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역사 이야기 完. 표트르의 최후 공국 문화부 직할 역사연구소

<문화적 대변혁>



 - 키릴 문자. 이 사진의 키릴문자는 개혁 이전의 것이다. -


바쁜 대북방전쟁 틈틈이 표트르는 문화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1703년에 러시아 최초의 신문 베도모스티를 창간하게 했다. 1710년경에는 대대적인 문자개혁을 단행했다. 이 문자개혁은 잘 안 쓰이던 4개의 글자(Ѯ, Ѱ, Ѡ, Ѧ) 를 없애고 발음부호와 억양을 실제 세속에서 쓰이는 형태로 개량한 것이었다.(1) 거기다 네덜란드를 통해 이런 문자개혁이 반영된 출판물들을 대량출판하기도 했다. 또한 전쟁이 끝난 후인 1722년 군주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프라브다란 것을 출판했다. 이런 출판산업에 대한 관심 덕에 1725년에는 그 이전 150년을 합친거보다 더 많은 출판물이 러시아에서 출판되었다.



- "내가 마지막이라니! 허수아비로도 모자라 마지막이라니!" -



하지만 그가 신경을 쓴 것은 문자, 출판 같은 것만이 아니었다. 종교에도 신경을 꽤나 많이 썼다. 1700년 아드리안 총대주교가 죽자 그는 총대주교를 선출하게 두지 않고 스테파노 야보르스키란 인물을 자신이 직접 임명했다. 즉 모스크바 총대주교를 자신이 직접 임명한 것이다. 그러다 대북방전쟁이 끝난 1721년에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직을 없애버리고 종무원이 대신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했다.


종무원은 주로 종교 업무를 담당했는데 문제는 이 종무원 위원들은 위원장까지 포함해서 전부 차르가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즉 러시아 정교는 차르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후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이 폐지될때까지 모스크바 총대주교직은 공석이었고 종무원이 모든 걸 대신했다.


<행정과 경제를 바꾸다.>


표트르는 행정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1708년 지방개혁 조치로 행정을 담당할 8개 군을 설치했다. 이후 1719년에는 러시아 전체를 50개 지역으로 나누고 이 지역마다 관리를 파견한다. 그 뿐만 아니라 중앙 행정에도 손을 대어 1718~172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콜레기야로 불릴 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위원회들은 각자 정해진 업무를 담당했다. 또한 1722년에는 관직들을 14등급으로 나누는 관등표를 발표한다



- 골로빈.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했던 그는 표트르의 최측근이자 주요 외교관 중 한명이었다. -


외교적 발전도 눈부셨다. 표트르 이전 러시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수도였던 바르샤바에만 대사관을 두고 있었다. 거기다 각 국에 특사를 보낼 때 특사들은 러시아어만 할 줄 알고 무례하기로 악명이 높았었다. 하지만 표트르 대제의 노력 덕분에(2) 표트르 대제가 죽을 무렵 대사관은 유럽 각국에 설치되고, 외교관들도 여러 언어를 구사하며 예의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표트르 시기는 경제적인 변화도 두드러졌다. 표트르는 운하에도 관심이 많아 18세기 초 여러 개의 운하를 건설했다. 또한 산업 발전을 목적으로 1724년 러시아로 수입되는 대부분의 제품 중 러시아에서도 생산되는 제품들에 대해 75%의 고세율의 관세를 매기고 원자재 수출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다만 경제에 대한 표트르의 관심은 재정수익에만 집중한 것이었다. 그는 1718년 인두세를 도입하는 한편 1718년에서 1722년까지 대규모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수익은 엄청나게 증대되었지만(3) 민간의 부담이 과중되었다. 이미 여러 번 들고일어났었던(4) 백성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다만 그가 행했던 모든 조치가 전부 제대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표트르는 1714년 일반 상속제로 장자상속법을 도입했다. 이 법에 따르면 귀족의 차남 이하들은 영지 등은 받지 않고 봉직만 받아야했다. 또한 1719년에는 행정과 사법에 대한 분리조치가 시행되기도 했는데, 두 가지 조치 모두 표트르 대제 사후 모두 폐지되었다.


<카프카스 침공>


대북방전쟁이 끝났지만 아직 표트르의 팽창욕구는 남아있었다. 그의 다음 목표는 카프카스, 페르시아 지역이었다.


러시아의 세력이 확장되면 허 이미 17세기 초엽 그 세력권은 카프카스 산맥 북부에 닿을락말락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지역은 오스만이나 사파비조 페르시아, 특히 사파비 왕조의 영향력이 강했다. 당연히 러시아가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제대로 확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7세기 초엽의 원정은 대실패로 끝났다. 거기다 1630년대~1640년대 코사크들이 은근슬쩍 북카프카스 지역에 요새를 건설하며 영향력을 확대하려하자 사파비 왕조는 이 지역들의 요새들을 파괴해버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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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뭐? 상인들이 죽어? 이 때다! 페르시아가 혼란스러우니 이 기회에 페르시아를 치자!" -



하지만 이후 사파비 왕조의 힘은 약해졌다. 당시 사파비 왕조는 각지의 반란과 약탈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인 1721년 카프카스 지역의 토착 민족 중 하나인 레즈기안 인(5)들이 사파비조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 아제르바이잔 지역의 샤마흐가 함락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샤마흐에 체류 중이던 러시아 상인들이 피살되었다. 페르시아 주재 러시아 대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받은 표트르 대제는 바로 칼미크족의 칸 아유카와 사라토프에서 만나 군사 지원을 요청한 후(6) 페르시아 침공을 개시했다. 차르가 직접 이 전쟁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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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24년 당시 이란의 지도. 카스피해 연안이 색칠되지 않았는데 이는 이 지역이 러시아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


