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도세자의 정신병은 실록이나 한중록 등을 볼 때 아무래도 아버지 영조에 대한 두려움이 엄청나게 관련된 듯 합니다. 뭐 이거야 당연한 건데 중요한 건 온양행과 관련된 기록에서 추측컨데 아버지에게서 멀리 떨어지면(즉 한양을 떠나면) 화증이 엄청나게 가라앉았다는 겁니다. 온양행만 해도 아무 일도 없던 정도가 아니라 사람이 엄청나게 변해서 좋은 행적을 남길 정도였지요. 아무래도 영조와 떨어지면서 얻은 자유가 화증을 많이 덜어내 이런 예상 외의 행적을 만들어낸 듯 합니다. 아직까지 관련 자료를 제대로 취합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관서 유람 역시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려는 마음에서 벌인 게 아닌가 합니다.
2. 사도세자는 정말 여자들을 많이 건드렸습니다. 그 자신이 여색을 밝힌 건지 도피 심리에서 밝힌 건지는 모르겠는데 혜경궁 외에 정식 후궁만 3명이고 그 외에도 수두룩한 여자(기생, 여승 등)을 건드렸습니다. 덕분에 자식들도 좀 되고요. 근데 조선사에서 이 정도로 세자 시절에 후궁이나 건드린 여자가 많았던 사람은 양녕대군이나 문종입니다. 근데 문종은 사실상 자식 보기 위해 세종이 일부러 후궁을 많이 들여놓은 케이스입니다.
3. 사실 여러모로 따져보면 사도세자는 양녕대군과 흡사한 점이 많습니다. 놀기 좋아하고, 여자 밝히고(;;;), 사고 치고.... 하지만 두가지 측면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는데 첫번째는 아버지이고 두번째는 대체할만한 후계자와의 관계였습니다. 첫번째는 광증의 유무를 갈랐고 두번째는 생사를 갈랐지요.
4. 한중록이나 현재까지의 관련 기록을 보면 대리청정을 한 지 몇 년 지난 후부터는 영조나 세자 모두에게 혈연 의식 같은게 있었나 싶습니다. 두 사람이 하는 말, 행동을 보면 일단 말로는 아버지, 세자 그러기는 하는데 속내는 서로 웬수처럼 여긴게 아닌가 싶습니다. 진현 안 하는 것도 그렇고...
5. 연재 자료 수집 도중 가장 궁금했던 게 최복 시위. 정말 이 문제로 머리 썩였습니다. 일단 이덕일은 최복 시위 자체를 상복 시위라며 아주 부정적으로 여겼고 정병설 교수는 시위 행위 자체는 인정하나 최복 자체는 당시 상황상 입는 게 당연했다고 주장. 박시백 화백은 어떤 자료를 근거로 했는지 몰라도 조선 왕들은 보통 졸곡이나 장사가 끝날 때 까지만 입었다고 묘사(대략 4~9개월). 문제는 박시백 화백의 기준 대로 하면 이덕일과 정병설 교수의 말이 모두 맞다는 겁니다. 결국 이 문제로 실록을 뒤지고 유문기님과 jes님에게도 문의해서 얻은 결론은 '최복 입는 것 자체는 당연한데 정황 보면 최복 입은 것 자체도 시위 의도가 있다.'였습니다. 다만 여기서 구분할 건 이 결론은 이덕일의 주장과는 좀 상충된다는 겁니다.
6. 한중록이 아무래도 이번 연재에서 주요 참고 자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주의할 점은 책임 회피 쩝니다. 자기 가문은 세자를 위해 노력했다 식의 서술은 그렇다 치고 세자의 죽음을 김상로, 문씨, 문성국 등에게 다 몰아세웁니다. 그리고 화완옹주, 정후겸, 김귀주 디스가 아주 쩝니다. 정말 보면서 황당할 지경이었습니다. 다만 정병설 교수의 연재를 보니 어째 실록보다 한중록을 더 신뢰하는 듯.... 국문학과 교수라서 그러시는 것 같고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없기는 합니다만...
7. 그리고 이덕일의 사도세자 주장은 한중록 보면 볼수록 느낀 건데 한중록을 까면서 정작 주장의 상당부분(한 7~80%)는 한중록 그대로 복사, 붙여넣기 수준입니다. 이덕일의 주장은 문성국, 문씨, 김상로 등등이 사도세자와 영조를 이간질했다는 주장 등 한중록의 주요 주장에다가 홍봉한, 김씨 일가 추가하고 사도세자는 미치지 않았다 추가한 수준입니다. 정말로요.
