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그리아, 에스토니아 침공전>
- "빈집을 털어라!" -
그레고리우스력으로 1702년 1월(1) 스웨덴군이 폴란드쪽으로 몰려간 틈을 타 러시아 군대는 텅빈 에스토니아, 잉그리아 지역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러시아군은 에스토니아의 에라스트베레에서 소규모 스웨덴 군대를 격파해냈다. 이후 7월에는 에스토니아 남부에서 보리스 셰르메테프의 군대가 스웨덴군을 추가로 격파했고, 10월에는 표트르가 직접 뇌테보리(현재는 실리셀부르크라 불린다)요새를 공격했다.
- "나르바여. 나 표트르가 돌아왔소. 더 강해져서 돌아왔소!" -
뇌테보리 요새에 있던 스웨덴 군대는 고작 440명 정도였지만 러시아 군대는 만명이 넘었으며, 일단 뇌테보리를 포위한 후에는 속속 추가 병력들과 무기들이 도착했다. 보름 간 준비 및 포위를 끝낸 러시아 군대는 10월 22일 총공격을 개시, 뇌테보리 요새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이후로도 러시아 군대는 에스토니아, 잉그리아에 대한 공격을 1703년~1704년에 이르는 동안 계속 공격해, 1704년에는 베센베르크요새 및, 1700년 표트르의 러시아 군대가 대패했던 나르바 요새까지 러시아 군대의 손에 떨어졌다. 에스토니아의 상당부분과 잉그리아가 러시아군 손에 들어간 것이었다.
- "뒤통수가 좀 근질근질대네. 뭐. 나중에 처리하면 그만이지." -
다만 칼 12세는 이 상황에 그리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일단 폴란드와 작센을 확실하게 조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 해변에 서서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을 구상하는 표트르 대제 -
한편 1703년 5월. 표트르는 자신이 점령한 네바강 하류의 섬이 많은 습지대에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요새의 이름은 페트로파블로스크 요새였다. 당초 이 요새는 군사 요새로써 기획되었다.
그러나 표트르의 구상은 계속 바뀌었다. 불과 한 달 후 표트르는 페트로파블로스크 요새를 항구 도시로 쓰겠다고 선언했다. 발트해의 출입구로 이 신도시를 활용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구상도 오래가지 않았다. 1년후 측근 골로빈에게 보낸 편지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단순한 항구 도시가 아니라 러시아의 새로운 수도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표트르는 아예 천도까지 고려한 것이었다.
-"이거 쉽지가 않겠네. 아몰랑. 한 만명쯤 죽어도 상관없겠지." -
하지만 건설 작업은 쉽지 않았다. 일단 상식적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자리에 도시를 건설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섬들이 많은 이 습지대에 도시를 건설한다는 건 누가 봐도 미친짓이었다. 지반이 너무나 약해 쉽게 건물이 붕괴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기반을 다지는 작업이 우선시되었다. 기반을 단단히 다지기 위해 엄청난 양의 말뚝들이 박혔고(2), 돌도 엄청나게 사용되었다. 그 이외에도 기반을 다지는 작업이 엄청나게 진행되었다. 이런 작업들에는 농노들과 스웨덴 전쟁포로들이 많이 동원됬는데, 고단하고 위험한 공사과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더군다나 전쟁 중이었기에 건설이 빠르게 진행되는 것도 아니었다. 1708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부근에 스웨덴 함대가 출현하는 일도 잦았다. 공사가 본격화된 것은 1714년 간구트 해전에서 스웨덴 함대가 러시아 함대에 의해 대패한 이후였다.

-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화려한 모습. 하지만 이는 서서히 건설된 것이고 처음 건설 당시에는 그냥 습지대였다. -
문제는 표트르의 성격이 급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하루빨리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수도로 삼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두번째 부인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혼식을 가지고, 왕실 가족들을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으로 이주시키는 조치를 취하더니 1712년에는 아예 정식 수도로 선포하고, 1713년에는 입법 및 행정기관들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겼다. 그리고 말년인 1723년에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유해까지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서 수도임을 확고하게 선언했다.
<반란>
나르바 전투로 러시아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칼 12세가 폴란드 침공을 선택한 덕에 러시아는 전열을 재정비, 어느정도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과 새로운 수도 건설로 인한 세금 증가, 표트르의 잇따른 서구화 조치에 대한 반감 등으로 민심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곧 러시아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무엇이든지 해결해드립니다. 칼미크 용역!" -
첫 시작은 아스트라한이었다. 1705년 7월 볼가강 하구 아스트라한에서 정부가 강제로 러시아 여인들을 외국 남자들과 결혼시킨다는 소문이 돌았다. 곧 아스트라한에 공포와 반정부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7월 29일 무려 100쌍이 아스트라한에서 결혼식을 올리더니, 다음날 반란이 일어나 지방관을 포함 300명이 살해되었다. 반란군은 곧 차리친(3)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요청을 받은 칼미크족의 칸 아유카의 군대가 아스트라한으로 진격하자 후퇴했다. 곧 에스토니아 전선에 투입됬던 보리스 셰르멘테프의 군대까지 합류했고, 이듬해 반란은 진압됬다. 진압 후 350명이 처형당하거나 옥사했다.
그러나 여전히 민심은 술렁거렸다. 과도한 세금등을 피하려고 도주 농노들이 급증했고, 이들을 잡으려고 군대가 파견되었다. 그러다 1707년.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돈 코사크 내부 유력자였던 아타만(4) 불라빈이 도주 농노들을 잡으려던 군대를 괴멸시켰다. 곧 중앙군이 내려와 불라빈을 공격했고, 불라빈은 도주했다.
- "적그리스도인 차르를 몰아내자!" -
하지만 이듬해인 1708년 불라빈은 화려하게 귀환, 돈 코사크 전체를 장악했다. 불라빈은 차르인 표트르를 적그리스도라고 보았고, 따라서 모스크바로 진격, 적그리스도를 소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군대를 진격시켰다. 7월에 부유한 코사크족들이 불라빈을 죽이나 반란 자체는 1709년까지 계속되었고, 1710년까지 60여개 지역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그 외에도 코사크족 사이에서 러시아에 반감을 품은 사람들이 증가했다. 이는 대북방 전쟁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표트르가 무려 72개나 되는 추가세금을 요구하자 볼가강 상류에 살던 바쉬키르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오스만제국, 크림 칸국에 지원을 요청해가며 러시아에 오랫동안 저항했지만 1711년에 결국 제압당했다.
- 대북방전쟁 초기 전쟁 상황도 -
한편 러시아가 반란에 시달리는 상태에서 칼 12세의 군대는 폴란드를 착실하게 무너뜨리고 있었다.
(1) 스웨덴 전통 달력과 율리우스력으로는 아직 1701년 12월이었다.
(2) 나중 이야기지만 성 이삭 성당을 지을 때는 말뚝을 2만 4천개나 박았다고 한다. 기반을 단단하기 다지기 위해서였다.
(3) 지금의 볼고그라드
(4) 코사크 지도자 칭호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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