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역사 이야기 13. 두명의 바실리. 공국 문화부 직할 역사연구소

<영토 확장>

 

 

 - 바실리 1세의 초상화 -


 

 1389년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죽자, 그의 장남인 바실리가 모스크바 대공이 되었다. 그는 일단 토크타미쉬에게 복종하며 그를 위해 일했는데(1) 그 대가로 1392년 니즈니 노브고로드 공국을 모스크바가 합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후 그는 후방의 안정화 차원에서 리투아니아의 대공 비타우타스(2)의 딸 소피아와 결혼하였다. 

 

 

- "야! 이 토크타미쉬 배신자 놈의 ㅅㄲ야! 니들 거기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 내가 지금 기병대를 몰고 가서 네놈들의 머리통을 콱 날려버리갔어!" -

 

 

 그러다 1395년 티무르가 쳐들어왔다. 이 때 킵차크 칸국 군대는 테렉 강에서 괴멸되었고, 사라이는 쑥대밭으로 변했다. 토크타미쉬는 쫓겨났고, 티무르의 군대는 라쟌 공국까지 짓밟은 후 모스크바 공국의 영토 일부도 밟아버렸다. 하지만 티무르의 군대는 모스크바까지는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본국으로 귀환했다. 덕분에 킵차크 칸국의 힘은 엄청나게 쇠약해졌으며 내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피해를 덜 입은 모스크바는 은근슬쩍 공물을 끊어버리고 세력 강화에 나섰다.


 그 일환으로 모스크바 공국은 1397년 노브고로드 공화국이 소유하고 있던 세베르나야드비나강 유역을 점령했다. 이 곳은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주 수입원인 가죽의 대부분이 나던 곳이었다. 당연히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분노하며 항의했고, 일단 1년 후 이 지역은 노브고로드 공화국에 반환됬다. 하지만 칼루가 등 1397년에 점령했던 다른 지역은 그대로 모스크바 공국의 소유가 되었다.


<리투아니아와 킵차크 칸국>

 

 

- "사위. 장인 어른 하는 일에 지금 방해하는건가?" -


 

 한편 리투아니아는 1387년 이후 카톨릭으로 개종했는데 개종 이후 그 동안 꼭두각시 공작들을 앉혀놓은채 유지했던 러시아계 괴뢰 공국들을 아예 합병해나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스몰렌스크는 용감하게도 리투아니아에 대항하여 반기를 들었다. 이때 스몰렌스크 공작 유리는 모스크바로 직접 찾아가 지원을 호소했고, 바실리는 장인어른 뒤통수를 치고 스몰렌스크를 지원했다. 하지만 1404년 스몰렌스크의 반란은 진압되었고, 장인인 비타우타스는 러시아를 집어삼킬 겸 아예 사위에게 선전포고를 해버렸다. 


 이 때 평소 비타우타스를 몰아내려고 하던 요가일라의 동생 쉬비트비가일라가 바실리 1세에게 투항했지만 별로 대세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다 겨우 내부를 조금 안정시킨 킵차크 칸국의 유력자 에디구가 쳐들어오자 바실리 1세는 얼른 비타우타스와 평화조약을 맺었다.(3)


 리투아니아와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킵차크 칸국의 우력자 에디구가 이끄는 군대는 니즈니 노브고로드와 로스토프등 모스크바 대공국에 속한 일부 도시들을 불태워버렸다. 이 원정이 모스크바를 파괴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아직은 사라이에 복종할 때라고 느낀 바실리 1세는 1412년부터 다시 공물을 바치기 시작한다. 이후 그는 모스크바의 위상을 강화하는데 역량을 집중했고, 그 결과 그의 딸이 비잔틴 제국의 황제 요하네스 8세에게 시집가기도 했다. 

 

 

- "이게 시계라는 겁니다. 한번 써보세요." -

 


 여담격이지만 1404년 세르비아에서 라자르라고 하는 수도사가 모스크바에 왔었다. 그는 바실리 1세를 위해 시계탑을 지었는데, 그것이 러시아 최초의 기계식 시계였다고 전해진다.