8. 스포일러 성이긴 한데 사도세자가 죽은 직후에 홍봉한 등은 소론이 사도세자 신원 등을 주장하며 정계 복귀를 꾀할까 우려했습니다. 사실 예송논쟁으로 남인들의 공세가 강해졌던 전례도 있으니 틀린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가 조재호 사사고요. 근데 정작 정조가 즉위한 후 사도세자 문제로 정계 복귀를 꾀한 건 '남인'이었습니다.
2. 사도세자는 정말 여자들을 많이 건드렸습니다. 그 자신이 여색을 밝힌 건지 도피 심리에서 밝힌 건지는 모르겠는데 혜경궁 외에 정식 후궁만 3명이고 그 외에도 수두룩한 여자(기생, 여승 등)을 건드렸습니다. 덕분에 자식들도 좀 되고요. 근데 조선사에서 이 정도로 세자 시절에 후궁이나 건드린 여자가 많았던 사람은 양녕대군이나 문종입니다. 근데 문종은 사실상 자식 보기 위해 세종이 일부러 후궁을 많이 들여놓은 케이스입니다.
3. 사실 여러모로 따져보면 사도세자는 양녕대군과 흡사한 점이 많습니다. 놀기 좋아하고, 여자 밝히고(;;;), 사고 치고.... 하지만 두가지 측면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는데 첫번째는 아버지이고 두번째는 대체할만한 후계자와의 관계였습니다. 첫번째는 광증의 유무를 갈랐고 두번째는 생사를 갈랐지요.
4. 한중록이나 현재까지의 관련 기록을 보면 대리청정을 한 지 몇 년 지난 후부터는 영조나 세자 모두에게 혈연 의식 같은게 있었나 싶습니다. 두 사람이 하는 말, 행동을 보면 일단 말로는 아버지, 세자 그러기는 하는데 속내는 서로 웬수처럼 여긴게 아닌가 싶습니다. 진현 안 하는 것도 그렇고...
5. 연재 자료 수집 도중 가장 궁금했던 게 최복 시위. 정말 이 문제로 머리 썩였습니다. 일단 이덕일은 최복 시위 자체를 상복 시위라며 아주 부정적으로 여겼고 정병설 교수는 시위 행위 자체는 인정하나 최복 자체는 당시 상황상 입는 게 당연했다고 주장. 박시백 화백은 어떤 자료를 근거로 했는지 몰라도 조선 왕들은 보통 졸곡이나 장사가 끝날 때 까지만 입었다고 묘사(대략 4~9개월). 문제는 박시백 화백의 기준 대로 하면 이덕일과 정병설 교수의 말이 모두 맞다는 겁니다. 결국 이 문제로 실록을 뒤지고 유문기님과 jes님에게도 문의해서 얻은 결론은 '최복 입는 것 자체는 당연한데 정황 보면 최복 입은 것 자체도 시위 의도가 있다.'였습니다. 다만 여기서 구분할 건 이 결론은 이덕일의 주장과는 좀 상충된다는 겁니다.
6. 한중록이 아무래도 이번 연재에서 주요 참고 자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주의할 점은 책임 회피 쩝니다. 자기 가문은 세자를 위해 노력했다 식의 서술은 그렇다 치고 세자의 죽음을 김상로, 문씨, 문성국 등에게 다 몰아세웁니다. 그리고 화완옹주, 정후겸, 김귀주 디스가 아주 쩝니다. 정말 보면서 황당할 지경이었습니다. 다만 정병설 교수의 연재를 보니 어째 실록보다 한중록을 더 신뢰하는 듯.... 국문학과 교수라서 그러시는 것 같고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없기는 합니다만...
7. 그리고 이덕일의 사도세자 주장은 한중록 보면 볼수록 느낀 건데 한중록을 까면서 정작 주장의 상당부분(한 7~80%)는 한중록 그대로 복사, 붙여넣기 수준입니다. 이덕일의 주장은 문성국, 문씨, 김상로 등등이 사도세자와 영조를 이간질했다는 주장 등 한중록의 주요 주장에다가 홍봉한, 김씨 일가 추가하고 사도세자는 미치지 않았다 추가한 수준입니다. 정말로요.
8. 스포일러 성이긴 한데 사도세자가 죽은 직후에 홍봉한 등은 소론이 사도세자 신원 등을 주장하며 정계 복귀를 꾀할까 우려했습니다. 사실 예송논쟁으로 남인들의 공세가 강해졌던 전례도 있으니 틀린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가 조재호 사사고요. 근데 정작 정조가 즉위한 후 사도세자 문제로 정계 복귀를 꾀한 건 '남인'이었습니다.
덧글
5. 그래도 겨우 결론은 났습니다.
8.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