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역사 이야기 26. 전쟁의 시대 공국 문화부 직할 역사연구소

<코사크 반란>


Flag of the Cossack Hetmanat

 

- 자포로제 코사크의 깃발 -

 

키예프 공국이 멸망한 후에도 우크라이나 지역에는 동방정교회를 믿는 슬라브족들이 많았다. 이들은 몽골족이나 쿠만족 등 유목민족들의 영향을 받아 반유목화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코사크족이었다. 이들은 여러 지역에 흩어져있었는데 자포로제 코사크로 알려진 우크라이나 지역의 코사크족들은 14세기 경 우크라이나로 확장해오던 리투아니아의 통제를 받게 되었는데 리투아니아가 폴란드와 동군연합하고, 1569년에는 아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 성립되면서 폴란드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코사크족들은 폴란드에 군사력을 제공해주었고, 대신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허나 폴란드와 코사크는 자주 충돌했다. 가장 큰 이유는 종교 문제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국가이긴 했지만, 왕실은 카톨릭교를 신봉했고, 카톨릭을 강요하는 경향이 강했다. 코사크족은 이게 싫었다. 특히 1596년에 일부 동방정교회 지역들이 브레스트 협정을 통해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받아들이며 동방 카톨릭 교회로 변해버리자, 이들은 두려움과 불만을 드러내기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1594년에 셰멘 날레바이코가 이끄는 반란(1)이 일어나기도 했고, 그 이후에도 간혹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다 1648년 사단이 일어났다. 코사크족의 족장이자, 과거 폴란드를 위해 여러번 종군한 적도 있던 보흐단 흐미엘니츠키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 반기를 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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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 살겠다 갈아엎자!" -


보흐단 흐미엘니츠키는 당초 그렇게까지 반폴란드 성향이 강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폴란드를 위해 싸웠던 적도 많았고, 1620년에는 몰다비아에서 폴란드 군을 위해 싸우다 오스만 제국의 포로가 된 적도 있었다.(2) 그런 그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브와디스와프 4세가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을 계획하면서, 협조를 얻기 위해 코사크족의 지위, 자치권등을 존중해주기로 약속을 했는데, 아들의 죽음으로 상심한 나머지 전쟁 계획은 연기되버리고, 이렇게 되자 존중은 커녕 오히려 코사크에 대한 종교적, 정치적 압력이 가중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반란을 결심했고, 원수인 크림 칸국과 결탁하기 까지 했다. 그 덕에 반란의 규모는 급속도로 커져나갔다. 이들을 진압하려던 윙드 후사르도 조브티 보디 전투에서 괴멸되었고, 1년 후 코사크족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휴전 조약이 맺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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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때가 된 것 같구나! 좋다! 복수의 기회다!" -


그러나 전쟁은 곧 재개되었고, 폴란드군은 반격을 가해 보흐단 흐미엘니츠키의 군대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1651년 보흐단은 러시아에 복속할테니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허나 폴란드와의 전쟁에 부담을 느낀 알렉세이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1653년 보흐단 흐미엘니츠키는 다시 한 번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다. 젬스키 소보르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알렉세이는 도박을 한 번 해보기로 했다. 그는 1654년 페레야슬라프 조약을 맺어 보흐단과 자포로제 코사크들을 신하로 받아들이고, 폴란드를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대복수>

 

 

- 대홍수 당시를 묘사한 지도. 초록색이 러시아,코사크 연합군의 진로다. -


이전까지 러시아는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오히려 연방이 성립된 이후에는 폴란드군이 러시아를 휩쓴 적도 많았다.하지만 코사크족의 대반란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내부가 엉망진창이 되면서, 러시아는 그 동안의 굴욕을 이자까지 쳐서 톡톡히 갚아주었다.

 

 

- "모가지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제대로 해라! 알았어?!!" -


1633년의 전쟁에서 끝끝내 함락되지 않았던 스몰렌스크가 단번에 함락되었다. 러시아군은오르샤 등 일부 지역도 추가적으로 점령하였고, 비쳅스크, 폴로츠크 등 주요 도시들이 러시아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1655년 초 폴란드 군은 크림 칸국과 동맹을 맺은 후 반격을 가해 오흐마토브 전투에서 러시아-코사크 연합군 기병대를 패퇴시키고 오르샤를 탈환했다. 그 소식을 듣자 알렉세이 1세는 전선의 사령관들을 닥달하는 편지를 보내 사기를 높이는 한편 추가적인 패배는 용납하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그 위협이 통했다.

 

보흐단 흐멜니츠키 코사크와 브란덴부르크, 모스크바, 스웨덴 연합이 점령한 표시.

