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역사 이야기 37. 표트르의 가족들 공국 문화부 직할 역사연구소

<첫 아내 - 에브도키아, 불행한 여인>

잠시 여기서 시계바늘을 과거로 돌리고 표트르의 가족, 주변인물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건 표트르 대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 표트르와 에브도키야의 결혼식을 묘사한 그림. 애정이 없는 이 결혼은 비극적으로 끝난다. -


30화에서 말한 거지만 표트르는 1689년 자신보다 3살 연상인 러시아 귀족 여성 에브도키아와 혼인했다. 그의 어머니가 정해준 결혼이었다. 하지만 표트르는 전형적인 구식 러시아 여성인 에브도키아에게 애정이 전혀 없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표트르는 나름 아내에게 충실하려고 노력을 한건지는 몰라도 1693년까지 에브도키아는 아들 3명을 낳았다.(1)

Eudoxia Lopukhina (18th c., Kuskovo).jpg

- 에브도키야의 초상화 -

그러나 표트르는 점점 그녀에게 싫증이 났다. 표트르는 1691년에 이미 자신과 동갑내기인 독일인 여성 안나 몬스와 내연관계가 되었다. 당연이 에브도키야는 화가 났다. 그는 여러차례 표트르에게 자신의 짝사랑과 불평을 담은 편지들을 보냈다. 그러나 그녀의 시련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표트르는 1696년 서유럽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에브도키아에게 이혼과 그녀를 수녀원으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당연히 에브도키아는 거부했다. 하지만 결국 1698년, 표트르가 서유럽에서 돌아오자 에브도키아는 표트르에 의해 강제로 수즈달의 포크로브스키 수녀원으로 옮겨져 수녀가 되어야 했다. 물론 이혼은 된 상태로. 

그러나 그녀는 이혼당했다지만 전직 황후였다. 그녀의 존재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은근슬쩍 표트르에 대항하는 반대세력들이 에브도키야를 중심으로 모였다. 거기에 표트르의 바람기와 이혼 때문에 상처 받은 에브도키아는 스테판 글라보브란 러시아 군장교와 사귀기까지 했다.


- 쉴리세리부르크의 요새. 에브도키아가 한때 유폐되었다는 곳이다. -


이런 상황은 1718년 알렉세이와 관련된 음모 사건이 벌어지면서 끝장이 났다. 스테판 글라보브는 반역 혐의로 처형되었다.(2) 에브도키아는 라도가의 수녀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다 예카테리나 2세가 즉위하자 쉴리셀리부르크의 요새로 옮겨져 감금되었다. 다행히 손자 표트르 2세가 즉위하면서 그녀는 모스크바로 옮겨져 거기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았다. 

<정부- 안나 몬스, 표트르 입장에선 배신한 여자>


안나 몬스는 독일인 상인의 딸이었으며 표트르와 동갑이었다. 모스크바의 독일인 지구에 거주하던 그녀는 1691년 표트르와 만났다. 그리고 표트르와 내연관계가 되었다. 당연히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도 혜택을 받았다. 그녀는 모스크바 근교의 저택과 농장을 선물로 받았다. 거기에 그녀의 어린 남동생 빌헬름 몬스는 나중에 표트르의 개인 비서이자 최측근이 되었다. 거기다 1698년 표트르가 에브도키아와 이혼하자 그녀는 차르의 준공식적인 정부가 되었다.  

그런데 1703년 안나 몬스는 뜻밖의 선택을 했다. 당시 러시아에 온 프로이센 대사 케슬링이 그녀에게 청혼하자 그걸 덜컥 받아들인 것이었다. 표트르는 분노했다. 그는 안나 몬스와 그녀의 어머니, 30여명에 이르는 친구들을 모조리 가택연금시켜버렸다. 그러다 새로운 정부 예카테리나를 만나고 시간도 지나면서 분노가 풀린 표트르는 나중에 안나 몬스의 결혼을 허락해줬다. 안나 몬스는 1714년 결핵으로 죽었다. 

