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때려잡기>
1709년 스웨덴이 폴타바에서 대패하고, 주력군이 증발해버리자 발트해의 정세는 다시 요동치기 시작한다. 무적의 스웨덴 군대가 패배하고 칼 12세가 오스만투르크로 도망치자 스웨덴에 원한이 있던 나라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 "자. 이제 복수의 시간이 왔도다!" -
덴마크는 폴타바의 패배가 전해지자 바로 외레순 해협의 통행세와 관련된 스웨덴의 행동 및 과거 덴마크 영토였던(1) 스코네 등의 탈환을 명분으로 스웨덴에 선전포고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도 작센 선제우 아우구스트 2세가 스타니슬라프를 몰아내고 다시 국왕이 된 후 스웨덴에 선전포고한다.
스웨덴 군대는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스웨덴 남부에 상륙한 덴마크 군대를 헬싱보리에서 1710년 2월 격파한다. 덴마크 군대는 헬싱보리를 파괴한 후 후퇴한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러시아 군대는 곧 리가를 함락시켰고, 3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핀란드-러시아 국경지대의 비보르크도 점령한다.
- 표트르 대제는 이제 흑해에까지 마수를 뻗치려고 한다. 하지만...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가는 법이었다. -
한편 칼 12세는 콘스탄티노플 궁정으로 망명한 후 오스만 제국에게 러시아를 공격하라고 충동질하기 시작한다. 오스만 제국은 그의 이런 주장에 혹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침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몰다비아 대공 드미트리 칸테미르가 표트르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그는 몰다비아 및 왈라키아 지역 정교도들의 지원을 기대하며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다.
<기사회생>
그런데 정작 몰다비아 지역으로 진격하자 호응은 뜨듯미지근했다. 더군다나 비록 점점 쇠락하는 중이었다고 하지만 오스만 제국은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1711년 7월 말엽. 오스만 제국의 군대는 러시아-몰다비아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들을 완벽하게 포위해버린다. 문제는 포위당한 러시아군대 안에는 직접 친정에 나선 표트르와 러시아에서 믿을 수 있는 장군이었던 보리스 셰르멘테프, 표트르의 정부 예카트리나 등 주요 인사들이 포함되어있었다는 것이었다!
- "저 불곰 놈들에게서 뭘 어떻게 뜯어낼까... 맘에 안 들면 콘스탄티노플 감옥에 쳐넣으면 그만이고~" -
훗날의 역사가들은 이를 두고 오스만 제국이 차르와 그의 정부를 콘스탄티노플의 동물원 우리에 쳐박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할만큼 아주 오스만제국에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당시 표트르는 발트해 지역의 점령지와, 아조프 등을 몽땅 포기할 각오를 했을 지경이었다. 사실상 오스만 제국은 무엇이든 요구하고 관철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협상 결과 맺어진 프류트 조약은 이상하게도 그렇게 오스만 제국에 유리하지 않았다. 이 조약의 내용은 아조프 등 과거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에게서 빼앗았던 영토의 반환, 다뉴브를 건드리지 말 것,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영향력을 더 이상 확대하지 말 것, 칼 12세의 귀환을 방해하지 말 것 정도였다. 표트르가 처했던 절망적인 상황에 비한다면 너무 협상이 좋게 끝난 것이었다.
- 예카테리나가 오스만 군대의 진영을 방문했다는 이야기에 따라 그려진 그림 -
덕분에 표트르는 손해를 최소화하고 러시아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오스만 궁정은 난리가 났다.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메흐메트 파샤가 표트르의 정부인 예카테리나의 성로비를 받았다는 소문이 도는 지경에 이르렀고,(2) 칼 12세나 오스만의 술탄 아흐메트 3세는 난리를 쳤다. 결국 메흐메트 파샤는 레스보스섬으로 귀양을 가야했다.
- 오스만 제국 군대의 습격을 받는 칼 12세. 숫적 열세 때문에 칼 12세는 금방 생포되고 억류된다. -
한편 칼 12세는 러시아-투르크 전쟁이 끝난 후에도 콘스탄티노플에 남아서 대러시아 강경론을 폈다. 하지만 처음에는 너무 조건이 후했다고 길길이 날뛰던 아흐메트 3세도 슬슬 러시아와 전쟁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접었고, 당연히 칼 12세는 귀찮은 존재가 됬다. 여기에 더해 몰다비아 벤더리 지역에 머물던 칼 12세의 측근들이 국경 상인들에게 빚을 지게 되자 이들과 연관이 있던 예니체리들이 국경 상인들의 문제도 해결하고, 골칫거리도 추방할 겸 1713년 칼 12세와 그 부하들을 공격한다. 칼 12세는 예니체리들에게 억류되어있다가 1714년에야 육로로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로 돌아갔다.
<몰락해가는 스웨덴>
한편 프루트 원정에서 오스만 제국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스웨덴은 그 혜택을 보지 못했다. 30년 전쟁 이래로 스웨덴이 점유하고 있던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대부분은 작센-덴마크-폴란드-러시아 연합에 의해 점령당했다. 그나마 스웨덴 군대가 1712년 가데부시에서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포 수가 많다는 것을 이용,(3) 연합군을 대파해, 포메라니아 지역 일부를 유지했지만 대세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한편 표트르는 오래전부터 배에 관심을 가졌고, 따라서 러시아의 함대 강화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 무렵 아직 건설중이지만 차르의 가족들과 행정기관인 원로원(4)까지 이주하며 명실상부한 수도가 된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도 해양 진출과 연관이 있었다. 그 성과가 슬슬 나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 해군은 스웨덴 함대와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던 중 1713년 경부터 러시아는 스웨덴의 영토였던 핀란드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여름 동안 핀란드 남부는 러시아에 의해 장악됬다. 핀란드 주둔 스웨덴 군은 점점 지쳐갔다. 거기다 1714년 2월 러시아 군대는 농부의 안내를 받아 스웨덴군대의 좌익을 공격하면서 지쳐있던 스웨덴 군대를 격파했다.