 

- "동란의 시대때 당해왔던 고통을 너희도 당해봐라! 폴란드 이것들아! 하하하하! 이것이 러시아의 힘이다!" -


러시아 군은 추가적인 대공세를 벌였고 이 공세는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7월 3일 민스크가 함락되었고, 7월 31일에는 리투아니아의 중심 도시 빌뉴스까지 러시아군에게 점령되었다. 8월에 이르러서는 리투아니아의 주요 도시인 카우나스까지 러시아군에게 넘어갔다. 우크라이나 방면에서도 코사크군과 러시아군은 큰 성과를 거두어 9월에 루블린까지 점령했다. 동란의 시대 모스크바까지 함락당했던 치욕을 톡톡히 되갚아주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폴란드를 둘러싼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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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놈들이 다 먹게 두어서는 안 되지. 우리도 슬슬 나서볼까?" -


이걸 지켜본 스웨덴의 왕 카를 10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 선전포고를 감행하고,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마침 왕실의 카톨릭 강요에 불만을 품던 야누쉬 라지비우를 필두로 한 리투아니아의 개신교도 귀족들이 모조리 스웨덴 편에 붙었다. 이들은 리투아니아를 폴란드에서 분리시키고 스웨덴 리투아니아 연합을 이루기로 스웨덴과 합의했다. 이런 대대적인 배신과 러시아의 침공으로 북부 지역을 방비할 병력이 거의 없었던 폴란드의 내부 사정으로 인해, 스웨덴군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휩쓸었다. 1655년 10월 카를 10세는 바르샤바를 점령했고 당시 폴란드 왕인 얀 2세는 서둘러 남쪽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카를 10세는 스스로 폴란드 왕을 칭했다.

 

 이걸 지켜보던 러시아는 죽 쒀서 개 준 꼴이 된 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들이 힘들게 싸우고 있는 동안 스웨덴은 별 손실 없이 상당한 영토를 차지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러시아군도 상당한 지역을 점령했지만, 스웨덴 군대는 자국을 30년 전쟁에서 승리하게 한 당대 최강의 강군이었고, 그들이 별 손실도 없이 많은 영토를 점령한 상황이었기에, 당혹감을 나타내기에는 충분했다. 알렉세이 1세는 바로 폴란드와 휴전협정르 맺고, 대신 스웨덴을 침공하여 리가를 포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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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56년 리가 공성전을 다룬 그림 -

 

 그러나 스웨덴군은 폴란드 군과 차원이 달랐다. 더군다나 러시아는 당시 발트해로 향하는 출구가 존재하지 않았기에(3) 해군이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스웨덴이 해상으로 리가시에 병력과 물자를 보급하는 것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리가 포위는 러시아의 패배로 끝났다. 결국 1658년 발리에르사리 휴전조약을 통해 러시아는 스웨덴의 영토를 그대로 인정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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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놈들도 다를 게 없군. 좋아. 스웨덴이라면..." -

 

 한편 러시아가 폴란드와 동맹을 맺자, 보흐단 흐미엘니츠키는 이를 배신으로 간주했다. 마침 카를 10세는 이런 그의 심정을 알고 러시아를 배신하고 자신과 손을 잡자고 제의했고, 그는 이를 승낙했지만 1657년 8월 급사하는 바람에 이뤄지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가 된 이반 비호프스키는 하차지 조약을 맺어 폴란드와 화해하고, 러시아를 공격했다. 러시아가 발리에르사리 휴전조약을 맺은 것도 이런 상황과 연관이 있었다.

 

 자포로제 코사크, 크림 칸국, 폴란드 연합군은 1659년 6월 말 코노토프 마을을 포위하던 러시아군을 공격했다. 6월 29일에 벌어진 코노토프 전투에서 연합군은 러시아군을 유인해 괴멸시켰다. 러시아군은 도망치는 과정에서 그 전날의 비로 수렁이 된 지역을 지나야했고, 그 수렁을 지난 후에도 기병대의 추격을 받아 상당수의 병력과 물자를 상실하는 대패를 당했다. 하지만 연합군의 반격은 이게 끝이었다. 곧 러시아군은 반격을 가해 치히린에서 이들을 격파했다. 자포로제 코사크들은 그 틈을 타 이반 비호프스키를 쫓아내고 친러시아성향의 유리란 인물을 족장으로 앉히고 다시 러시아에 붙어버렸다.

