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조프 정벌> 1695년 성인이 된 표트르는 3만명의 병력을 아조프로 보냈다. 오스만 제국이 점유하고 있던 아조프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표트르 자신도 직접 참전했는데, 이 아조프 원정은 이전의 크림 원정 못지 않은 실패로 끝났다. 민심이 들끓었고, 이 모든 것이 표트르가 외국인들과 친하게 지내서라는 소문이 돌았다. 표트르는 이를 무시했다.
- "모두 겁내지 마라! 아조프는 반드시 우리 것이 될 것이다!" - 그가 생각하기에 아조프 공성의 실패 원인은 함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695년 겨울 내내 표트르는 아조프 공격에 쓰일 배들을 건조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 결과 이듬해인 1696년 29척 정도의 배가 완성되었다. 1695년 이반 5세의 죽음으로 단독 차르가 된 표트르 자신도 직접 함장 자격으로 참전한 가운데 벌어진 2차 공성전은 성공적이었다. 수륙합동 공세를 버티지 못 한 오스만 제국군은 패배했고, 러시아군대는 아조프에 입성했다. 표트르는 개선장군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차르에 대한 불만> 이와 별개로 러시아 국내에서는 표트르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다. 표트르의 종교 모욕, 거칠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행, 지나칠 정도로 친외국인적인 모습 등은 러시아 내에서 많은 불만자들을 양산해냈다.(1) 이런 불만자 중에 원래는 표트르에 호의적이었으며, 실제로 친하기도 했고, 어느정도 친서구적이기도 했던 수도사 아브라미가 있었다. 그는 1697년에 표트르가 오직 눈뜨고 봐줄 수 없는 놀이 및 쾌락, 불쾌한 짓들에만 빠져있다고 편지를 보내 그를 비판했다. 표트르는 분노하여 아브라미와 그 가족들을 유배보내버렸다. 그러나 아브라미는 귀양지에서도 계속 차르를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 "정부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드는데 확 뒤엎어버릴까?" -
또한 같은 해 스트렐치 대령인 이반 치클레르와 몇몇 보야르들이 표트르를 폐위하고 어린 아들 알렉세이를 옹립하고 소피아를 섭정으로 세우려는 음모를 세우다가 적발되었다. 이들은 모조리 처형되었다. 이렇게 불만세력을 정리하고 나서 표트르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유럽 여행이었다. <대사절단> 1697년. 내부를 어느정도 정리한 후 표트르는 18개월간의 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단은 레포르트와 골로빈(2)을 수장으로 했으며, 대투르크 동맹을 확고하게 할 목적을 띄고 있었다. 이 사절단에 표트르도 표트르 미하일로프라는 가명을 쓴 채 끼어있었다. 가명을 쓰기는 했지만 웬만한 사람들은 그가 표트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절단은 먼저 북독일로 가기 위해 리가로 갔다. 이 곳에서 리가 시장은 러시아인들에게 무례하게 대우했으나, 근처에 있던 쿠틀란드 공작은 이들을 잘 대접했다.
- "투르크? 그 놈들은 잘 모르겠고.. 일단 스웨덴놈들이 골칫거리인데 말이죠." -
배를 타고 간 그들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3)에 도착했고, 프리드리히 1세와 회담을 가졌다. 프리드리히 1세는 러시아 사절단들올 환영하고 잘 대우해주었지만, 정작 협상은 지지부진하다가 결렬되었다. 대투르크 동맹을 주장했던 표트르 및 러시아와 달리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대스웨덴 동맹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 표트르가 네덜란드 잔담에 있을 때 조선공으로 위장하고 머물렀다는 숙소. 현재도 박물관에 보존되어있다. -
