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리안(1) 전멸당하다> - 캐롤리안들의 모습 - 칼 12세가 프레데릭스텐에서 전사하자 구심점을 잃은 스웨덴 군대는 철수를 개시한다. 당시 트론헤임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진격, 노르웨이의 트론데라그 지역(2)에서 캐롤리안들을 이끌던 암펠트는 칼 12세가 죽자 병력들을 철수시키기로 했다. 그는 스웨덴으로 빨리 돌아가기 위해 지름길을 택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 국경 가까이에 있는 스칸디나비아산맥을 넘기로 한 것이었다. 이 당시 스웨덴 군대는 6천명에 불과했다. 처음에 그가 이끌었던 군대는 만여명이었지만 트론데라그 원정 과정에서 4천명이 죽은 상태였다. 하지만 1719년 1월 8일 철수를 시작한 이들은 불과 3일만에 한파로 인해 200명의 병력을 잃은 채 중간 기착지인 외스비에 도착했다. 이들은 이 곳에서 노르웨이인 한명을 협박해 길잡이로 삼은 뒤 다음날인 12일 목적지인 옘틀란드의 한돌로 출발했다. 캐롤리안들은 날씨는 추웠지만 눈이 오지 않았기에 이틀 정도면 도착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신은 그들을 철저하게 버렸다는 것이 증명됬다. 그날 오후 엄청난 눈보라가 몰아쳤다. 암펠트는 엄청난 추위와 눈보라때문에 병력들을 숙영시켜야 했다. 병사들은 체온을 유지하려고 장작 등을 긁어모으고 심지어 이동수단인 썰매나 무기인 총까지 태워가며 버티려고 했다. 그러나 첫날 밤에만 200명이 동사해버렸다. ![]() - "let it go, let it go. 문을 나아갈 거야(중략) 폭풍 몰아쳐도 추위따지 두렵지 않다네" "시끄러! 니 때문에 다 얼어죽는다고!" - 눈보라는 이튿날에도 계속되었다.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병사들은 계속 얼어죽었고, 짐을 나를 말들까지 전부 죽어버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장비까지 버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명피해는 계속되었다. 스칸디나비아 산맥에서 3천명 가까이가 동사한 후겨우겨우 한돌에 도착한 후 근처 두베드로 이동하는 과정에서도 700명 가량이 동사했다. 이후 확인해보니 2700명만이 살아남았는데 그 중 멀쩡한 사람은 600명에 불과했다. 장비 등의 손실은 말할 것도 없었다. - 캐롤리안 죽음의 행진을 나타내는 지도. 본문과 날짜표기가 다른데 그림의 날짜는 그레고리우스력 기준이다. - 1월 18일 경. 캐롤리안들을 추격하던 덴마크 군대는 엄청난 숫자의 시체들과, 기수를 잃고 떠도는 말들, 버려진 무기들 및 장비들을 발견했다. 덴마크 군대와 노르웨이 현지 주민들은 이 엄청난 양의 노획물들을 쓸어가기 시작했다. 씁쓸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이렇게 얼어죽은 시체들을 현지에 살던 늑대, 여우, 울버린 등이 파먹었다. 이들은 널려있는 시체 덕에 살이 찌고 숫자도 늘어나 이 지역은 몇 년간 모피사냥꾼들에게 노다지 사냥터가 되었다... <불바다가 된 스웨덴> 한편 핀란드를 장악한 러시아 군대는 1719년 경부터 스웨덴 본토까지 공격하기 시작했다. 바다를 좋아한 표트르 대제 덕분인지 급격히 성장한 러시아 해군은 스웨덴 해군을 격파하고 스웨덴 본토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뇌르셰핑에서 우메오에 이르는 항구도시들이 러시아 함대의 포격에 노출됬다.1719년 여름에는 132척의 갤리에 2만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스톡홀롬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나마 스톡홀름 남동부 스타켓에서 스웨덴 군대가 러시아 군대를 막아내면서 스톡홀름이 함락되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지만. - "이제 발트해는 우리 러시아의 것이다!" "크윽... 바이킹의 후예인 우리가..." - 거기에 더해 1720년 스웨덴 해군은 나름 전열을 정비해 알란드 섬 근처 그렌감에서 러시아 해군과 해전을 벌였다. 하지만 이 해전에서 러시아 해군은 스웨덴 해군을 격파해버렸다. 