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란델베그 조약>
1700년 2월. 작센 선제후국의 군대가 동군연합 상태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영토를 지나 스웨덴이 점령하고 있던 리가를 포위한다. 그리고 한달 후 이번에는 스웨덴의 동맹국인 홀슈타인 고트프로프 공국의 영토인 퇴니히를 덴마크 군대가 포위한다. 스웨덴에 대한 전쟁, 즉 대북방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아직 러시아는 오스만투르크와의 조약 문제로 불참하였지만 작센-폴란드-덴마크는 재빠르게 스웨덴을 공격한 것이다.
- "자. 덴마크 놈들아. 꿇어라. 이게 너와 나의 차이다!" -
하지만 칼 12세는 만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일단 북유럽의 혼란을 원치 않는 영국과 네덜란드를 끌어들였다. 이 두나라는 스페인의 왕위계승문제로 유럽 전체가 어수선한 상황에서 독일 코앞인 홀슈타인에서 난리가 벌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스웨덴을 위해 함대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덴마크는 영국, 네덜란드와 전쟁을 치루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함대의 기동을 두 눈 뜨고 지켜만 보아야 했다. 그 사이 스웨덴 군대는 코펜하겐 근처 훔레벡에 8월 4일(1) 상륙했다. 스웨덴 군대는 저항하던 덴마크 수비대를 격파하고, 곧 추가 증원부대까지 상륙했다. 결국 덴마크는 미처 러시아가 선전포고를 하기도 전에 트란델베그 조약을 맺고, 대 스웨덴 전선에서 이탈해버렸다.
- "강...강하다.." -
하지만 칼 12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병력들을 배에 태웠다. 그는 일단 리가를 포위한 작센군대와 선전포고와 함께 나르바 요새를 포위한 러시아 군대를 몰아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전투 전야>
한편 덴마크를 이탈시킨 직후 프랑스와 브란덴부르크가 스웨덴에 평화를 제의하였다. 하지만 칼 12세는 거부하였고, 아우구스트를 박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리가에 도착했을 때 아우구스트는 리가의 완강한 방어 때문에 병력을 물린 지 오래였다. 대신 나르바 요새가 러시아군대에 의해 포위되었다는 소식이 칼 12세에게 전해졌다.
- "저 건방진 러시아 불곰들부터 조져놔야겠군." -
당연히 칼 12세의 진격 목표는 나르바가 되었다. 그는 먼저 베센베르크에 머무르면서 병력을 정비, 훈련시킨 후 나르바로 이동했다. 11월의 혹한으로 행군은 어려웠지만 저지하고 있던 러시아군 5천명을 퇴각시키고, 나르바 근처에 육박했다.
한편 이 무렵 표트르는 직접 나르바 포위군을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국내 내정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측근인 골로빈과 함께 전선을 이탈해버렸다.(2) 그를 대신하여 현재의 벨기에 출신 외국인 고문인 샤를 외젠 드 크루아가 지휘를 맡았다. 하지만 표트르는 자리를 비우면서도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그의 군대는 3만 7천여명 가량이나 된데다가 대포만 195문이었던 반면 스웨덴 군대는 그 수가 만여명 정도였고 대포도 30여문 정도였다. 더군다나 사전에 러시아 군대는 단단하게 진지도 구축해놓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표트르가 패배하기는 힘들어보였다. 하지만...
<대참패>
그레고리우스력으로 11월 30일(스웨덴 구 달력으로는 11월 20일) 스웨덴 군대는 나르바를 포위하며 세 개의 진영을 갖추고 있던 러시아 군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스웨덴 군대는 숫자가 적었던 반면 러시아 군대는 숫자가 많았기에 일련 이 행위는 자살행위인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스웨덴 군대는 잘 훈련된 정예병들이었지만, 러시아 군대는 아직 서구식 훈련이 제대로 안 된 오합지졸들이었다. 더군다나 외국인 장교들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기 때문에 러시아 군대는 외국인 장교들의 명령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전투는 러시아의 우세로 흘러가지 않고 지지부진하게 진행됬다.
다만 전투기 지지부진하게 진행된 가장 큰 이유는 눈보라 탓이 더 컸다. 그날 내내 불던 눈보라가 너무 거세서 러시아나 스웨덴이나 모두 전투에 크게 방해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다 오후 들어 바람이 바뀌면서 눈보라가 러시아쪽으로 불기 시작했다. 자연히 러시아측의 머스킷과 대포들은 시야가 방해받아서 제대로 조준되지 못했다. 그 틈에 스웨덴 군대가 맹공을 개시했다.