<아들- 알렉세이, 불행한 황태자>

알렉세이는 1690년, 표트르와 에브도키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어머니를 박대하는 걸 보았고, 거기다 1698년에는 에브도키아를 수녀원에 집어넣는 걸 보았다. 당연히 알렉세이는 자신의 아버지 표트르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표트르는 자신의 황태자를 자신을 닮게 키우고 싶었다. 그는 아들이 자신의 개혁을 이어주기를 바랬다. 그는 러시아인 가정교사를 해임하고, 독일 출신 가정교사를 임명해 알렉세이에게 지리, 역사 등을 가르치게 했다.


- "아빠? 아. 어머니를 내쫓고 외국 여자랑 바람난 그 XX! 흥이다!" -


표트르는 아들을 강하게 키워주고 싶어했다. 13살이 되던 1703년 표트르는 아들에게 포병으로 전쟁터에 종군하게 했다. 나르바 요새가 함락될 때 알렉세이는 그 현장에 있었다. 하지만 알렉세이는 전쟁과는 영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신학과 교회학에 빠져들었다. 교회에 냉소적이던 차르로써는 열불이 뻗칠 일이었다. 당연히 부자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한다. 

거기다 알렉세이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 때문에 구 세력들의 중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알렉세이의 중심에는 어머니처럼 표트르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표트르가 빨리 죽어주고 알렉세이가 황태자가 되어주기를 바랬다. 

표트르도 그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일단 아들에게 아직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를 변화시켜보려고 했다. 1708년에 표트르는 알렉세이에게 스몰렌스크 인근에서 군대와 군량을 모아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1709년 표트르는 자신의 아들을 작센 공국의 수도 드레스덴으로 보내 서구식 교육을 받게 했다. 

Charlotte Christine of Brunswick-Luneburg by I.P. Luden.jpg

- 브라운슈바이크 대공의 딸인 샤를로테의 초상화 -

서구식 교육을 받은 알렉세이가 돌아오자 표트르는 아들을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는 외국 여성을 며느리로 맞이하려고 했고, 결국 며느리는 유서 깊은 벨프 가문(3) 출신이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루크 공국 공작의 딸 샤를로테로 결정됬다. 알렉세이는 결혼을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결국 작센 선제후령인 토르가우에서 1711년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조건은 샤를로테의 루터교 신앙은 그대로 유지하되 자식들은 러시아 정교를 믿도록 키운다는 정도였다. 조에 팔라이롤로구스 이후 최초로 러시아 황가에 시집온 외국 여인이었다.(4)

다행히 두 사람의 부부관계는 원만했다. 하지만 이 원만한 관계는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1714년, 알렉세이는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핀란드에서 붙잡혀온 14살 소녀 예프로시니야란 소녀를 총애하기 시작했다. 곧 그녀는 알렉세이의 정부가 되었다. 그러다 이듬해인 1715년 샤를로테는 표트르라 불릴 아들을 낳고 9일 후 산욕열로 죽었다. 표트르는 며느리의 죽음을 지켜보며 슬퍼했다고 한다. 정작 알렉세이는 그 때 지금의 체코에 속한 카를로비바디에 정부인 예프로시니아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따. 샤를로테와 알렉세이는 1남1녀를 두었다. 


- "누굴 닮아서 이상한 여자에게 빠져지내냐..." 신하들(속으로): '댁 닮아서겠죠.' -

샤를로테의 죽음 이후 부자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표트르는 사돈남말하는 것 같지만 예프로시니아와 알렉세이의 관계를 못마땅해했고, 개혁에 관심이 없다는 것에 화를 냈다. 표트르는 알렉세이에게 왕위계승권을 박탈하는 수가 있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부자관계는 실질적으로 파탄이 났다. 

<알렉세이의 죽음>

그러던 중 1716년 표트르는 대북방전쟁과 관련해 서유럽의 협조를 얻어보려고 다시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등을 방문했다. 그러던 와중인 1716년 8월 26일 알렉세이 황태자는 멘시코프 등에게서 돈을 좀 빌린 후 예프로시니아 및 소수 인원들만 데리고 러시아를 탈출, 폴란드 귀족 코한스키를 칭하며 빈으로 도망친다.