<눈알뽑기 시즌 1.>


 그러던 1425년, 바실리 1세가 죽고 그와 이름이 같은  바실리 2세가 10살의 나이로 모스크바 대공이 되었다.(4) 비타우타스의 딸이자 바실리의 어머니 소피아가 섭정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바실리 2세의 삼촌이며 모스크바 공국 북부에 영지를 가지고 있던 유리가 모스크바 대공의 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죽기 전에 바실리 1세가 죽은 뒤에는 자신이 후사를 이으라고 유언을 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 "누가 내 외손주 자리를 빼앗으려는거야? 너야?" -


 이 유언 자체는 사실이었다. 다만 문제는 이 유언은 바실리 1세가 결혼하기 전에 한 유언이었기 때문에 애시당초 바실리 1세가 아들이 있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한 유언이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논쟁이 벌어졌다. 문제는 분명 유리는 꽤 강력한 인물이었지만(5), 그보다 훨씬 더 강한 인물인 리투아니아 대공 비타우타스가 자기 외손자를 비호하고 나섰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비타우타스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유리도 함부로 행동에 나설 수는 없었다.


 하지만 비타우타스가 1430년 사망하자, 유리는 바로 사라이로 달려가 울루 무하마드 칸에게 자신이 정당한 모스크바 대공이라고 주장했다. 그 주장은 받아들여졌지만 칸은 그를 돕지 못했다. 하지만 1433년, 유리는 군대를 이끌고 모스크바를 침공했다. 이 때 원래 바실리를 지지했던 이반 브세볼츠스키란 귀족이 바실리를 배신하고 유리 편에 붙으면서, 모스크바는 유리에게 함락되었다. 바실리는 대공위에서 쫓겨났고, 유리가 대공이 되었다.


 하지만 유리는 어린 조카를 뜬금없이 불쌍히 여겨졌다. 그는 조카를 콜롬냐의 영주로 임명했다. 그러자 바로 유리에게 불만을 품었던 사람들이 바로 콜롬냐로 달려갔고, 바실리 2세는 유리가 모스크바 북쪽의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자마자 세력을 다시 규합해 모스크바를 탈환할 수 있었다. 배신자 이반 브세볼츠스키는 안구를 뽑히고 장님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유리는 곧 군사를 규합해 모스크바 대공위를 다시 빼앗았다. 문제는 유리가 얼마 안 가 죽고 유리의 아들 바실리가 대공이 되었다는 것이다.

 

 

- "눈알뽑기는 비잔틴 제국애들만 하는게 아니란다. 흐흐흐" -


 바실리는 그의 동생인 드미트리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덕분에 드미트리는 바실리와 대판 싸우고 바실리 2세에게 붙어버렸다. 이들 연합군은 1435년 바실리를 물리치고 포로로 잡았다. 바실리 역시 눈알이 뽑혀나갔고, 이후 유폐되었다. 이렇게 바실리 2세의 권력은 공고해지는 듯 했다.


 <눈알뽑기 시즌 2>

 

 

- 카잔 칸국의 지도 -

 


 한편 이 무렵 킵차크 칸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1437년 궁정 쿠데타로 울루 무하마드 칸이 쫓겨났는데 울루 무하마드 칸은 카잔으로 도망쳐 그 곳에서 자신을 칸으로 칭했다. 카잔 칸국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울루 무하마드는 힘을 키우기 위해 1439년 모스크바를 공격했고, 막아내기에는 힘에 부쳤던 바실리 2세는 일단 수도를 떠났다. 


 6년 후 어느정도 힘을 다시 키운 바실리 2세는 수즈달에서 마흐무데크 칸(6)이 이끄는 카잔 칸국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바실리 2세는 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카잔 칸국 군대에 의해 포로로 잡혔다. 다행히 러시아 귀족들이 돈을 모은 덕에 5개월 후 그는 몸값을 치루고 풀려날 수 있었다.