이후 표트르가 간 곳은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 역시 러시아의 대투르크 동맹 주장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협상과 별개로 표트르는 목수로 위장하고 조선소에 들어가 배 만드는 법과 목공술을 배웠다. 문제는 위장이 잘 안 되어 모두가 그가 차르라는 것을 알고 구경꾼들이 몰렸다는 것이다. 이야기에 따르면 표트르는 이에 불만을 터뜨렸다고 한다. 사절단은 그 뒤에 영국으로 갔다. 표트르는 이 곳에서도 잘 되지는 않았지만 어찌 됬든 신분을 위장한 채 조선소에 들어가 배 만드는 법 등을 배웠다. 영국에서의 협상도 실패로 돌아갔지만, 성과가 없지는 않아서, 그는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러시아로 데려갈 조선소 기술자들을 다수 확보하였다. 그리고 에드먼드 핼리 등의 학자들도 만났다고 전해진다. 1698년 사절단은 빈으로 갔다. 그 곳에서 이들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 및 베네치아 사절단들과 회담을 가졌다. 오스트리아측의 환영과 별개로 이 곳에서도 회담은 지지부진했다. 신성로마제국과 베네치아는 평화 조약을 원했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투르크에 대한 전쟁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 "우리 한번 아침은 리가에서, 점심은 헬싱키에서, 저녁은 스톡홀름에서 먹어보죠. 어떠신가요?" -
당초 사절단은 빈에서 베네치아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빈에서 스트렐치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표트르는 베네치아 방문을 취소하고 폴란드를 거쳐 러시아로 귀환하기로 했다. 계속되는 거절 때문인지 이 무렵 표트르는 대투르크 전쟁에 대한 열정이 많이 식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중간 경유지로 들른 폴란드에서 아우구스투스 2세가 제안한 대 스웨덴 동맹 제안은 거부하지 않았다. <스트렐치 반란> 스트렐치들이 반란을 일으킨 전말은 이러했다. 아조프 원정 이후 표트르는 일부 스트렐치 연대들을 아조프로 보내 이 곳을 수비하게 했다. 이들 스트렐치 연대들은 당초 어느 정도 아조프에 있다가 모스크바로 귀환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모스크바로 돌아가지 못 하고 폴란드 국경지대에 재배치되었다. 이렇게 되자 스트렐치들 사이에서 불만이 들끓었고, 이 와중에 표트르그 스트렐치들을 해체할 것이고, 그들의 수도 귀환도 영영 무산될 거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아주 불가능한 소문은 아니었던게 1682년 반란의 충격 때문에 표트르가 스트렐치들을 굉장히 안 좋아한다는 건 이미 알 사람들은 다 알던 형국이었다. 이에 분노한 스트렐치들은 반란을 일으켜 모스크바로 향했다. 반란군은 소피아를 제위에 올리고 그녀의 연인 바실리 골리친을 복귀시킬 것을 결의하며 모스크바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반란 자체는 알렉세이 셰인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덕분에 표트르가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반란이 진압된 이후였다. 알렉세이 셰인은 표트르가 돌아오기 전에 나름 조사를 진행하여 죄질이 중하다고 판단한 57명을 처형했다. 하지만 표트르는 셰인의 조사와 그 결과에 불만이 많았다. 그는 자신이 직접 이 반란 사건을 재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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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역적 놈!" "나는 역적 아임메!" "역적 맞거든. 짐이 직접 죽여주마!" - 그 결과는 무지막지했다. 1182명의 스트렐치들이 처형되었고, 600명 가량이 추방되었다. 소문에 의하면 표트르 자신이 스트렐치들을 직접 처형시켰다고 전해진다.
- 일리야 레핀이 그렸다고 하는 유폐된 소피아를 그린 그림. 창문 바깥에 교수형당한 스트렐치의 시신이 보인다. -
참고로 연관되어있다고 추측되던 소피아는 완벽하게 수녀원에 유폐되고 강제로 수녀가 되었다. 소피아는 1704년에 죽었다. 그리고 이 사건에 연루됬다는 추측을 받은 표트르의 부인도 몇 달 후 강제로 이혼당하고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스트렐치들에 대한 해산 절차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개혁, 그리고 전쟁 준비> 한편 스트렐치 반란에 대한 처분까지 마친 후 표트르는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먼저 그는 몽골의 영향을 받은 러시아식 긴 턱수염을 금지하고 의복 개혁을 단행하여, 서구식 의복을 입을 것을 권장하기 시작했다. 수염의 경우 농부들 등 평민들이나 성직자 정도만 수염을 그대로 기를 수 있었고, 귀족들은 예외없이 수염을 기를 수 없었다. 만약 기를려면 소위 '수염세'를 지불해야 했다.