Martin van Meytens (attrib.) - Porträt Kaiser Karl VI.jpg

- "지가 영조냐? 아들을 죽이려고 하게? 뭐 영조는 안 즉위했지만 아들 죽이는 건 좀 아닌 것 같수다." -

그러다 곧 그는 빈에서 나폴리의 성 엘모성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리고는 거기서 샤를로테의 언니와 결혼한 자신의 동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6세의 보호를 받는다.(5) 카를 6세는 표트르가 알렉세이를 암살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는지 영국의 왕 조지1세에게 지원을 요청하기까지 한다. 


- "70먹은 노인네가 부자싸움을 중재해야 되는구만... 뭐 이 때를 위해 늙은 개가 새로운 재주를 좀 배우긴 했지." -

일이 이상하게 진행되자 표트르는 자신의 측근인 톨스토이 백작(6)을 보내 알렉세이를 고국으로 돌아오게 설득하라고 지시한다. 톨스토이 백작은 알렉세이를 설득했고, 결국 알렉세이를 처벌하지 않고 예프로시니아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전제하에서 귀국했다. 다만 예프로시니아는 당시 임신한데다가 같이 온 남자형제가 앓아누워 빈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 "아버지! 약속은요?!" "약속은 어기라고 있는 거다. 그리고 너 날 죽이려고 했다는 말이 돌던데? " -

하지만 1718년 1월 알렉세이가 돌아오고나서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구금되었고, 반역혐의로 체포되었다. 알렉세이의 도주를 도운 사람들이나 표트르에 대한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고문당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어머니 에브도키아의 정부까지 체포되어 사형당하기도 했다. 뭐 고문은 평등하게 적용되어 알렉세이도 예외없이 고문당해야 했다. 

거기다 4월경 예프로시니아가 귀국하자 그녀 역시 구금되었다. 당시 그녀는 알렉세이의 아들로 추정되는 아이와 함께 왔는데 그 아이는 강제로 어머니 품에서 떨어지게 된 후 기록에서 사라져버린다. 예프로시니아는 그 뒤 반강제로 고문도구들을 보게 됬는데 그것들을 보자마자 겁에 질려 알렉세이가 아버지가 한 모든 것들을 원상복귀시키려 했고, 반역을 도모하려고 했다고 자백해버리고 말았다. 

한편 알렉세이는 이 말을 듣고 자포자기한건지, 아니면 계속된 고문을 버티지 못한 건지 결국 자신이 반란 음모 등을 꾸몄다고 자백했다. 원로원은 그 말을 듣고 알렉세이에게 6월 경 사형을 선고했고 표트르의 최종 서명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안 그래도 고문으로 약해져있던 알렉세이는 19일에 25대의 채찍질을 당했고, 5일 후 15대를 더 맞았다. 이런 계속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쇠약해진 것인지, 혹은 고문 와중에 사망한 것인지는 몰라도 알렉세이 황태자는 6월 26일 사망하고 만다. 

일설에 의하면 알렉세이가 죽는 순간 표트르는 아들과 화해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표트르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이 설에 의하면 이후 표트르의 건강이 조금씩 악화되어갔다고 한다.

<두번째 아내 - 예카테리나 1세>

예카테리나 1세는 1684년에 평범한 농민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가 어린 시절 죽은 뒤 친척이 있는 알룩스네로 보내져 출생지가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략 라트비아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 그녀의 본명은 마르타였다. 그녀는 17살이 되던 해 스웨덴 용기병 대원인 요한과 결혼했지만 요한은 8일 후 그녀를 떠나야했고, 그 뒤 소식이 끊겨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곧 당시 마리엔부르크로 불리던 알룩스네는 셰레메테프가 이끄는 러시아군대에 의해 함락된다. 그녀는 세레메테프에게 끌려갔다. 보리스 세레메테프는 곧 루돌프 펠릭스 중장의 여종이 되었다가 여차저차해서 멘시코프에게 보내졌다. 

