을 벌인 것이었다.

 

 이 주장은 실록이나 한중록에 기록된 전위 소동의 경위와 조합해보면 대강 어귀는 들어맞는다. 물론 문제는 있다. 문씨가 총애만 믿고 방자하게 굴었을 가능성 자체는 충분한 편이다. 그러나 그 방자함이 과연 자신의 아이를 후계자로 만들려는 그런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사실 당시 영조의 나이는 59세로 적은 나이가 아니었다. 갑자기는 아니더라도 시름시름 앓다가 한순간에 죽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문씨 입장에서는 아직 뱃 속 아이의 성별도 확실치 않고 영조의 나이도 많은 상황에서 세자를 위협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너무 위험부담이 컸다.

 

 더군다나 세자를 바꾼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자의 장인이자 후견인인 홍봉한의 세력은 이미 이즈음부터 상당한 위세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막 승은을 입고 대접받게된 문씨나 그녀의 오라비 문성국이 홍봉한에 대적할만한 세력을 단기간에 이루었을 가능성 자체는 없다고 봐야 될 것이다. 더군다나 세자를 바꾼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직까지 세자의 광증이 심각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과연 이런 상황에서 아들까지 있는 어엿한 세자를 갑자기 손자랑 나이가 같은 아이로 바꾼다는 것을 조선의 신하들이 그냥 넘어갔을리가 없었다.

 

 어쨌든 이 선위 소동의 원인 중에는 후궁들간의 갈등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만약 이 가설이 맞다면 사도세자는 변덕스런 아버지의 여자 문제때문에 한겨울에 거적깔고 앉아있었어야 했다는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이 가설대로면 추위에 떨며 거적 깔

고 앉아있던 사도세자로서는 이 상황이 황당하고 한심했을 것이다.

 

 

 

- 사도세자는 한겨울에 영조의 여자문제때문에 고생을 심하게 해야 했던 것일? -

 


(1) 한중록 2편에서는 10월이라고 되어있다.

(2) 육아시 :  <시경> 소아편에 있는 시로서 부모가 돌아가신 후 그 은혜를 기리며 효도를 다하지 못했음을 슬퍼하는 내용이다.

(3) 세자는 며칠 동안 계속 거적 깔면서 추운 바깥에 앉아있어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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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Jes 2011/07/23 21:06 #

    이것만 보면 영조 진짜 철 없네요....;;; 손자도 본 나이에.
  • 로자노프 2011/07/23 21:59 #

    근데 너무 철이 없어서 못 믿을 정도... 근데 글에 적지는 않았지만 이거 정병설 교수의 주장입니다. 문제는 이 대천록에 바탕을 둔 주장이 가장 아귀가 잘 들어맞으니 원...
  • 한단인 2011/07/23 21:19 #

    사도세자의 '똘끼'(응?)만 궁금한게 아니라 영조의 '똘끼'도 만만치가 않군요.(뭐 임마?)


    이거 진짜 왜 그런 건지 궁금해지네요.
  • 로자노프 2011/07/23 21:59 #

    사실 영조 자신도 편집증적 증세가 있었다는 건 공인이니까요.
  • 두막루 2011/07/23 22:36 #

    영조의 삶을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 가능한 일입니다.
    실은 사도세자가 정신병을 앓았던 것도 영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 로자노프 2011/07/23 23:05 #

    사도세자의 광증을 영조에 원인이 있다는 데에는 동감입니다.
  • 한단인 2011/07/23 23:10 #

    아.. 그게 아니라 사도세자의 똘끼에는영조의 편집증이 꽤 영향을 미쳤다면 영조의 똘끼가 비롯된 원인이 구체적으로 뭘까 싶어서..
  • 로자노프 2011/07/23 23:11 #

    저도 잘 모르겠지만 두막루님 말대로 아무래도 험난했던 인생 초반부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합니다. 특히나 경종 재위시절 내내 영조의 삶은 살얼음판이라고 봐도 될 듯.
  • 네비아찌 2011/07/23 23:27 #

    어쩌면 유럽의 몇몇 왕실들처럼 숙종-영조-사도세자 라인으로 편집증이 유전되었을 가능성도 있겠는데요...
  • 로자노프 2011/07/23 23:30 #

    숙종-영조 라인은 동의합니다만 사도세자는 관련 기록들 보면 후천적인 게 아닌가 싶습니다.
  • shift 2011/07/24 00:25 #

    정말 영조의 아들로 살려면 왠만한 정신력으론 버티기 힘든듯

    씨발 맨날 그날 하는것도 아니고 똘끼 폭발이네
  • 로자노프 2011/07/24 00:38 #

    어디까지나 주의하실건 저것도 하나의 가설입니다. 뭐... 신빙성이 높은 가설이긴 합니다만
  • RuBisCO 2011/07/24 09:57 #

    저리 삭은거도 그 때문인걸까요 ㄷㄷㄷ
  • 로자노프 2011/07/24 12:05 #

    정조 말인가요? 저 초상화는 추측이지만 한 40대쯔음에 그린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 RuBisCO 2011/07/24 12:15 #

