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한문제 시기 사기 기록의 난맥상

사마천 사기는 분명 불세출의 명저이며 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고대 중국에 대해 분명히 상당히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정확도도 나름 높은 편입니다...

근데 그런 사기도 기원전 300~한문제 시기까지 기록에 모순과 오류, 부족한 점이 꽤나 많이 보입니다. 하필이면 그 이전 시기들에 비해서 이런 기록의 모순, 오류, 의문스런 기록, 부족이 너무 많이 대두됩니다. 대충 언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소진열전의 사례.

소진열전의 경우 그 기록의 오류가 상당히 많은 거로 유명합니다. 사기의 묘사만 보면 소진이 진나라를 방문한 건 상앙이 처형된 직후인데 거기서 혜문왕 죽기 직전에나 먹은 파촉이 언급되고 있다는 것(심지어 이 부분은 장의열전에서 파촉을 먹을지 중원을 먹을지 논쟁하는 부분으로도 알 수 있음) 초나라 방문때도 아직 진나라 영토가 아닌 파촉이 진나라 영토라고 하는 등의 오류가 지적되고 있습니다. 거기다 사기 소진열전의 묘사만 보면 소진이 활동한 건 기원전 330~320년 경인데 동생이라는 소대의 활동 추정연도가 기원전280~270입니다. 형제라기엔 너무 활동시기의 차이가 큽니다. 

사실 이는 소진과 관련된 기록 자체가 개판이어서 벌어진 참상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마천도 소진열전 말미에 '소진의 행적이 아닌데 소진이 한 것이라고 알려진게 너무 많다'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마왕퇴한묘에서 발굴된 죽간에서 발견된 죽간에서 소진이 연소왕시기의 인물이라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2. 연소왕의 이름

연소왕이 언급된 김에 말하자면 연세가에선 연소왕의 이름을 평이라 했는데 조세가에선 연소왕의 이름이 직으로 나옵니다. 세가에서 왕 이름이 다르게 기록되는 이런 사단이 벌어진 것입니다. 현재 이 부분은 출토된 죽간 덕에 직이 맞는 것으로 확정됬습니다. 

3. 전단 이야기

노중련 열전에 의하면 장평대전이 벌어지고 20여년이 지난 무렵, 즉 기원전 240년 무렵에 연나라 군대가 제나라 요성을 취하자 제나라 전단이 요성을 포위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문제는 이 전단인데... 분명 이 전단은 기원전 279년에 연나라 군대를 격파한 그 전단입니다. 이 전단은 264년 경에 조나라 재상이 되었다는 기록이 조세가에 나오는데 240년 무렵까지 전단이 살아있는것도 뭔가 요상하지만 설령 살아있대도 어떻게 제나라로 돌아온건지 중간 설명이 없습니다.

4. 여불위와 춘신군.

아마 유명할 겁니다. 소위 자기 아이 임신한 여자 왕한테 갖다바치고 왕은 그 여자가 낳은 아이를 자기 아들로 여겼다는 이야기.... 근데 말이죠. 거의 동시기 인물 둘에서 거의 비슷한 내용이 나오면 아무리 봐도 의심스럽죠. 거기다가 여불위의 경우 진시황본기와, 춘신군의 경우 초세가와 교차검증하면 기록이 어긋나는게 보입니다. 진시황본기의 경우는 자초의 친아들이다 정도지만 초세가의 경우엔 분명 불임이라던 고열왕의 자식이 2명이 더 튀어나오니까요. 개인적인 추측으론 춘신군 이야기 혹은 여불위 이야기 중 하나가 먼저 생긴 후 다른 한쪽에 영향을 준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사마천이 열전에다가 이걸 걍 적어버렸고요. 사마천의 민담채록경향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지만요.

여기서 언급한 4가지 사례말고도 찾아보면 더 나올지도 모릅니다. 일단 대강 찾은게 이정도고요. 문제는 이 4가지 사례는 적어도 분서갱유의 후유증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문제는 분서갱유 이후 시점... 더 정확히 말하면 분서갱유 이후에도 살아남은 인물들이나 초한전쟁에서 활약한 인물들 기록에서도 기록의 부족이나 손실, 신빙성이 의심되는 문제 등이 발생하고 있다는 겁니다.

1. 공신후연표 7위 해연은 도대체 누구지?

해연이란 인물은 공신후연표에서 그 공이 번쾌에 버금간다고 언급될 정도의 인물입니다. 패에서 처음 거병했을때부터 따라다닌 인물로 전사했다고 하는데 이게 기록이 끝입니다. 하후영보다도 순위가 높고 공이 번쾌에 버금간다는 거 보면 공적을 많이 세운 것 같은데 너무 기록이 없습니다. 사실 공신후연표에 등록된 인물들 중 이런 인물들이 좀 보이긴 합니다만...