Portrait of Alexander Danilovich Menshikov1.jpg

- "내가 눈치 하나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눈치하면 멘시코프!" -

표트르의 최측근인 멘시코프는 그녀를 자신의 정부로 삼았다. 그러다 1703년 표트르는 멘시코프의 집을 찾았다가 마르타를 보게되었고 한 눈에 반해버렸다. 마침 안나 몬스가 자신을 배신했던 사건이 있었던 무렵이었다. 눈치 빠른 멘시코프는 바로 차르에게 마르타를 바쳤고 그녀는 차르의 정부가 되었다.

예카테리나는 1705년 황실 영지인 프레오브라젠스코예로 보내졌고, 그해 혹은 1707년이나 1708년에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고 예카테리나로 개종했다. 두 사람은 1707년 말엽 비밀리에 결혼했다. 그러다 1711년 오스만제국군에 의해 같이 프루스 강 유역에서 고립됬던 사건 이후 예카테리나는 황후로 선포되고 1712년 정식으로 화려한 결혼식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 이삭 대성당에서 열었다. 

Catherine I of Russia by Nattier.jpg

- 예카테리나 1세를 그린 그림 -

표트르는 그녀를 정말로 사랑했다. 그래서 1713년 그녀의 이름을 딴 훈장을 만들고, 이듬해에는 그 훈장을 예카테리나에게 수여했다. 거기에 1723년에는 우랄 지역에 새로 만든 신도시를 그녀의 이름을 딴 예카테린부르크로 명명했다. 둘의 사랑을 증명하듯 두 사람은 12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하필 두 딸을 빼고는 금방 죽었다.(7)

한편 일설에 의하면 이 무렵 예카테리나는 안나 몬스의 남동생인 표트르의 비서 빌헬름 몬스와 바람이 났다고 전해진다. 그 증거로 1724년 빌헬름 몬스가 처형된 것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빌헬름 몬스가 처형된 것은 사실이나 그가 갑자기 총애를 잃고 몰락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여하튼 1725년 1월 표트르가 죽었을 때 하필 후계자는 불분명했다. 표트르는 생전에 황제(8)의 지명을 받은 사람이 후계자가 된다고 선언했지만 정작 자신은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죽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표트르 대제의 손자 표트르를 군주의 자리에 앉히려고 했다. 하지만 멘시코프 등 표트르의 최측근들이 수를 써서 예카테리나를 즉위시킨다. 농민의 딸이 여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3년 후 병에 걸려 군주의 자리에 얼마 있지 못 하고 사망한다.

(1) 하지만 1690년 태어난 장남 알렉세이를 제외하면 모두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2) 그는 죽어가면서 표트르에게 침을 뱉었다고 한다. 

(3) 유래가 무려 카를링거 가문이 서유럽을 호령하던 시절부터 거슬러올라가는 명가. 1050년 경 혈통이 한 번 끊겼지만 에스테 가문으로 시집간 벨프가문의 여인이 낳은 아들이 모계 혈통을 기반으로 벨프가문을 이었다. 영국의 하노버 왕가도 벨프 가문에서 갈라져나왔다. 

(4) 이후 표트르는 자신의 딸 안나 공주를 서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로 시집보내는 등 외국의 통치가문들과 활발하게 혼인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이로써 러시아 황가는 유럽 황가와 복잡한 혈연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1643년경 덴마크 왕자가 러시아 정교로의 개종을 거부한다고 덴마크와의 국혼을 파기하고 왕자를 가두기까지 했던 사례와 비교하면 그 변화가 크게 다가올 것이다. 

(5)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으로 인해 어차피 빈과 나폴리 모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6) 그 유명한 대문호 톨스토이의 조상이 맞다. 

(7) 하필 그 중 1723년에 낳았다가 곧 사망한 막내는 아들이었다. 사실상 후계자가 손자 표트르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이는 좋은 일이 절대 아니었다.

