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번창했었던 장안의 쇠락. 공국 문화부 직할 역사연구소


 - 당나라 시기 장안성을 묘사한 지도 -

 현재 산서성의 성도인 시안의 과거 이름은 다들 아시다시피 장안이었습니다. 웨이수이강 통칭 위수로 알려진 강 근처에 있었던 장안과 그 부근 지역은 주나라 이래 수많은 국가들의 근거지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사실 그럴만도 했습니다. 장안 일대의 토지는 본래 곡창지대라 할만큼 비옥했고, 군사적으로 방어가 쉬웠습니다. 동쪽에서 오자니 지형이 험한 곳에 위치한 함곡관이나 동관, 무관을 통과해야 했고, 남쪽 사천에서 올라오는 길도 한정되어있고 험하기는 매한가지였으니까요. 북쪽은 강이고. 이런 곳이 비옥하기까지 하니 거점으로 삼기에는 딱이었습니다.

  당연히 이 일대를 수도로 둔 나라만 해도 주, 진, 전한, 전조, 전진, 후진, 서위, 북주, 수, 당 등 내로라 하는 왕조들이었습니다.(그 외에도 동탁에 의해 후한이 잠시 장안으로 천도했지요.) 장안은 수많은 왕조의 수도가 되며 번영하였고, 중국의 중심지 역할을 대대로 낙양과 함께 해왔습니다. 낙양을 수도로 둔 왕조들도 장안을 매우 중시하여 또 다른 수도에 가깝게 취급했을 정도입니다.

 근데 이런 장안이 오대10국시대부터는 그 누구도 수도로 삼지 않고, 기껏해야 산서의 중심지 정도로 위상이 대폭 추락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고요?

 바로 장안 일대 토지의 질이 악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래 장안 일대는 전설 속의 나라이긴 하지만 하나라때 상상등의 평가를 받을 만큼 매우 비옥했던 땅입니다만 워낙 오랫동안 여러 왕조의 중심지 역할을 하다보니 지력이 고갈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 결과 당 중기에 이르러서는 토지의 질이 매우 악화되었고 장안 일대의 토지는 염화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문제가 안 될 수 있습니다. 까짓 것 운송하면 그만이니까요... 그러나...

 되레 지형이 험악하다는 군사적 이점이 운송에는 방해가 됩니다. 애초에 이런 점도 있고 해서 당초 한 고조 유방도 낙양을 수도로 삼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몇몇 신하들이 군사적 이점을 들어 장안을 추천하여 결국 장안이 수도가 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운송 자체의 이점은 낙양이 워낙 장안보다 좋으니 후한시절만 가도 낙양이 더 번창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만 이 때야 장안 자체의 생산력으로 운송 문제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지만 당나라 때는 지력이 너무나도 쇠했으니... 뭐 이 경우 통상적으로는수운이라는 방법이 있습니다만.....

 '등용문'고사는 괜히 생겼겠습니까? 그 악명 높은 용문이 중간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다가 섬주지험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낙양에서 장안 사이 지역에 암초, 바위 등 수운을 방해할 요소들은 넘쳐났습니다. 물론 당나라도 바보가 아니라 온갖 방법을 동원해 수운을 가능하게 해보려고 하지만... 결과는 po대실패wer

 이렇게 되버리니 당나라 덕종 때는 쌀이 떨어져서 폭동 일보 직전 분위기가 되었다가 기적적으로 쌀이 어떻게 어떻게 도착해서 덕종이 살았다고 환호를 해버리고... 더 나중으로 가면 아예 황실이 1년에 몇달 간 낙양으로 가서 거기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낙양은 장안보다 훨씬 운송이 편리한 위치에 있었거든요.

 이런 이유도 있고 해서 당나라가 망한 후 다른 왕조들은 장안을 수도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단 송나라는 개국 후 군사적 이점때문에 장안을 수도로 삼는 안을 고려했었습니다. 그러나 운송 문제를 들어 신하들이 반대한 덕에 무산되었고, 이후 장안은 산서 지역의 중심도시라는 지방 거점의 역할만을 했을 뿐 더 이상 중국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덧글

  • oldman 2012/06/05 23:08 #

    비슷한 이유로 경제적 중심지가 화북에서 강남으로 옮겨진 것이지요. 수천년동안 농사지었던 화북땅에 비해 강남땅은 싱싱(?)했으니 말이죠.

