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님, 아버님 잘못하였습니다.이제는 하라시는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마소서."
영조 38년인 1762년 윤 5월 13일 영조는 창덕궁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로 하여금 자결하도록 명령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죽으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자의 자결은 춘방 신하들의 만류로 무산되었고, 이어 영조는 폐서인의 영과 함께 세자를 뒤주에 가둘 것을 명한다. 여러 신하들은 미처 간하지 못하다가 밖으로 우물쭈물 나갔고 사도세자는 마지막으로 나가던 한림 임덕제에게 매달려보지만 허사였다. 그리고 8일이 지난 윤 5월 21일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서 죽고 말았다.
이것이 조선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었던 임오화변의 대략적인 상황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다는 패륜적인 사건이란 점에서 이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더군다나 단순한 자결이 아닌 뒤주에 가두었다는 방법적인 면에서도 이 사건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덕분에 훗날 사극에서도 단골 소재로 나왔고, 왜 영조가 이런 명령을 내렸는지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이 오갔다.

이덕일. 그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쟁, 특히 노론과의 갈등을 중심으로 해석했다.
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해석은 당쟁과 연관시키는 해석일 것이다. 특히 그 중에서 이덕일의 해석이 유명한데, 물론 이 글을 보시게 될 분들 께서 모르실 리 없겠지만, 그래도 소개하자면 '사도세자는 미치지 않았으며 사도세자가 친 소론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에 안되겠다 싶은 노론과 후궁인 문씨, 정순왕후의 음모에 의해 사도세자가 살해되었다.'는 것이 이 주장의 핵심 내용이다.

박시백. 그는 사도세자에 대한 이덕일 등의 견해를 자신의 만화에서 비판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너무 사안을 정치적으로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박시백 화백 역시 이를 지적했으며, 정병설 교수도 이덕일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 바 있다. 그 외에도 함규진 교수 역시 이 사안과 관련되어 상당히 특이한 의견을 낸 바가 있다.
이렇게 말이 많은 상황에서 한번 사도세자에 대해 파헤쳐보기로 결정하였다. 사도세자의 인생, 임오화변에 대한 여러 해석들과 그 근거, 그리고 정조나 그 이후 왕들의 시대에 사도세자와 관련된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에 대해 서술해볼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박시백 화백의 견해를 옳다고 생각하기에 그 쪽을 중점적으로 할 생각이지만 함규진 교수의 주장 역시 일리가 있기에 참고가 될 듯 하다.
참고할 문헌 및 자료 (1~2번 참고할 것들도 포함)
조선왕조실록
한중록
승정원일기
이덕일 저 '사도세자의 고백'(비판당할 쪽으로 인용할듯)
박시백 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경종 및 영조실록'편과 '정조'편
정병설 교수가 네이버의 문학 동네 카페에서 연재하고 있는 '정병설. 권력과 인간'
함규진 저 '왕의 투쟁'
박영규 저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21세기 웅진학습백과 (1998년에 인쇄된 판)
그 외에도 여러 문헌 및 자료 참고 예정
추신: 이 글은 며칠 전 다음 토탈워에서 처음 연재한 것으로 다음 토탈워와 연동하여 같이 연재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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