 

 

- 쳉스토호바의 검은 성모 마리아 -

 

 

 한편 폴란드는 멸망 일보 직전까지 몰렸지만 쳉스토호바 수도원(4) 및 단치히가 스웨덴 군대를 상대로 버텨내면서 폴란드는 다시 사기를 되찾았고, 마침 덴마크, 네덜란드, 신성로마제국이 폴란드를 구원하기 위해 참전을 선언하고, 프랑스까지 스웨덴을 견제하기 시작하면서 반격을 개시하였다. 각지의 저항군과 외부의 지원 덕에 폴란드는 바르샤바를 탈환했지만, 국토가 워낙 피폐해졌던지라 1660년 올리바 조약을 맺어 스웨덴 왕위 주장을 포기하고, 프로이센의 독립을 인정하는 선에서 전쟁을 끝냈다. 그 후 폴란드는 대 러시아 전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대홍수의 끝>

 

 폴란드 군대의 반격은 매우 거셌다. 폴론카 전투에서 폴란드 군대는 윙드 후사르의 반격으로 러시아군을 패퇴시켰고, 츄드노프 전투에서는 3만명의 러시아군 중 절반에 가까운 12,500명을 포로로 잡는 성과를 거두었다. 1661년에는 빌뉴스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에게 점령되었다.

 

 러시아는 얼른 카르디스에서 스웨덴과 평화조약을 맺어 측면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폴란드 군대는 1663년 대대적인 공격을 펼쳐 우크라이나 지역 다수를 탈환했다. 하지만 1664년 글루호프 공성전에서 패배하고 물러났다. 이후 전쟁에 지칠대로 지친 양 쪽은 평화협상을 벌였지만, 그 사이에도 소규모 교전은 벌어졌다. 그러나 폴란드의 귀족 루보미르스키가 1667년 반란을 일으키자, 사정이 급해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드네프르강 동쪽 지역과 스몰렌스크를 러시아에 영구히 넘기고, 키예프를 러시아가 2년간 점령한다는 내용의 안드루소보 조약을 맺었다. 물론 러시아는 1669년이 지나서도 키예프를 내놓지 않았다.

 

 

- 대홍수가 지나간 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 잃은 영토. 폴란드는 이 기간동안 인구의 1/3과 영토 다수를 잃었다. 특히 우크라이나 일대와 스몰렌스크 상실, 프로이센 독립은 뼈아픈 손실이었다. -

 

 사실상 이 전쟁은 질질 끌기는 했지만 러시아의 승리였다. 비록 몇 차례 세게 얻어맞았지만 한 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중심도시 중 하나이자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를 점령하고, 연방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으며, 실제 조약에서도 엄청난 영토를 뜯어내었다는 점은 큰 성과라 할 수 있었다. 이 전쟁은 이제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과 러시아간 국력의 우위가 역전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한번도 러시아에 우위를 보인 적이 없었고, 끌려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 

 

<스텐카 라진>

 

 

- 스텐칼 라진의 초상화 -

 

스텐카 라진은 1630년 경 돈 코사크족 내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그가 공식 기록에 나타난 것은 1660년 돈 코사크와 칼미크족 간 외교 문제를 다룬 문서에서 언급되는 것이 최초였다. 이후 그는 한동안 기록에 보이지 않다가 6~7년 후 모습을 다시 드러낸다. 바로 무법자로써.

 

 

- 카스피해를 항해하는 스텐카 라진과 그 부하들 -

 

 그는 1666년~166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다수의 도주 농민들 및 빈민층, 코사크 족들을 끌어모았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오랜 전쟁으로 인한 세금 인상 및 귀족들의 착취, 정부의 경제 정책 실패 및 억압으로 인해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오랄로 불리는 야키트로 가 그 곳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는 1668~1669년 8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러시아인들의 옛 조상들이 가끔 벌였던 짓을 다시 한 번 벌였다. 배를 타고 카스피해를 건너 페르시아를 약탈한 것이다. 전해지는 전설에 따르면 이 때 그는 페르시아의 공주를 사로잡았는데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문제는 공주가 너무 예뻐서 무리 내에서 분란이 생길 지경까지 갔다는 것이었다. 그걸 안 스텐카 라진은 카스피해 위에서 사랑하는 공주를 던져버리고 우리 사이에서 분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외쳐 분란을 가라앉혔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는 창작이고, 실제로 벌어진 일은 아니다.