    아 그렇습니까. 성인이라 하시기에 20-30대 초반이 저 얼굴인줄...
  • 오스왈드 2011/07/27 22:17 # 삭제

    저게 사실이라면 사도세자는 한심 수준을 넘어 인생 자체를 고뇌했을 것입니다
    저 당시 문숙의라 불린 궁녀는 사실 후궁이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해 후궁 첩지가 내려지니까요
    그냥 총애받는 나인 아니면 상궁이었지요
    그런 여자가 영빈을 공격했으니 대비전이 가만 있을리 없죠
    세자 입장에서도 참 어이 없는 일인 듯
  • 오스왈드 2011/07/27 22:22 # 삭제

    수정이 안 되어서
    저 사태는 아마 인원왕후도 빡돈 상황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선위 파동이 한 두 건도 아니니....
    아마 지쳐 니 맘대로 하세요 라고 했을 듯 합니다
    저 장면은 예전 사극 한중록에도 나오지요
    강부자 인원왕후가 김성원 영조의 말을 정말 못 알아 듣고 실수하는 걸로 설정했습니다
    당시 세자는 최수종 혜경궁은 최명길씨가 했습니다
  • 로자노프 2011/07/27 22:25 #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확실히. 그리고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오스왈드 2011/07/29 10:54 # 삭제

    사도세자 가족사를 보면 비극은 이미 시작되었죠
    전 사실 영빈이라는 여자가 정말 무섭습니다
    절대 엄부자모는 아니었을 것 같네요
    엄부엄모지
    게다가 혜경궁도 유순한 스타일은 아니었던 듯 합니다
    한중록 기록이긴 하나 영조가 아꼈다는 것으로 보면 사람 마음 읽어내는 데는 기막힌 재주가 있는 듯 합니다
    기왕 다루실 것이면 정순왕후 개입설도 한 번 다뤄주셧으면 하네요
    저 개인적 생각으로는 저 시기 정순왕후는 그냥 비단옷에 수라상 먹는 재미 찾기도 어려웠을 시점으로 보입니다
    한중록에도 나오지만 애초 국혼 말을 꺼낸 것도영빈이었고
    당시 임금의 총애나 궐 내 정치 판도로 보아도 영빈이 중전 노릇하던 시대였지요
    음모론적 생각하면
    영빈이 혹시 일이 이리 될 줄 알고 노론 대신들과 짜고 국혼 말을 꺼내지 않았을까 합니다
    어차피 중전은 없어도 되는 자리니까요
    새 왕비가 오고 세자가 잘못되면 자기는 쏙 빠지고 모든 험담은 새 왕비가 들을 수 밖에 없으니까요...

    아 한중록에서도 정순왕후는 긍정적으로 써주더군요
    욕은 김귀주가....
    만약 저승 상황을 볼 수있다면 재밌겠네요
    두 여인의 싸움...
  • 로자노프 2011/07/29 14:57 #

    흠.. 정순왕후나 혜경궁, 노론, 영빈과 관한 부분은 차후 이야기될 예정입니다.
  • 오스왈드 2011/07/29 19:36 # 삭제

    제가 요새 영조를 연구중인데....
    해병대 정신이 떠 오를까요..
    안 되는건 되는 그 순간까지....
    아마 현대에 태어났다면 주목할만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단 밑의 부하들은 죽어나는 거죠
  • BB 2011/09/19 03:20 # 삭제

    (정병설 교수의 주장을 요약한 후)
    이 설은 일단 시기가 절묘하게 일치합니다. 영조가 이유로 건 홍준해와 이종성 문제는 한 달은 지난 후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보자고 해도 이해가 안 가죠. 문씨는 다음 해에야 후궁이 됩니다. 왕은 늙었고 세자는 나이가 찬 상황, 선희궁을 다들 얕잡아 봤으니 막말을 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후궁도 아니었던 그녀가 정말 세자 자리까지 노렸을지는 의문이죠. 한중록에서는 그녀가 딸을 아들로 속이려고까지 하면서 노렸다고 하고 있습니다만... 일단 정조 때 그녀가 이 죄로 죽긴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얘기해야겠네요.
    다만 여기서 전 다른 부분을 보고 싶습니다. 위에 적었듯 세자는 이 때 홍역을 앓고 있었고, 위험한 상황이었죠. 또한 영조가 했던 건 어디까지나 쇼였습니다. 그런데 세자가 죽기 직전의 상황이었다면, 쇼 한 번 벌이려다가 세자가 죽으면 일이 너무 커지죠. 일단 자기 뒤를 이을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래서 탕평 문제 또 걸렸으니 쇼를 벌이긴 해야겠는데 세자는 아프니까 좀 기다렸다가 하자, 이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저의 해석입니다. 추측이긴 하지만 한 번 봐 주셨으면 합니다. (__);
  • ttttt 2012/07/15 21:16 #

    어휴.. 무슨 임금이, 애비가.. ;;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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