2. 계포의 항우 부하시절 행적

계포는 항우의 부하 중 한명인데 항우가 망한 직후 수배되었다가 사면받은 후 유방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는 한문제시기까지 살았고 유능함으로 이름을 얻었죠. 문제는 그런 인물의 항우 부하 시절 행적이 오리무중입니다. 비슷한 경우인 종리말(혹은 종리매)는 사기를 이리저리 뒤지면 조금이라도 항우 부하시절 기록이 나오는데 계포는 하나도 안 나옵니다. 사면까지 받은 입장이라 항우 부하시절 행적도 말하고 다닐만하고 충분히 오래 살았는데도 항우 부하시절 기록이 완전 오리무중이니 이건 뭐...

3. 장사왕 오예

사실 이 양반이 제일 어이가 없는 경우입니다. 본래 진나라 관리로 파양현령이었는데 월인들의 민심을 샀고, 진승의 난이 터지자 월인, 영포를 끌어들여 거병했습니다. 그리고 그 공으로 형산왕이 됬는데 언제인지는 몰라도 항우에게 봉국이 몰수조치(사실 이유와 시기는 짐작이 가는 구석이 있지만 이건 현재 연재 중인 초한지 2부작 연재에서 다룰 거라 언급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정황증거에 끼워맞춘 수준이기도 하고요.)됬습니다. 그러다 유방이 이긴 뒤에 장사국의 왕이 되었는데 다른 이성제후국과 달리 5대에 걸쳐 계승되어오다가 한문제 말엽에 직계가 단절되어 봉국이 회수됩니다. 대충 언급한 거만 보시면 알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기록이 남아돌아야 합니다. 정상적이라면요.

근데 기록이 너무 부족합니다. 사기에선 세가는 커녕 열전도 없고 한서에는 이 양반 다룬 기록이 존재하는데 꼴랑 4줄입니다. 4줄요... 어떻게 월인들에게 민심을 얻은 건지, 항우가 왜 봉국을 압수했는지에 대한 건 아예 기록 자체가 없고요. 5대나 존속한 제후국의 시조인데 어떻게 이렇게 기록이 없는건지 희한할 지경입니다. 이정도면 통상적인 중국의 기록문화 생각하면 세가나 열전 하나 만들 수준의 기록은 나와야 정상이거든요.

여튼 그 이외에도 사구의 일도 있고... 묘하게 초한전쟁 시기 기록들도 은근히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손실이 의심되는 구석도 많고요. 진짜 도대체 분서갱유와 초한전쟁을 거치면서 중국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한문제때까지 이런 기록의 부실, 손실 문제가 나오는건지 모르겠습니다. 분서갱유 이후로도 이런 식으로 은근 기록이 빠지거나 소실되거나 신빙성이 의심되는 일들이 있으니 말이죠.

뭐 웬지 전쟁 후유증이 너무 커서였던게 아닌가 싶은 감은 있습니다. 사마천이 사기에 인용한 가의의 과진론에 전단, 손빈, 염파 등이 동시대인인것처럼 묘사하는 부분이 보이는 등 당대 중국의 전국시대 관련 인식이 판타지 수준이 아닌가 의심되는 부분이 존재할 정도였으니 말이죠. 근데 아무리 그래도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하기 시작한 시점은 초한전쟁 터진지 이제 막 100년 될까말까한 시점인데 이런 당시 기준으로 근현대사에 해당하는 시기의 기록이 이렇게 부족할 수 있는지 참..... 황당할 뿐입니다. 

덧글

  • ddd 2018/02/05 18:36 # 삭제

    은주 시대에 대해서는 기록이 정확한 편인가요?
  • 로자노프 2018/02/11 15:06 #

    적어도 죽서기년으로 보충이 되는 수준입니다. 특히나 은나라 군주 계보는 사기와 고고학 출토 결과가 너무 흡사한 것으로 판명났죠.
  • 2018/02/09 00:25 # 삭제

    위에껀 분서갱유와 초한전쟁, 건국초의 혼란으로 기록이 날아간 이유도 있지않을까요

    경포같은 경우는 항우시절 언급해봤자 본인한테 도움이 안되니 스스로 안 만든 것 아닐까요?

    근데 이때 기록문화는 어땠나요? 한초기록문화가 어느 정도로 발달했는지도 중요할텐데요
  • 로자노프 2018/02/11 15:08 #

    그게 전통적으로 중국의 기록문화는 상당한 편인데 이상하게 분서갱유~한문제에 이르는 시기동안은 기록문화가 영 이상하게 약했던 것 같습니다. 거기다 기록물이 변형되는 현상도 많았고요. 훈고학으로 문서 복원 시도가 있었지만 최근의 고고학 출토물과 대조할 때 경전의 초기 모습과 현대의 모습이 다른 것으로 판명난 경우가 꽤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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