- "안녕. 우리 러시아 함대의 뜨거운 맛을 보여줄까?" "꾸에엑! 하지 마!" "이리 와!" -
거기에 1714년 8월 핀란드에 그나마 남아있던 스웨덴 군대에 해상으로 보급을 할 목적으로 보낸 스웨덴 함대는 강구트에서 그 사이 급속도로 성장해 숫적, 질적으로도 우위에 서있던 러시아 함대에 포위된다. 스웨덴 함대는 포위섬멸되었고, 함대를 지휘하던 에흐렌스키오드 제독은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한 때 발트해에서 명성을 떨치던 스웨덴 함대는 궤멸되었고, 핀란드도 러시아 군대의 손에 떨어진다.
이 러시아의 핀란드 점령기, 소위 거대한 분노로 불려지던 이 기간(1714년~1721년)은 핀란드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순간이었다. 러시아군대는 막대한 양의 돈을 핀란드인들에게 강요했고, 핀란드의 마을 여러 곳을 파괴하고, 불지르며, 사람들을 죽였다. 거기다 전염병까지 돌면서 헬싱키는 인구 절반 이상이 전염병으로 죽기까지 한다.(5)
<칼 12세의 죽음>
이런 상황에서 칼 12세가 1714년 스웨덴령 포메라니아에 속한 슈트랄준트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 그가 왔다고 해결될 상황은 아니었다. 이미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는 대부분이 반 스웨덴 연합군 손에 들어갔다. 그나마 1712년에 가데부시에서 승리한 덕에 일부 영토를 유지했지만, 그나마 이듬해 거의 다 빼앗기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프류트 조약의 후속 조치로 맺어진 아드리아노플 조약 덕에 1714년에 러시아 군대는 신성로마제국 권역에서 철수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면서 스웨덴의 운명에는 먹구름이 더 끼기 시작한다. 스웨덴이 점령하던 브레멘이 탐났던 하노버가 덴마크와 영토분할조약을 체결하고 반 스웨덴 연합군에 끼어들었다. 거기다 하노버는 막 영국과 동군연합을 이룬 상태였기에 영국까지 이 전쟁에 연관되어버렸다. 한마디로 답이 없었다.
- 슈트랄준트로 몰려드는 연합군을 나타내는 지도. 프로이센, 작센, 폴란드, 덴마크, 러시아, 하노버등이 뭉쳤다. -
칼 12세는 이 상황에서도 정신을 못 차렸다. 그는 슈트랄준트를 거점으로 반격을 하겠다고 병력을 증강시켰다. 그리고 프로이센과 동맹 협상을 벌였지만 프로이센은 무리한 조건을 내세우며 거부했다. 프로이센은 오히려 반 스웨덴 연합군에 가담해 슈트랄준트를 포위해버린다. 결국 칼 12세는 도주하고 슈트랄준트는 함락된다. 이듬해 비스마르까지 점령당하며 독일 내 스웨덴 영토는 전부 점령당했다.
- 전사할 당시 칼 12세의 모습을 묘사한 모형. -
그러나 칼 12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1716년 스웨덴 군대는 노르웨이를 공격한다. 칼 12세가 직접 이끄는 이 군대는 오슬로를 점령하지만 보급 부족과 주민들의 저항으로 후퇴해야했다. 하지만 2년 후인 1718년 11월 칼 12세는 다시 한 번 노르웨이를 침공, 프레데릭스텐을 공격한다. 하지만 이 성을 포위공격하는 중 칼 12세는 유탄에 맞아 전사하고 만다. 그러자 스웨덴 군대는 포위를 풀고 철수한다.

- 1916년 부검 등을 위해 꺼내진 칼 12세의 유골, 총알 자국이 굉장히 선명하게 나있다. -
공식적으로 그는 덴마크-노르웨이 수비군이 쏜 총알에 맞아 전사한 것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미 전황이 너무 스웨덴에 불리하게 전개되던 상황에서 칼 12세 혼자 휴전이나 항복을 거부하고 있었기에 당시 귀족들은 평화를 원하며 칼 12세와 대립하고 있었다. 거기다 칼 12세는 결혼도 하지 않아 자식도 없었기에(그리고 애시당초 만들 틈도 없었고) 왕위를 노린 세력도 있지 않았냐는 주장이 있다. 이 때문에 칼 12세의 죽음에는 논란이 많은 편이다.
어찌됬든 스웨덴 군대는 패배했고, 철수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칼 12세의 죽음으로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직 스웨덴이 겪어야 할 지옥은 많이 남아있었다!
(1) 토르스텐손 전쟁으로 빼앗긴 상태였다.
(2) 이 성로비는 야사, 소문에 불과하지만.... 전세에 비해 러시아쪽의 부담이 너무 적어서 이런 소문이 돌 법도 했다.
(3) 스웨덴 군대는 14000명, 연합군은 2만명 가량 되었으나 대포는 스웨덴군이 30문, 연합군이 13문뿐이었다.
(4) 프류트 원정 직전에 창설된 행정, 사법 담당 기구, 본래 임시기구이나 프류트 원정이 끝나고 상설화된다.
(5) 단 이 당시 헬싱키는 정말 사람이 없었던 곳이라 전염병으로 죽은 인구가 1185명 정도였다. 다만 이 1185명이 헬싱키 전체 인구의 66%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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