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역사 이야기 18. 미치광이 이반 공국 문화부 직할 역사연구소

<광기의 전조>

 

 

- "내 아내를 죽인 놈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


 

 1560년. 황후 아나스타샤 로마노프가 죽었다. 황제는 이듬해 상당한 미인으로 소문난 카바르다족 출신 여인 마리아 템류코비나(1)와 결혼했지만 아나스타샤를 잊지 못했다. 특히나 그는 아나스타샤가 독살당했다고 믿었고, 실베르테르나 아다셰프 같은 그의 측근들도 연관되어 있다고 믿었다.


 바로 숙청이 시작됬다. 실베르테르는 쫓겨났고, 아다셰프는 감옥에 갇혔다가 옥사했다. 그 외에도 많은 측근들이 체포되었다. 더군다나 1564년 초엽. 울라 전투에서 4~6000명 정도의 소규모 리투아니아군이 2만이 넘는 러시아군에게 기습을 가해 총사령관 표트르 슈이스키를 전사시키고 다수의 러시아군을 패주시켰는데, 이 사건 이후 이반 뇌제의 의심병은 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이반 4세가 이 패배의 원인을 신하들의 음모 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꼴을 보던 차르의 측근 안드레이 쿠릅스키는 자신에게도 숙청의 칼날이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휘하의 군대도 버린 채 아들과 함께 리투아니아에 항복해버렸다. 그는 리투아니아군을 지휘하게 됬으며, 동시에 이반 4세를 비난하는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 이반 4세 역시 그 편지를 맞받아치는 편지를보냈다.(2) 그와 별개로 최측근의 배신은 이반 뇌제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 알렉산드로프의 현재 모습 -


 

 1564년 12월. 이반 4세는 자신의 가족들 및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뜬금없이 모스크바에서 좀 떨어진 알렉산드로프란 소도시로 떠났다. 그리고 이듬해 1월 모스크바 대주교에게 이반이 보낸 두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첫번째 편지는 보야르들 때문에 도저히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며 차르에서 물러나겠다는 내용이었고, 두번째 편지에는 일반 시민들에게는 악감정이 없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초유의 사태에 기겁한 귀족, 성직자, 시민들은 얼른 대표단을 꾸려 알렉산드로프로 보냈고, 그곳에서 차르를 만났다. 이반 4세는 '자신이 반역자들을 처벌하고, 죽일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고 거기에 딴 말 하지 말 것, 그리고 이를 수행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 수 있게 할 것'이란 조건을 복귀 조건으로 내걸었고, 대표단은 울며 겨자먹기로 이를 승인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이반 뇌제는 거리낌 없이 '오프리치니나'를 만들기 시작했다.(3)


 <오프리치니크-차르의 사냥개>


 오프리치니나를 만들기 위해 반포된 법령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법령을 제외한 많은 것들이 전해지는데 가장 특이한 사항은 이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상당한 양의 토지가 이 조직에 소속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러시아의 국토는 기존 보야르들의 영지인 젬스나와 차르의 조직 기반이 되는(사실상 차르의 직할령) 오프리치니나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오프리치니나에 소속된 원래 지주들은 군말없이 땅을 내놓아야 했다.

 

 

- 오프리치니크를 묘사한 조각 -


 

 이 오프리치니나에 소속된 인원들이 바로 오프리치니크였다. 천여명으로 시작한 이 조직은, 지방 귀족 출신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었고,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말을 타고 다니며 개의 머리나 빗자루를 말 안장에 매달았다. 주요 거점은 알렉산드로프였고, 이들은 그 곳에서 새벽에 일어나 기도한 후 죄수들을 고문하거나 처형하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그 이외에도 보야르들이나 기타 차르가 싫어하는 자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일을 전담하였다. 증거가 없더라도 일단 차르가 그를 역적이라고 확신한다면 오프리치니크들이 들이닥쳐 그를 체포하고, 고문한 후 재산을 빼앗고, 추방하거나 죽였다. 