(8) 이 무렵 러시아는 군주의 칭호를 차르에서 임페라토르로 바꾸었다. 편의상 임페라토르는 황제로 번역했다. 

덧글

  • Fedaykin 2016/08/01 22:24 #

    표트르는 그냥 개혁군주인줄만 알았는데 개인사도 참 화려했군요
  • 로자노프 2016/08/02 07:53 #

    화려합니다. 화려해요.
  • intherain 2016/08/01 22:46 #

    개인사는 그저 막장..
  • 로자노프 2016/08/02 07:54 #

    막장이죠. 막장.
  • 위장효과 2016/08/01 23:29 #

    1. 그리고 약 200년 후 표트르 대제의 자손들-직계인지 그 혈통이 의심스러운 사건이 중간에 있었지만-은 그 조상이 세운 도시에서 끔살당하고...

    2. 레프 톨스토이가 러시아의 명문 귀족 가문 출신-부계와 모계 양쪽으로-을 모르는 사람이 설마 있겠어? 싶은데 의외로 있더라고요. 그의 엔간한 번역판의 해설에 가문 내력을 줄줄이 적어놓고 있건만...

    3. 이반 4세와 마찬가지로 아들을 죽이긴 했는데, 이반 뇌제쪽은 충동-둘다 아들들이 아버지한테 반항하긴 했는데 차레비치 이반쪽이 알렉세이보다는 더 정당해보이니...임신중인 마누라 옷 가지고 시비거는 "미친" 아버지한테 뭐라 할 수도 있지 그걸 지팡이 휘둘러서 죽이냐...-적이었던 데 반해 표트르 대제쪽은 아주 치밀하게 짜서 죽여버렸는지라 이쪽이 더 잔혹해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쨌든 둘 다 아들 죽인 다음에 계승문제가 아주 대차게 꼬여버렸다는 공통점이 있으니...(예카테리나 1세부터 알렉산드르 1세 때까지의 러시아 제위 계승사는 도대체가 뭐 이래? 싶을정도)
    콘스탄티누스 대제도 아들 크리스푸스를 아주 처절하게 고문한 다음 죽여버렸는데 그 모습도 보일 지경이고.

    4. 1986년작인가...미국 NBC에서 "표트르 대제"라는 미니시리즈를 방영했고 이게 국내에도 수입되어 방영된 적이 있는데, 폴타바 전투 장면이라든가 나중에 알렉세이 황태자가 고문당하는 장면등이 꽤나 인상깊었습니다. 여기서 표트르 역을 맡은 게 막시밀리언 쉘(...)이었고, 거기서 윌리엄 3세 역을 맡은 게 로렌스 올리비에(...).

    5. 벨프 가도 그렇지만 카페 가를 통해서 카롤링거 왕조의 피도 나름 이어지고 있는 셈이긴 하죠...카페 가의 방계인 부르봉 가문이 있으니...(은근히 유럽 왕실이 나름 방계의 방계를 거치긴 해도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온단 말이죠. 합스부르크 가문도 그렇고)
  • 로자노프 2016/08/02 07:55 #

    1. 적백내전...

    2. 그러게 말이군요.

    3. 절대 동감입니다.

    4. 호오... 한번 보고 싶네요.

    5. 카페 가문이나 그 방계가문들의 왕이 카롤링거 가문 사람과 혼인했던 적이 있었던가요? 왕제가 결혼한 사례는 알고 있지만...
  • 위장효과 2016/08/02 08:04 #

    부계의 모계라고 해야 할까...위그 카페의 할머니가 샤를마뉴의 고손자였으니 말입니다.
  • 이준님 2016/08/02 22:30 #

    로렌스 올리비에는 뉴턴 아니었나요?
  • 위장효과 2016/08/02 23:41 #

    이준님// 로렌스 올리비에가 윌리엄 3세 맞을 겁니다. 일단 iMDB 검색해보니 뉴튼 경 맡은 건 트레버 하워드(이쪽도 대배우!)라고 되어 있네요.
  • 2016/08/02 22:42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8/03 13:5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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