    그건 그렇고 장안의 지력에 관한 이야기는 잘 봤습니다. 그러고보니 장안(서안)이 다시 중심지로 부각되는 것은 이자성의 난이었고 그때를 끝으로 역사적으로 묻혀버리니 말이죠. 장안의 쇠락은 곧 로마가 쇠락한 것처럼 중국의 고대사회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출현한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로자노프 2012/06/05 23:22 #

    일리 있으신 지적입니다.
  • 크핫군 2012/06/05 23:22 #

    "그렇고 말고요, 아들을 낳으면 나쁘고 딸을 낳으면 백번 좋지요.
    딸이라면 이웃 마을에 시집이나 보내지만
    아들은 전사해서 잡초에 묻히지 않습니까
    당신은 보지 못했소,
    청해성 저 호숫가에는 옛날부터 백골을 거두는 이도 없소이다.
    새 귀신은 원통해 하고 옛 귀신은 울부짖으니
    날씨 음침하고 비나 오면 그 소리 처량하외다."
  • 로자노프 2012/06/05 23:22 #

    당나라때 시였던 것 같은데 누구 시였죠?
  • 크핫군 2012/06/05 23:23 #

    두보입니다.
  • 로자노프 2012/06/05 23:27 #

    감사합니다. 설마 했더니 역시나군요.
  • 셔먼 2012/06/05 23:32 #

    아, 이거 언어영역 모의고사 문제집에서도 간간히 나오던 건데 말이죠...
  • 셔먼 2012/06/05 23:44 #

    당시에는 지력을 유지할 만한 마땅한 비료도 개발되지 않았을 텐데 당대까지 버텼다는 게 용합니다.
  • 로자노프 2012/06/05 23:49 #

    그만큼 비옥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관개라던지 뭐 최대한의 시도도 했을 거고요.
  • Kael 2012/06/06 00:18 #

    그리고 현재는 동해안 지역이 중심지인데...
    그 중에서도 상하이가 베이징을 듣보잡 만들어 버린 수준이라(....)
  • 로자노프 2012/06/06 00:19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Kael 2012/06/06 00:22 #

    그런데 중국 동해안 지역은 자력갱생에는 척박한지역이죠.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인천같은 동네랄까요. 식수(깨끗한 물) 구하기 힘든 동네니까요. (황하와 장강은 똥물이니깐...)

    그런데 중국은 동해안 지역이 중심지가 되었다는건... 처음부터 대내관리보다는 대외교역을 중시했다는 것이겠죠 ㅋㅋㅋㅋ
  • 로자노프 2012/06/06 10:11 #

    그 부분은 글쎄요....
  • 에드워디안 2012/06/06 11:54 #

    카엘//

    송대 이래로 농업생산력면에서나 상업적면에서나 화북을 추월했다는 사정도 있었고, 회남 염산지와 대운하의 종착점(항주), 일본-남해제국으로 나아가는 해상항로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동남지방 일대가 중심지로 부상할 수밖에요.

    더군다나, 송왕조 자체가 정강지변을 계기로 아예 남천해왔으니...
  • ㅎㅎㅎ 2012/06/06 00:35 # 삭제

    장안은 엄밀히 말하면 당 고종 때부터 수도로서의 영향력이 상실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의 중심이 화북에서 강남으로 넘어간 것은 장기적인 원인이었고, 직접적으로 본다면 장안이 수도로서의 기능이 상실한 것은 고종 대 일어난 토번과의 대비천 전투 때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토번이 청해와 농서 일대까지 영향력을 확장하면서 장안의 방위가 취약해질 수 밖에 없었죠. 측천무후가 낙양을 수도로 정한 이유도 관롱집단을 정치적으로 배제시키는 데 원인이 있었겠지만 이러한 장안의 취약성 때문이기도 한 듯 합니다. 측천 이후의 현종도 장안보다도 낙양을 선호했죠.
  • 로자노프 2012/06/06 10:11 #

    그것보다는 생산력일 겁니다. 장안 자체는 서쪽도 어느 정도 방위할 수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야스페르츠 2012/06/06 11:10 #

    관중 지역의 비옥함이 당대까지 버텼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이미 후한 말기에도 관중이 피폐해진 정황이 다수 보이는데... 정치적 혼란으로 황폐해진 것도 있지만, 지력의 쇠퇴도 원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 로자노프 2012/06/06 11:58 #

    음... 제가 알기로 적어도 당 초엽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던 걸로 아는데... 아닌가요?
  • 천하귀남 2012/06/06 11:15 #