- "수염 깎지요!" "뭐! 이 놈들!" "허허. 세상 말세로구나." -
그러나 전통적으로 러시아는 수염을 기르지 않은 것을 음란하다고 보는 시각이 강했다. 이에 따라 반발이 엄청났다. 모스크바 총대주교는 아예 수염을 깎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표트르는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1699년에는 역법 개혁이 단행되었다. 그 동안 러시아의 역법은 천지창조를 기준으로 잡고 새해의 시작을 9월 1일로 잡았었다. 하지만 표트르는 다른 서구권 국가들처럼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삼고, 새해 시작을 1월 1일로 옮기는 역법 개혁을 감행하였다. 이듬해에 그는 아예 율리우스력을 도입했다.(4) 같은 해 폴란드 정부는 사람을 보내 러시아에 이전에 논의한 대스웨덴 동맹 체결을 논의했다. 이 동맹은 폴란드로 망명한 리보니아 사람인 파트쿨이란 자가 계획한 것이었다. 표트르는 이 동맹 조약을 체결했고, 덴마크, 작센-폴란드-리투아니아(5)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아직 카를로비치 조약이 체결된 이후로도 오스만제국과 세부적인 평화협상을 논의하느라 당장 스웨덴과 전쟁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표트르는 정중하게 스웨덴 사절을 대접하는 위장전술을 피기도 했다. 위장 전술은 성공적이라 당시 주 러시아 스웨덴 대사는 표트르에게 스웨덴에 대한 적대 감정은 전혀 없다고 보고했을 정도였다. 그러다 (그레고리우스력 기준으로)1700년 2월 22일. 아직 콘스탄티노플에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평화조약이 논의되고 있을 때 덴마크가 기습적으로 스웨덴에 선전포고했다. 몇 년전 막 즉위한 스웨덴의 소년왕을 얕보고 저지른 조치였다. 폴란드도 뒤따라 선전포고했다. 그러나 상황을 파악한 러시아가 오스만과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맺고, 아조프 영유권을 인정받은 후, 스웨덴에 선전포고 하려고 했을 때, 러시아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덴마크는 스웨덴 군대에 의해 코펜하겐이 포위당한 후 항복하여 전선에서 이탈해버린 상태였다.
- "짐을 어리다고 얕보지 말라! 이 놈들아!" -
이것이 어찌 된 영문이었는고 하니 스웨덴 군대가 선전포고를 듣자마자 국왕이 직접 재빠르게 군대를 움직여 코펜하겐을 포위해버렸던 것이다. 이 소년왕은 바로 칼 12세였다. (1) 나중 이야기지만 청나라의 관리 투리썬이 칼미크족에게 사신으로 가는 과정에서 만난 러시아 총독이 대놓고 그에게 표트르를 욕하며 강희제를 찬양했다고 전해진다. (2) 색액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은 그 골로빈이 맞다. 그는 표트르의 측근이기도 했다. (3) 아직 프로이센 왕을 칭하기 이전이다. (4) 문제는 21세기 현재에도 쓰이고 있는 그레고리우스력이 이미 만들어진 상태라 율리우스력도 시대에 뒤떨어져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당시까지는 네덜란드의 일부 주를 제외하면 카톨릭국가들만 그레고리우스력을 쓰던 시절이기는 하다. (5) 이 당시 작센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동군연합 상태였다. |
- 2015/05/25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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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그리고 이 그림상의 표트르는 어째 영화 "호빗"시리즈에서 바르드역으로 나올 당시의 루크 에반스를 닮은 듯. 나중에 표트르 대제역을 맡아도 되겠구만요.
2. 네덜란드에서 묵었던 집은 어째 전통적 러시아 목조 가옥하고도 비스무리한게, 같이 간 목수가 짓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3. 네덜란드 정부는 모른척 했지만 편의는 봐줬고, 영국 정부는 거의 차르인 줄 알고 신분에 걸맞게 대우해줬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그리고 장신에 얼굴에는 큼지막한 혹도 있고 힘도 장사인데 그걸 못 알아차릴 거라 생각한 표트르가 이상한거지...) 영국 체류중에는 스핏헤드에서 로열네이비의 함대 모의전도 시범으로 보여줬고, 고급 주택도 내줬다니 말입니다. 정작 표트르 일행이 떠난 뒤 그 집 들어가보니 걸려있던 그림들은 전부 사격연습표적이 되어 구멍투성이었고 집은 뭔 코사크족이 야영하다 떠나간 것처럼 엉망이었다고.
4. 역법 도입에 종교 개혁에 생활 문화 개혁에...러시아 정교회하고는 맨날 싸움의 연속이었지요. 나중에 결국 정교회를 국가 조직으로 끌어오는 것도 완성-이것도 포스팅 거리
5. 자 다음은!!!(거기까지) 항코, 나르바, 폴타바...
2. 확인이 필요한 데 아마 단순 숙소일걸요. 러시아인이 지은 건 아닐겁니다.
3. 글에서는 안 쓴 거지만 실제로 당시 영국 기록들 보면 "뭐 저런 무뢰배가 다 있냐!! 예의도 모르고 완전 개차반이잖아!" 그랬다지요.
4. 그것도 포스팅거리긴 합니다. 아예 모스크바 총대주교를 임명시키지 않는 짓거리를 저질렀죠. 결국 제정이 사라지고 나서야 부활한 모스크바 총대주교...
5. 일단 나르바 관광 열차부터 탑승하시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