 일단 처음에 이들에게 당한 사람들은 쿠릅스키와 연관된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말그대로 아무나 붙잡고 죽이거나 고문하고 다녔다. 이들은 1569년 한때 차르 후보로 거론되었던 블라디미르와 그의 가족들을 죽여버리는 데에도 관여했다. 이반 4세는 이들이 사람들을 고문하는 것을 거의 매번 지켜보았다고 한다. 이들은 곧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 "대주교라고 예외는 없수. 죽어야 겠수다." -

 


 이 꼴을 보다못한 일부 귀족들이 1566년 잔혹 행위들을 중단해달라고 청원했다. 하지만 차르는 주동자들을 처형한 후 나머지는 혀나 팔, 다리를 자른 채 석방했다가 며칠 후 다시 체포해서 죽여버리는 것으로 응답했다. 1568년에는 모스크바 총대주교 필리프가 오프리치니크를 공개석상에서 비판하고 잔혹행위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가 감금되었고, 곧 오프리치크의 일원이었던 말류타 스쿠라고프에게 살해되었다.(4)


 하지만 이들의 잔혹행위가 절정에 달한 것은 1570년의 노브고로드 대학살 때였다. 당시 노브고로드는 리보니아 전쟁으로 인한 무역 침체와, 과중한 세금 부담으로 민심이 흉흉했는데, 이를 안 이반 뇌제가 노브고로드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내통했다고 확신해버린 것이었다. 특히 불평분자 수천명을 노브고로드에서 추방시킨 직후 누군가가 노브고로드가 폴란드와 내통한다는 투서를 보내는 바람에 확신은 더욱 커지고 말았다. 당시 오프리치니크 내 유력자였던 비아젬스키 공작은 너무 막나간다고 생각했는지, 이반 뇌제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되려 모함을 받고 도주해야 했다. 결국 1569년 12월, 스트렐치들과 오프리치니크들이 포함된 15,000명의 군대가 노브고로드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1월 노브고로드에 도착한 이들은 영문도 모른채 차르가 왔다며 성문을 연 노브고로드인들을 마구잡이로 잡아죽이기 시작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많은 건물들이 불타고, 사람들은 강물에 던져져 죽거나, 기타 여러가지 방법으로 살해되었다. 피해 규모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충 만여명 이상이 이 때 학살되었다. 노브고로드 대주교는 모스크바로 끌려가 고문을 받다 죽었다. 참고로 학살은 노브고로드에서만 끝난게 아니라 프스코프에서도 벌어졌다. 이반의 광기, 그리고 이반 뇌제의 눈에 들려는 자들에 의해 수많은 무고한 인명이 희생된 것이었다.

 

 

- "악마가 온다! 피해!" -

 


 이런 식으로 1572년에 이르러 오프리치니나는 러시아 절반이 넘는 토지를 보유하게 되었고 오프리치니크도 6천명에 달하였다. 하지만 너무 폭력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는지, 이반 뇌제는 이 해 전격적으로 오프리치니크를 해산했다. 아 물론 토지는 그대로 가졌고, 귀족들에 대한 숙청은 계속되었다.


 <리보니아의 혼란>


 1561년 리보니아 기사단이 해체되면서, 리보니아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외셀섬과 비크 섬을 점령한 덴마크, 레발을 점령하고 에스토니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던 스웨덴, 나머지 지역 전체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던 리투아니아와 이제 다투게 된 것이었다. 

 

 

 - "칼마르 연합을 재건할 시간이다!" -


 