    황하등의 범람이 저지역은 어땠는가도 봐야할듯합니다. 토질이 고갈된다 해도 한번 넘치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군요. 오히려 황하 하류로 가면 홍수문제를 더 걱정해야 하니 못간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 로자노프 2012/06/06 11:59 #

    장안 지역이 딱히 홍수로 고생했다던가 하는 지역은 절대 아닌 걸로 압니다. 오히려 침식이라면 모를까. 애초에 상류쪽이라...
  • 천하귀남 2012/06/06 19:25 #

    범람이 없는 지역이라면 토지염화에 지력고갈을 해결할 방법이 없을테니 저꼴이 나는게 어쩔수 없겠군요.
  • 행인1 2012/06/06 17:45 #

    지력 쇠퇴에 토지 염화가 겹쳤다면 당시로는 옮기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겠군요.(인류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라는 유프라테스강 일대도 지금은 토지 염화가 심하다더는군요)
  • 로자노프 2012/06/06 17:54 #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운송이 편하면 모르겠는데 그건 아니고...
  • 모에시아 총독 2012/06/06 23:41 #

    최근 염화현상에 흥미를 느껴서 그런지 장안의 쇠퇴도 관심이 가네요. 염화가 심해졌다고 하셨는데, 산서성에 암염광산이 분포해 있었나요? 염화가 심한 곳은 대부분 남벌에 따른 토양유실로 암염광이 노천으로 드러나는 것에서 큰 타격을 입는다고 알고 있는데 장안도 그러한 현상을 겪었는지 알고 싶어서요.
  • 로자노프 2012/06/07 00:01 #

    암염광산이 근처에 있는지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강 아는 바로는 없는 걸로 압니다. 다만 영양분이 심히 많이 빠져나가고 남은게 소금기라던가 그런 것 같지만 제가 이쪽은 모르는게 많아서.
  • 동쪽나무 2012/06/07 23:21 # 삭제

    토지염화를 발생시키는 요인은 경작지의 확대이고, 촉진시키는 요인은 삼림의 황폐와 가우량의 하락입니다
    보통은 세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을 합니다. 일단 기본적인 메카니즘은 이렇습니다

    처음 시작은 농경이 시작되고 인구가 증가하면 강유역의 농경지가 주변의 초지, 계활지, 평야주변 삼림,소택지(늪)
    순으로 계간이 이루어집니다. 특히 삼림과 소택지의 계간이 치명적인데 나무는 물과 미네랄를 대량으로 저장하는
    공간이며 소택지는 물의 저장공간이 동시에 수많은 동식물의 서식지로 미네랄의 자연순환이 이루어 지는 공간
    입니다. 물과 미네랄의 저장과 순환공간을 사라지면 물은 빠르게 건조하면서 기후의 변화를 가져오게되고
    지표면에는 갈곳을 읽은 미네랄이 축척되게 됩니다 . 그리고 삼림이 파괴된곳은 예외없이 가우량이 줄어들면서
    축척된 미네랄이 비에 의해 씩혀가지 못할뿐 아니라 축척된 미네랄로 인해 삼투압현상에 의해 지하수가 지표로
    빨여올라오면서 지중의 미네랄까지 지표로 이동하면서(즉 악순환의 시작)염해가 촉진 됩니다

    관중지방은 과거 삼림과 수량이 풍부한 곳이었지만 후한 말엽부터 사막화의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하나 다행인것은 후한 무렵에 쌀보다 용수를 적게 필요하는 밀이 전래되고 송나라쯤에 완전히 밀경작으로
    전환되어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 로자노프 2012/06/07 23:25 #

    음... 제가 알기로 애초에 중국 당나라 즈음만 가도 최소한 관중 지역은 밀이 중심이 된 걸로 압니다. 뭐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 동쪽나무 2012/06/07 23:39 # 삭제

    당중기 무렵까지는 쌀과 밀이 병행 경작되었습니다. 비록 기후 변화로 쌀경작이 어려워져스나 황하의 풍부한
    수량에 의지에 대대적인 관계수로를 건설하여 쌀의 재배우위를 계속 유지할수 있어습니다
    하지만 안록산의 난으로 관중지방이 아주 결단이 나면서 대량의 인력이 필요한 관계수로와 쌀농사도 함께 망해
    버립니다
※ 이 포스트는 더 이상 덧글을 남길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