당시 사파비조 페르시아는 아프간 반란군에게 수도 이스파한이 포위된지라 러시아군의 침공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속국인 카르틸 왕국(7)이 사파비조를 배신하고 러시아군에 붙었다. 표트르의 군대는 1722년 12월 북부 이란 길란에 있던 라슈트를 포위해 이듬해 3월 함락시켰고, 그의 다른 군대들은 바쿠 등 카스피해 연안 지역을 손쉽게 점령했다. 결국 1723년 사파비조 페르시아는 러시아에게 러시아군이 점령한 카스피해 연안 지역 밑 카프카스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넘겨줘야했다. 이듬해 러시아는 사파비조 페르시아가 점유하던 카프카스 지역을 오스만 제국과 분할하는 조약을 체결했다.(8)


<한 흑인 소년 이야기>


대북방전쟁이 한창이던 1704년 에티오피아 출신(훗날의 연구 결과 카메룬으로 정정됬다.)으로 알려진 8살 짜리 흑인 소년이 오스만 주재 러시아 대사의 손에 이끌려 러시아로 보내져 톨스토이 백작에게 맡겨진다. 이는 표트르 대제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표트르는 흑인에게도 백인과 같은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흑인 소년을 구해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 아이는 노예에서 해방된 후 1705년 빌뉴스에서 세례를 받았다. 표트르가 이 아이의 대부가 되어주었다. 표트르는 이 아이를 열심히 가르치라고 지시했다. 그러다 1717년에는 아예 서구식 교육을 받으라고 프랑스로 유학을 보냈다. 이 아이는 수학과 기하학등을 배우고 프랑스 군대에도 종군해 4국동맹전쟁(9)에도 참전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아이는 당대의 여러 학자들을 만나보았다고 전해진다. 논쟁거리긴 하지만.


여튼 교육은 1723년 끝났고 아이는 러시아로 돌아갔다. 표트르 대제 사후 이 아이는 일이 꼬여 시베리아로 유배되기도 하지만 다시 돌아와 에스토니아 총독 등 여러 고위직을 지내다 자연사했고 그의 후손들은 러시아의 귀족으로 대우받았다.



- "내가 많이 입지전적이지. 노예에서 귀족으로 말이야!" -


이 아이의 이름은 바로 19세기 러시아의 대문호 중 한 명은 푸슈킨의 외증조부 아브람 페드로비치 간니발이었다.


<표트르의 최후>


알렉세이가 죽은 이후 표트르 대제는 점점 쇠약해졌다. 1723년 말엽 그는 심각한 요로 결석을 앓게 된다. 요로결석의 원인은 은 그가 워낙 술을 많이 마셔대서인 것으로 추측된다. 1724년 여름 의사들은 수술로 4파운드는 될 결석을 뽑아냈다. 한동안 그의 몸은 나아지는 듯 했다.


하지만 야사에 의하면 그 해 11월 경 표트르는 라도가 호수에서 침몰하는 배를 보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직접 차가운 호수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이 때 차가운 호숫물 때문에 그의 병세가 악화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출처가 빈약한 이야기이다.



- 한 시대를 풍미한 자의 최후. -



확실한 것은 1725년 초엽에 이르러 그의 요독증이 다시 악화되어 손을 쓸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표트르는 알렉세이가 죽은 후 후계자는 무조건 차르가 지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선포했는데 정작 후계자를 정하지 못 했다는 것이었다. 표트르는 결국 2월 8일 경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채 사망하고 만다. 큰 별이 지고 만 것이다. 후계자는 여러 논쟁 끝에 그의 아내였던 예카테리나가 되었다.


(1)발음부호 및 억양에서 й는 예외였다.


(2)정작 표트르는 유럽 방문 때 무례하기로 악명이 높았지만 말이다.


(3)1724년 기준 정부 수익이 1680년의 5배 반이었다.


(4)북방전쟁 도중 러시아에서 이미 수많은 반란이 있었다. 이 중에는 개혁에 대한 반발부터 구교도들의 봉기, 소수민족들의 반란, 세금에 반발한 봉기 등이 다양하게 존재했다.


(5)이들은 수니파였기에 시아파 국가였던 사파비 왕조를 좋아하지 않았다.


(6)이 때 아유카 칸은 표트르가 1만 기병을 요청하자 5천명이면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7)조지아 왕국이 15세기 후반 셋으로 분열되었는데 그 중 하나였다. 사파비 조 페르시아의 속국이었고 현 조지아의 중부 지역을 통치했다. 조지아 정교회를 신봉했다.


(8)단 이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 했다. 나디르샤가 이란 일대를 제패한 후 러시아를 공격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잃었던 영토를 1735년까지 전부 되찾았기 때문이다.


(9)루이 14세 사후 그 손자였던 스페인 왕 펠리페 5세가 프랑스 왕위 확보와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잃어버린 남부 이탈리아 등을 되찾으려고 하자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가 동맹을 맺고 스페인을 공격한 전쟁. 당대의 최강국들이 동맹이 된 만큼 스페인의 패배로 끝났다. 


덧글

  • 까마귀옹 2017/01/01 13:11 #

    표트르의 최후에 대해선 그 야사가 더 잘 알려져 있죠. '일국의 군주이면서 솔선수범하는' 일화라서 그런가?
  • 로자노프 2017/01/02 16:04 #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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