 다만 덴마크는 외셀섬과 비크 섬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562년 덴마크와 러시아는 모쟈이스크 조약을 맺어, 리보니아에서 양측의 권리를 인정하기로 하였다. 이 무렵 스웨덴은 리보니아 전체를 집어삼키려고 시도했는데, 이 과정에서 폴란드와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화친을 위해 폴란드 왕 지그문트의 여동생을 스웨덴 왕 에릭 14세의 동생 요한과 결혼시키기로 했는데, 요한이 에릭 모르게 12만 탈러를 지그문트에게서 지급받고 몇개의 성을 얻은 것이 확인되자, 에릭이 요한을 체포해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지그문트는 바로 뤼베크와 덴마크와 동맹, 스웨덴을 공격했다. 특히 덴마크는 이 기회에 칼마르 연합을 재건하려고 했고, 아주 적극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결국 스웨덴은 1564년 도르팟 조약을 맺어, 7년간의 휴전과 에스토니아 지역의 영유권을 일시적으로 인정받는 대가로 러시아와 휴전을 했다. 이 무렵 러시아는 폴로츠크를 점령하는 등 나름 기세등등하게 날뛰던 시절이었다. 비록 울라 전투에서 크게 한 방 얻어맞기는 했지만, 리투아니아는 별 다른 여력이 없는 상태라 폴로츠크 탈환도 시도하지 못했기에 전쟁은 계속 러시아에 유리한 상태였다.


 결국 1566년, 리투아니아가 모스크바에 사신을 보내 평화협상을 애걸했다. 그러나 이반 4세는 리가를 포함한 리보니아 전체를 내놓으라며 강짜를 부렸다. 문제는 리가는 리투아니아가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할 곳이었고, 아직까지 리투아니아의 통제권 안에 있던 지역이라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은 리투아니아는 당연히 요구를 거부했고, 협상은 결렬됬다. 다만 양쪽 모두 결정타를 날릴 능력이 없었기에 전쟁은 대치 상태를 이어갔다.

 

 

- "아니 저 미치광이가 왜 날 멀쩡한 남편 곁에서 떼어놓으려는거야!" -


 

 한편 에릭 14세를 쫓아내고 왕이 된 요한 3세가 1569년 러시아에 사절단을 보냈다. 스웨덴 사절단은 이반에게 노브고로드 지사를 '스웨덴 왕의 형제'로 예우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이들은 이 요구를 거부했다. 그리고 옷과 돈, 먹을 것등을 빼앗기고 발가벗은채 길거리를 걷는 모욕을 당하게 되었다. 이듬해 스웨덴은 다시 사절단을 보냈지만 이번에는 접견도 거부당했고, 일방적인 통보만 받았다. 이 통보문에는 핀란드의 은광을 내놓을것, 이반을 스웨덴의 군주로 받아들일 것, 에스토니아를 포기할 것, 1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할 것, 요한의 아내인 폴란드 공주 카타르지나(5)를 내놓을 것이란 내용이 담겨있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상황이 그렇게 불리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이런 요구는 대놓고 상대방을 무시하고, 깔아뭉개는 행위였으며, 굉장히 비이성적으로 보일 행동이었다. 마침 덴마크와의 전쟁도 끝냈던 요한 3세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기에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한다. 스웨덴은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러시아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이반은 자기에게 복속하기로 한 덴마크 왕자 마그누스를 리보니아 왕으로 임명한다. 


 <타타르의 침공>

 

 

 

- 러시아 남쪽 국경지대를 묘사한 그림 -


 

 1568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칼리프 셀림 2세는 러시아가 리보니아에 발목을 잡힌 틈을 타 러시아를 공격하기로 했다. 목표는 볼가강을 장악하고, 볼가강과 돈강을 건설하는 운하를 파는 것이었다. 7만에 달하는 오스만-크림 군대는 아스트라한으로 진격했지만, 3만명밖에 안되는 러시아 군대가 이들을 격퇴하고, 몰살시켰다. 양측은 아스트라한에 이슬람 상인들이 무역을 하되, 러시아의 아스트라한 영유권을 인정하는 평화조약을 1570년에 체결했다.


 하지만 암만 생각해도 오스만 제국과 크림 칸국 입장에서는 이것이 치욕적이었다. 이들은 치욕을 갚아줄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크림 칸국은 노가이족까지 끌어들여서 8만명이나 되는 병력을 긁어모았고, 오스만제국도 예니체리들을 포함한 4만명의 병력을 지원했다. 이 12만 대군은 1571년 5월 크림 칸국의 칸 데블렛의 지휘 하에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리보니아 전쟁, 기근, 전염병, 노브고로드 대학살의 후유증 등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러시아의 상황때문에 이들은 러시아가 건설한 남부의 요새망들도 아주 손쉽게 통과하고 2달도 안 되서 모스크바에 당도했다.