 

 

- "그렇게 눈알 뽑는거 좋아하시더니 눈 뽑혀보시니까 어떠세요?" "이건 꿈이야! 꿈이라고!" -

 


 문제는 그 5개월 사이에 그의 동맹자였던 드미트리가 모스크바를 장악해버렸다는 것이었다. 1446년, 드미트리는 바실리 2세의 안구를 적출하여 장님으로 만들었다.(7) 그리고 그를 우글리치로 추방했다. 물론 그 자신은 모스크바 대공이 되었다. 하지만 바실리 2세의 지지자들이 아직 많았기에 그는 생각을 바꾸어, 다시 바실리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볼로그다를 영지로 주었다. 어째서인지 아버지가 비슷한 짓을 벌였다가 뒤통수를 맞았었다는 것을 잊은 것이었다.


 물론 아버지때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실수였다. 바실리 2세는 금방 지지자들을 규합해 세력을 키웠고, 금방 모스크바 대공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드미트리 역시 지지않고 맞서며, 모스크바 공국은 다시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다. 카잔 칸국에서 망명해온 마흐무데크 칸의 동생 카심 덕에 1453년 드미트리는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포로로 잡혀 고로쉬디체란 도시에 수감됬다. 그러다 7월에 저녁으로 닭고기를 먹고 급사했는데,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바실리 2세의 부하들이 닭고기에다가 독을 넣었다고 한다. 즉 독살된 것이었다. 만인이 좋아한다는 닭고기를 먹고 죽었다는 건 어째 좀 씁쓸해보인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모스크바 대공 자리를 둘러싼 눈알뽑기 싸움도 끝났다.


 참고로 바실리 2세를 도왔던 카심은 그 보답을 받게 되었다. 바실리 2세가 그에게 영지를 주고 칸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그것이 곧 카시모프 칸국이었다. 


 <우리는 교황이 싫어요.>


바실리 2세는 눈을 잃었음에도 나름 정력적으로 일했다. 그는 나머지 기간 동안 꾸준히 군사 원정을 벌여 수즈달과 키로프 일대를 장악하고,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영토를 잠식해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대공의 권력을 강화해나갔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은 따로 있었다. 

 

 

 - "교황님의 권위를 인정할테니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

 


 계속되는 오스만 제국의 공세로 점점 멸망해가던 비잔틴 제국은 서유럽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장기간의 협의끝에 1445년 피렌체 공의회에서 동방 정교회는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고 그 밑에 들어가기로 합의했다.(8)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와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드높던 콧대를 꺾고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에 로마 교황에게 굴복한 것이었다. 


 하지만 피렌체 공의회 결과에 대해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당장 1204년의 악몽을 아직도 고스란히 기억하던 비잔틴 제국 백성들과 귀족들부터가 집단적으로 반발했다. 물론 이런 반발과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때문에 피렌체 공의회의 합의 결과는 곧 휴지조각으로 변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러시아의 반응에 비하면 약과였다. 

 

 

- "이제 슬슬 교황의 권위를 우리도 인.." "이 놈이 미쳤구나! 당장 가두어라!" -

 


 당시 러시아 총대주교인 이시도르는 그리스인으로써 공의회 결과에 승복한 인물이었다. 공의회가 진행중이지만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것을 합의한 1441년 경 이시도르는 모스크바로 돌아와 이 사실을 공표했다. 하지만 이는 바실리 2세를 비롯해 수많은 러시아 귀족들 및 성직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들 역시 1204년의 악몽과, 튜튼기사단과의 잦은 갈등 등으로 카톨릭을 증오하고 있었다. 따라서 바실리 2세는 바로 이시도르를 감금했다가 추방했고, 몇 년의 공백기간을 거친 후 라쟌의 대주교 요나를 러시아 총대주교로 삼았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통제에서 완벽하게 벗어나 독립을 선언한 것이었다.



(1) 토크타미쉬는 1391년 티무르의 공격으로 대패하고 잠시 칸의 자리에서 쫓겨났다가 복귀했는데 복위 과정에서 모스크바가 지원을 해주었다.