러시아 해군도 피해가 컸지만 이로 인해 스웨덴 해군은 아주 섬멸되었다. 다만 이런 상황을 본 영국, 프로이센 등은 러시아의 지나친 성장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비록 같은 편이지만 너무나 갑작스럽게 성장한 러시아가 두려워진 것이다. 이들은 따로 스웨덴과 접촉해 평화협상을 가지기 시작했다. 적을 줄이려던 스웨덴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평화협상은 급진전되었다. - "러시아가 너무 급격히 강해졌다! 그것은 곤란하다!" - 그래서 1719년 영국 및 영국과 동군연합한 하노버 선제후국은 스웨덴과 스톡홀름 조약을 맺고 브레멘을 하노버 선제후국이 가지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이듬해인 1720년에는 프로이센이 스웨덴과 평화조약을 맺어 스웨덴령 포메라니아의 일부를 받고 전쟁을 끝내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영국은 되려 러시아에 보낸 고문관들을 철수시키고 스웨덴을 지원하며 러시아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종결> 상황이 이리 되자 다른 국가들도 슬슬 전쟁을 끝낼 때가 됬다는 것을 느꼈다. 당연히 러시아, 덴마크, 폴란드와 스웨덴간 평화협상도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1720년 덴마크는 스웨덴과 프레데릭스보르그 조약을 맺어 60만 릭스달러(3)를 보상금으로 받고, 홀슈타인에 대한 스웨덴의 영향력 및 외레순 해협의 관세 면세권을 포기시켰다. 한편 폴란드-리투아니아-작센은 1660년에 맺은 올리바 조약을 갱신시키는 것으로 평화조약을 대신했다. - 니슈타트 조약으로 러시아가 얻은 영토. 녹색 빛금친 지역이 러시아가 점령한 영토다. - 이제 남은 건 러시아 뿐이었다. 1721년 8월 30일. 러시아는 지금의 핀란드 땅에 있던 니스타드에서 스웨덴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 평화조약에서 러시아는 스웨덴에게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있는 스웨덴령 잉그리아,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켁스홀름과 카렐리야 일부를 할양받았다. 비록 이 영토들을 받는 대가로 1억 6백만 루블을 스웨덴에 주어야했지만 발트해로의 출구를 확보한 셈이었다. 이로써 발트해에서 스웨덴이 차지하고 있던 패권은 붕괴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칼 12세가 죽고 그 여동생 울리카와 남편인 프레드릭이 차례로 왕위에 즉위하는 과정에서 스웨덴 의회의 힘이 왕권보다 강해지며 스웨덴은 자유시대에 돌입했다.(4) - "이제 그 누구도 러시아를 무시하지 못 할 것이다!" - 한편 표트르 대제는 전쟁의 승리로 그 권력이 한층 강해지고 러시아의 위상도 높아졌다. 당장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던 러시아 황제의 지위를 다른 유럽 열강들이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조국의 아버지라 불리고 전 러시아의 황제란 칭호까지 받았다. (1) 칼 11세와 칼 12세가 양성한 스웨덴 군대를 일컫는 용어 (2) 노르웨이 중북부 지역이다. (3) 17세기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쓰인 스웨덴의 화폐단위. (4) 이 시대는 의회의 내분 등을 이용한 1772년의 왕실 친위쿠데타로 붕괴되었다. |
- 2016/02/0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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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내가 바로 여왕이다!'
몽골 침략을 제외하고 러시아에 저 여왕님의 지원이 왔을 때 패배한 적은 없었다나.....
(겨울전쟁? 그때는 여왕님이 핀란드 편이었고)
Let me go! Let me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