 차르는 알렉산드로프로 도망쳤고, 모스크바는 함락되었다. 오스만-크림-노가이 연합군은 모스크바를 불태우고, 약탈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도망치다가 모스크바 강에서 익사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살해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일설에 의하면 이 때 노예로 끌려간 사람이 십만명을 넘는다고 한다. 이틀간의 약탈이 끝난 후 연합군은 유유히 철수했다.



 

 

 

- 16세기 후반~17세기 초반 러시아 보병대 그림. 1번은 라지빌 공작의 스트렐치, 2번은 모스크바 스트렐치, 3번은 우크라이나 코사크 머스킷총병이다. -




 그러나 이 때의 대성과로 러시아를 만만하게 여긴 크림 칸국은 다시 한 번 러시아 남부를 접수할 계획을 꾸몄다. 이듬해 7월 크림 칸국은 다시 한 번 12만 군대로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번에 남부 지역 방어를 든든하게 꾸몄다. 이들은 모스크바 남쪽 몰로디에서 7만명의 병력을 대기시키고, 공격에 대비했다. 결국 몰로디 전투에서 크림 칸국의 군대는 대패하고 쫓겨났다. 일단 양쪽 모두 더 이상 전쟁을 할 여력은 없었기에 양쪽 모두 전쟁을 끝내기로 합의했다.


 <좋은 시절도 한 순간>


 1570년 스웨덴과의 전쟁이 재개되자, 러시아군은 에스토니아를 휩쓸었다. 레발은 함락하지 못했지만 다른 지역 대부분은 러시아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크림 칸국과의 전쟁으로 잠시 전쟁은 소강 상태를 보이는 듯 했지만, 1572년 러시아 군대는 핀란드까지 공격해 헬싱키에 육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1573년 로데 전투에서 스웨덴 군은 러시아 군대를 대패시켰다.


 보복으로 러시아 군대는 바이센슈타인 요새를 점령하고 스웨덴 지휘관을 산채로 불태워 죽여버렸다. 분노한 요한은 덴마크에게서 전쟁 자금을 빌리고 대규모 용병대를 고용해 1574년 1월, 바이센슈타인을 공격했지만 용병들간의 갈등, 추운 날씨로 인해 실패했다. 결국 1575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 1577년 경까지의 리보니아 상황. 색칠된 지역은 맨 오른쪽 지역만 제외하고 전부 러시아군이 점령한 상태였다. -

 

 


 한편 1569년, 더 이상 자체 국력으로 러시아를 상대하기 버거워진 리투아니아가 폴란드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폴란드는 리투아니아와 좀 더 강력하게 결합해야만 된다고 답변했고, 결국 루블린 조약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탄생했다. 하지만 연방이 탄생하고도 아직 러시아를 상대하기는 시기상조라, 1570년 양 측은 3년간의 휴전에 합의한다.

 

 그런데 1572년에 연방의 왕 지그문트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었다. 졸지에 야기우웨어 왕가의 핏줄이 단절됬고, 폴란드 귀족들은 선거를 통해 왕을 뽑기로 결정했다. 이 와중에 리투아니아 귀족들 중 일부가 이반 4세와 접촉해, 그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으로 앉히겠다고 제의했다. 이반 4세는 이 요구에 대해 그 전에 먼저 키예프를 러시아에 할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실상 이성을 상실하고 말도 안 되는 제의를 반복해온 이반 4세 입장에서야 당연해보이는 요구였겠지만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요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협상은 결렬됬고, 프랑스의 왕자 앙리가 헨리크란 이름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 된다. 하지만 형인 샤를 9세가 죽자 헨리크는 폴란드에서 도망쳤고(6) 폴란드로의 복귀를 거부해 자동적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됬다.