- 나르바 전투를 다룬 기록화 -
스웨덴 군대는 곧 러시아 군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왔다. 이들은 러시아 군대를 양분시키고,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직 오합지졸이었던 러시아 군대는 스웨덴 군대의 맹렬한 공격에 붕괴되었다.(3) 러시아 군대는 도주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도망치는 러시아군인들이 몰리면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 다리가 붕괴하는 바람에 상당한 수의 러시아 군인들이 물귀신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세 개의 진지 중 2개 진지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하지만 북쪽에 있던 진지는 그래도 표트르가 심열을 기울여 양성한 프레오브라젠스코예 근위연대와 세묜노프스키 근위연대가 지키고 있어서 금방 붕괴되지 않았다. 그들은 수레로 방어벽을 치며 나름 완강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다른 병력들이 모두 도망치고, 병력들이 붕괴되는 상황에서 이들 역시 곧 전의를 상실했다. 칼 12세가 수레 방벽을 부수기 위해 대포를 끌고 오자 샤를 외젠 드 크루아 등 대부분 장교들은 투항을 선택했다.
- "항...항복..." -
전투 결과 스웨덴 군대는 8천~만여명의 병력을 투입하고 겨우 667명이 죽었다. 반면 러시아 군대는 3~4만에 달하는 대군을 투입하고도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9천명 이상이 전사하고 2만명 가량이 포로로 잡혔다. 더군다나 이 포로들 중에는 총사령관 샤를 외젠 드 크루아 같은 고위급 장교도 포함되어있었다.(4) 더군다나 러시아 군대는 동원했던 모든 대포를 스웨덴 군대에게 빼앗겼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대참패였다.
<기사회생>
- "망.....망했다............ 말 그대로 탈탈 털렸어... 겨울이라 망정이지.. 우린 이제 대포 하나 없는데..." -
사실상 러시아 군대는 나르바 전투로 박살나버렸다. 200문에 가까웠던 대포가 한 문도 남김없이 노획당하고, 엄청난 수의 병력들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안 그래도 표트르의 서구화 정책에 불만이 많았던 민심은 폭발 일보 직전까지 갔다. 더군다나 겨울이 온 덕에 스웨덴 군대가 진격을 멈추었다고는 하지만, 봄이 된다면 병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러시아에 스웨덴의 군대가 밀어닥칠지도 몰랐다. 실제로 스웨덴 장교 일부는 러시아로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운명은 풍전등화인 듯 보였다.
거기에다가 이듬해 2월 러시아군 6천명은 페초리에서 러시아군보다 소수인 스웨덴 군대(5)와 충돌했는데 스웨덴 군대가 러시아 군대를 가볍게 격퇴했다. 이제는 답이 없는 것 같았다.
- "러시아 놈들은 무시해라! 우리는 일단 폴란드부터 조진다!" -
하지만 칼 12세는 이 때 훗날 꽤나 까일 결정을 했다. 그는 러시아보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폴란드와 동군연합인 작센 공국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그 쪽을 먼저 제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701년 7월 칼 12세의 군대는 리가로 간 뒤, 그 곳 근처 두나라는 곳에서 도강을 저지하기 위해 구축해둔 폴란드-작센-러시아 연합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폴란드 침공을 개시했다.
이는 폴란드에게 있어서는 재앙 그 자체였다. 그러나 러시아에게는 전열을 재정비할 찬스였다. 러시아는 교회의 종들까지 모조리 녹여서 대포로 만드는 등 군대를 재건하고, 재정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 몇 년 안되어 러시아 군대는 이전보다 훨씬 강해진 상태로 다시 나타나게 된다.
(1) 이 날짜는 그레고리우스력 기준이다. 율리우스력으로는 7월 24일이다. 스웨덴 구 역법 기준으로는 7월 25일이다.
(2) 이를 두고 훗날 표트르가 겁을 먹고 사전에 도망쳤다는 말이 나왔다.
(3) 스트렐치 부대들도 참여한 상태였는데 그들이 먼저 붕괴되었다고 한다.
(4) 크루아는 포로로 갇혀있다가 1702년 레발(탈린)에서 죽는다.
(5) 2100명이었다고 전해지는데 문제는 그 중 2천명은 현지 농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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