 

 원정에서 돌아온 그는 곧 알렉세이 1세가 보낸 사면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부했다. 오히려 이듬해인 1670년 돈 코사크의 수장이 되자 바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군대는 아스트라한과 볼고그라드 등 볼가강 일대를 휩쓸었다. 그는 전 러시아 백성들에게 억압과 착취가 없는 삶을 만들어주겠다고 외쳤고, 이는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그의 군대는 사라토프와 사마라까지 점령했고, 삽시간에 20만명으로 늘어났다. 그의 휘하에는 모르도바인, 바슈키르인들 같은 소수민족들도 다수 섞여있었다. 그는 아스트라한에 거점을 두고 코사크 공화국을 세우고자 했으며, 하층민들을 괴롭히던 귀족들과 부자들을 살해하며, 심비르스크를 포위하고, 병력들을 나누어 모스크바로 진격시켰다.

 



 

- 형장으로 끌려가는 라진과 그의 동생을 그린 그림 -

 

 하지만 모스크바 정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러시아는 병력을 편성해 즉각 반격에 나섰다. 잘 훈련되어있던 러시아 정규군은 숫자만 많았지 오합지졸에 가까웠던 반란군들을 각개격파했고, 심비르스크에서 스텐카 라진의 주력군도 패퇴시켰다. 스텐카 라진은 도주했다가 1671년 초엽에 그와 그의 동생은 평소부터 아니꼽게 보던 코사크족 수뇌부에 의해 포박된 후 정부군에 넘어갔다. 그는 모스크바로 끌려가 고문을 받다가 1671년 6월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는 민중의 영웅으로 러시아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를 칭송하는 노래가 만들어졌고(5) 각종 민담에서는 그를 영웅으로 묘사했다. 사실 팍팍했던 러시아 민중들의 삶을 생각하면 그럴만도 했다. 다만 러시아 민중들의 고단한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 대장 불리바가 이 때를 배경으로 했다.

 

(2) 이 사건은 주키에브스키가 전사한 1620년의 비극적인 몰다비아 원정을 말하는 것이다.

 

(3) 동란의 시대 때 발트해로 향하는 유일한 출구 잉그리아를 상실한 상태였다.

 

(4) 콘스탄티노플에 있다가 14세기에 운반됬다는 검은 마리아란 유명한 그림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있다. 실제로 이 그림 덕에 첸스토호바 수도원이 이길 수 있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5) 페르시아 공주에 대한 이야기도 이 민요에 기반한 전설이다.


덧글

  • 앨런비 2015/02/08 22:26 #

    저 때에 러시아군이 트롤킹 비타우타스의 무덤을 파해쳤다던데.
  • 로자노프 2015/02/08 23:40 #

    그것까지는 몰랐는데... 복수로군요. 과거 러시아를 괴롭힌데 대한 복수....
  • 앨런비 2015/02/09 07:56 #

    뭐 나도 리투아니아 역덕에게 들은 야그. 참고로 민좆주의자 역덕은 아니었음.
  • 토나이투 2015/02/09 13:06 #

    패르시아 공쥬는 차캐습니다

    하지만 라진이 물에 빠쳐 주겼습니다
    라진을 주깁시다 라진은 공주의 원쑤 ㅠㅠ
  • 로자노프 2015/02/09 21:42 #

    그러고 보니 공주만 불쌍하네요.
  • ㅋㅋㅋ 2015/02/09 16:13 # 삭제

    오오! 드디어!!
  • 로자노프 2015/02/09 21:42 #

    드디어라면 연재 재개를 의미하시는 건가요? 그거라면 드디어 재개했습니다!
  • ㅋㅋㅋ 2015/02/09 23:27 # 삭제

    표트르 1세 내용이 궁금해지는군요. 제일 유명한 전근대 러시아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어째 행적은 거의 아는게 없던...
  • 위장효과 2015/02/10 07:48 #

    어느 책에서의 표현은:

    하룻밤을 같이한 스텐카 라진이 "뼈가 녹을 거 같다!"라고 하는 것을 보고 부하들이 걱정하기 시작했다. 부하들의 걱정을 들은 라진은...(이하생략)

    뭔가 상당히 므흣한...내용입니다요.

    보흐단에 스텐카 라진에...표트르 대제 등극하기 전 역사를 장식한 영웅들이 대거 출현한 이번회였군요.
  • 로자노프 2015/02/10 15:58 #

    흠... 그 책이 궁금해지는군요.
  • 괴이공간 2015/02/11 13:33 # 삭제

    뭐 페르시아 공주님에 대한 성적 판타지(?)는 알렉산더 대왕 이래로 페르시아 주변국들의 유구한 전통인 것 같습니다.
    시아파 12이맘 역시 사산왕조 마지막 공주님으로 페르시아 황실 혈통이 들어 있다는 전설이 있으니.
  • 로자노프 2015/02/11 16:14 #

    아무래도 페르시아가 미치던 영향력이란게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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