 

 

- "그동안 재미있었지?" -

 

 

 이렇게 되자 계승을 둘러싸고 트란실바니아 대공 스테판 바토리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가 서로 대립하였다. 개신교 귀족들의 도움으로 스테판 바토리가 선거에서 이겨 폴란드 왕이 되었으며, 러시아, 한자 동맹의 지원을 받았던 막시밀리안 2세는 이 결과를 뒤집어보려고 했지만 실패하였다. 그의 권위는 급속도로 안정되었다.

 



 

- "이 꽉물고 기다려라. 형이 간다!" -

 

 그리고 러시아는 좋은 시절이 다 끝나게 되었다.


(1) 카바르다족은 카프카스 산맥 지역에 거주하던 소수민족이었고, 당시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다만 오스만 제국의 위협때문에 이반 4세 쪽에 붙어 그들의 안전을 도모하려고 했고, 이 과정에서 정략결혼의 일환으로 족장의 딸인 마리아가 시집을 간 것이었다. 참고로 그녀 역시 이슬람교도였지만 결혼 전에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했다.


(2) 이 편지를 통한 논쟁은 15년간이나 지속됬으며, 러시아 역사 및 문학에서 나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쿠릅스키는 이반을 마치 신인 마냥 행동하며, 군주의 권력은 신이 주신게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이반 4세는 군주의 권력은 신이 주신 것이라고 주장하며 맞섰다. 양쪽 다 성경 구절을 인용했는데, 쿠릅스키는 성경 구절에 대해 이반이 해박하다는 건 인정하면서도 용례를 너무 이상하게 쓴다고도 비판했다고 한다. 


(3) 일설에 의하면 당시 황후인 마리아가 오프리치니크 창설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한다.


(4) 필리프는 훗날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말류타는 승승장구하는 듯 했지만 4년 후 병으로 죽었다. 


(5) 이반이 한때 그녀와 결혼하는 안을 추진했기 때문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요구가 나온 것이었다.

 

(6) 애시당초 앙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에 별 관심이 없기도 했고, 즉위 직후 폴란드 귀족들의 압력으로 강제로 왕권을 제한하는 헨리크 조항을 인정해야 했으니 더더욱 가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덧글

  • 앨런비 2014/09/13 22:03 #

    리투아니아 하나만도 벅찬데 폴란드가 추가요(...)
  • 로자노프 2014/09/13 22:05 #

    그리고 다음 편은 다굴빵...
  • ㅋㅋㅋ 2014/09/13 23:18 # 삭제

    웡훗은 언제나 무슨 초인부대와 같이 묘사되는데, 거품이 끼어있을 가능성은 없나요?
  • 로자노프 2014/09/13 23:29 #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러시아 입장에서는 지옥의 사신 되겠습니다.
  • 이것 2014/09/13 23:43 #

    힘세고 강한 폴스키!
    그리고 몇 백 년 뒤 러시아에게 반쪽을 먹힌 뒤 소련군을 또 두들겨 팼다죠.
  • 로자노프 2014/09/13 23:45 #

    그건 훗날 일이지요.
  • 2014/09/14 19:01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9/14 19:1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위장효과 2014/09/15 23:28 #

    1. 저 시기 이반 4세는 정말 뇌우를 맞아서 뇌가 이상해진게 아닐까 싶을 정도니 말이죠-말년도 심각했지만-

    2. 자, 비밀경찰은 이렇게 만드는 거다!!!!!! 하고 시범보이는 이반뇌제. 그러고보니 러시아 제국및 소비에트 연방에 이르기까지 애용된 반대파 다루는 계책들은 이때 바랑기안 왕가의 짜르들이 다 완성한 셈이군요. (오지로 추방하기 라든가 고문이라든가 기타등등등)
  • 로자노프 2014/09/16 00:03 #

    1. 심각하죠............

    2. 뭐 그런 셈이죠. 다만 오지 추방은 좀 다른 이야기지만...
  • 흑천황 2014/09/21 15:10 # 삭제

    이 글 18번 째 글 입니다:)
  • 로자노프 2014/09/21 21:07 #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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