(2) 당시 리투아니아는 내전 끝에 비타우타스가 대공이 되어있었다. 다만 기존의 대공이자 이제 폴란드의 왕이 된 요가일라가 리투아니아에 대하여 종주권을 가지기로 결정하였다. 물론 실질적으로 리투아니아를 다스리는 건 비타우타스였다.


(3) 참고로 쉬비트비가일라는 1409년 비타우타스에게 체포되었지만, 곧 헝가리로 탈출했으며, 비타우타스 사후 리투아니아 대공이 된다.


(4) 사실상 그는 바실리 1세의 유일한 아들이었는데, 왜냐하면 바실리 1세의 나머지 아들들은 몽땅 병으로 이미 죽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5) 유리의 영지에는 소금과 각종 광물들이 풍부했기 때문에, 그는 상당한 부를 축적해놓은 상태였다.


(6) 울루 무하마드는 얼마 전에 아들인 마흐무데크에 의해 살해된 상태였다.


(7) 사실 그는 이전에 바실리 2세의 결혼식 때 뜬금없이 체포되었다가 몇 달 후 풀려났던 사건, 그리고 그 직후 카잔 칸국을 막기 위해 국경지대로 보내졌는데 이 때 바실리 2세가 지원을 하지 않아 패배한 사건 등으로 바실리 2세를 좋아하지 않은 상태였다. 


(8) 단 교황의 수위권 인정 자체는 이미 1441년에 합의됬고 이후의 회의는 공의회파에 대한 문제나 통합 세부 사항의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덧글

  • Panhypersebastos 2014/08/10 21:36 #

    잘 읽었습니다. 러시아가 슬슬 독자적 정체성을 마련하는 기반을 두기 시작했군요.

    바실리 1세가 1393년에 '교회는 있어도 황제는 없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꽤 정치계, 종교계에서 상당한 파란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 그것과 연관해서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만 피렌체 공의회는 1445년이 아니라 1438~1439년에 있었습니다. 플로렌스 공의회를 혹시 의도하신 것인지?
  • 로자노프 2014/08/10 21:39 #

    플로렌스가 일단 피렌체의 영어식 발음인데다가 가톨릭사전쪽에서 피렌체 공의회를 1445년에 끝났다고 설명했기 때문에 그 설을 채택했습니다. 뭐 영어 위키나 러시아사 책에서는 1448년에 끝났다고 하고 네이버 백과 같은 데는 1442년에 끝났다고 하고 좀 중구난방이더라고요.
  • Panhypersebastos 2014/08/10 22:07 #

    아. 그 말씀 드린 게 다른 이유가 아니라 동방 황제와 총대주교가 교회통일을 1439년에 끝내고 1440년에 귀국했던 까닭이었습니다. 당시는 페라라에서 회의를 해서 페라라 공의회라고도 했지요.
  • 위장효과 2014/08/11 17:15 #

    러시아 사 읽을 때마다 골치아픈 게 뭔 야로슬라프-블라디미리-이반-바실리가 그렇게 많은지 누가 뉘기 아들이여??? 이거 따지면서 읽어야한다는 거...게다가 바랑기안 왕조 후기(이자 전성기)는 바실리 드미트리예비치(1세)-바실리 바실리예비치(2세)-이반 바실레예비치(3세. 대제)-바실리 이바노비치(3세)-이반 바실레예비치(4세. 뇌제)...이름 좀 다양하게 지으심 아니되셨습니까??????????????

    (영국 역사 초기에 난무하는 에드워드와 헨리는 어쩌고? 앙리 셋이서 싸웠던 프랑스사는 자네가 먹어버린거야?)

    네타질은 여기까지!!!!!
  • 로자노프 2014/08/11 21:36 #

    그러고 보면 나중에 가면 드미트리라던지, 알렉세이라던지, 표트르라던지 다양한 이름들이 있는데 왜 항상 바실리와 이반으로 도배되는 건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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