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바라의 난. 억압받던 자들의 대폭발. 공국 문화부 직할 역사연구소


 - 반란을 주동한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를 그린 그림, 서양식 복장을 하고 있다. -

 시마바라의 난. 규수의 시마바라 지역과 그 옆에 있던 아마쿠사 섬에서 일어났던 이 반란에 대해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이 지역의 역사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반란 자체가 이 지역이 겪었던 일들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16세기 일본에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였었다. 심지어는 다이묘급 인사들 중에서도 천주교를 받아들인 사람이 많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해 관대하게 처신했으나 이후 천주교를 금지했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탄압은 그렇게 강력하지 않았다. 당장 고니시 유키나가 등 상당수 다이묘들이 그들의 종교를 그대로 유지했으니까.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카톨릭 포교를 다시 허용해주었다. 서양 세력들과의 교역에서 이득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에야스 등 초기 에도 바쿠후 지도층 인사들은 천주교도들을 그렇게까지 위협적으로 보지 않았다. 덕분에 천주교는 다시 성장했고 이들은 기리시탄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점차 천주교의 세가 커지고, 1609년에 터진 뇌물 사건이 천주교와 깊숙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지며(연루된 다이묘와 혼다 마사즈미의 부하 모두 천주교도였다.) 에도 바쿠후는 생각을 바꾸어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 추방 정도였지만 이후 처형까지 동반한 대대적인 박해가 뒤따르기 시작했다. 지옥도가 펼쳐진 것이었다.

 원래 아마쿠사 섬과 시마바라 지역은 각각 기리사탄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아리마 나오즈미의 영지였다. 당연히 영지 백성들도 영주를 다라서 천주교를 신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고니시 유키나가가 세키가히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후 처형되자 그 땅은 데라자와 가문의 영지가 되었고 시마바라 역시 아리마 가문이 죄를 짓고 영지 교체를 당하는 와중에 마츠쿠라 가문에게 넘어갔다. 

 문제는 이렇게 다이묘가 바뀐 후였다. 먼저 시마바라 지역의 마츠쿠라 가문은 그 동안 거성 기능을 해온 히라 성 대신 시마바라 성을 축조했는데 이 와중에 농민들이 부역으로 고통받았다. 그러나 부역만으로 끝난 게 아니라 마츠쿠라 가문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매겼다. 천주교 탄압은 말할 것도 없고. 아마쿠사 지방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특히나 몇년 째 흉년이 계속되면서 민심은 흉흉해졌고 결국 1637년부터 곧 심판의 날이 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반란 나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덧글

  • 존다리안 2012/04/16 23:16 #

    아마쿠사가 주인공인 순정만화도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 로자노프 2012/04/17 00:05 #

    아 그런가요?
  • 볼리바르 2012/04/16 23:21 #

    아마쿠사 시로는 다양한 문화 아이템으로 쓰였죠. 사쇼 보스로도 나오고..

    근데 '악랄한' 스타일로 활용된건 소녀검객 아즈미에서 쌍둥이 구세주로 패러디 된 경우였던듯..

    시마바라의 난 진압하던 시기부터 이미 전국의 기풍이 완전히 사라져서 진압하는 막부군 측도 다치바나 무네시게 같은 관록있는 다이묘마저 없었으면 더 애를 먹었을겁니다.
  • 로자노프 2012/04/17 00:06 #

    확실히 꽤나 고생한듯 하더군요.
  • 크핫군 2012/04/16 23:39 #

    카더라겠지만 아마쿠사 시로가 효수되기전에 막부에 대한 저주를 퍼붓지 않았습니까?
  • 로자노프 2012/04/17 00:05 #

    근데 제가 확인한 자료들 중에서는 엔하위키 뿐이라 반영 안 했습니다...
  • 기번 2012/04/16 23:50 # 삭제

    당시에는 천주교 세력이 강했던 일본이 현대에 와서 저리 약해진 이유가 궁금하네요.
  • 로자노프 2012/04/17 00:06 #

    아무래도 선교사 유입 없이 에도 바쿠후가 철저하게 탄압한 게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 대공 2012/04/17 00:09 #

    타카야마 우콘도 그렇고 에도전후의 크리스트 교인들을 보면 눈물나죠
  • 로자노프 2012/04/17 00:34 #

    동감입니다.
  • 시바우치 2012/04/17 01:20 #

    마계전생에선 그나마 희생당한 이미지죠. 사무라이 스피릿츠에서는.......왠지 오카마화;;
    일본의 천주교 관련 인물과 사건은 흥미로운 게 많더군요. 아마쿠사의 반란은 당시 설립 초기였던 도쿠가와 막부로써는 근본을 흔들만한 위협으로 간주해 강경하게 진압했던 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기서 살아남은 일부 키리시탄들은 에도시대 내내 숨어서 대대로 신앙을 지켜왔다는데, 정작 현재 살아있는 후손들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더군요^^; 아무튼 아마쿠사 시로는 아마쿠사의 주 관광상품 소재가 되어서, 아마쿠사 시로를 테마로 만들었다는 무화과 떡을 선물받은 적도 있습니다ㅎㅎ
  • 로자노프 2012/04/17 10:42 #

    그렇군요.
  • 앨런비 2012/04/17 01:22 #

    기리사탄->기리시탄
  • 앨런비 2012/04/17 01:24 #

    오타인가 했는데 아예 잘못 본듯?
  • 로자노프 2012/04/17 10:42 #

    지금은 수정을 못하겠고 나중에....
  • 전시타 2012/04/17 04:53 # 삭제

    마츠쿠라 가쓰이에는 할복이 아니라 참수당했습니다. 아마 에도바쿠후 치세중 유일하게 참수당한 (할복이 아니라) 다이묘라고 알고 있음.
  • 로자노프 2012/04/17 10:42 #

    ? 대부분의 자료는 할복으로 나와있습니다만.
  • 1234 2012/04/17 10:15 # 삭제

    아마쿠사 하면.. 어디서 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대사가 생각납니다

    아마쿠사가 죽으면서 ' 내 반드시 살아돌아와, 모든 걸 멸하리 '
  • 로자노프 2012/04/17 10:42 #

    음.... 저도 어디서 들은 것 같네요.
  • 오스왈드 2012/04/17 12:00 # 삭제

    사실 천주교든 개신교든
    한국이 특이 케이스고요..
    당시 일본의 신자 수가 확는 것은..
    예수회의 전략 때문이었죠
    당시 예수회의 포교 방식 중 하나가
    지방 영주나 토착 지배자를 개종시켜
    밑의 부하나 피지배 사람들까지 개종시키겠다는 전략이었죠-물론 중세 유럽이 다 그랬으니까-
    예수회가 토착화 등 좋은 점이 많아도 저건 한계로 남을 수 밖에 없었죠
    결국 영주층이 사라지고 독실한 신자들이 죽거나 배교하니..
    남는 건 소수밖에 없죠
    개항 이후는 신도 때문에 신도를 늘릴 수가 없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신도 수가 안 느는 거고요
    문화 탓도 있다하지만
    그보다는 신자 수를 늘릴 기회가 없었다는게 정답일 겁니다
    중국이야
    지들이 기독교 국가들에게 당한게 있으니 신자 느는게 이상한 거고...
    그러나 신자 수는 적게 늘어도 내실은 기하자는게 그들 모토라
    신자들의 전반적인 신학 수준은 높다 합니다
    한국의 모 목사님들이 하는 식으로 했다간 대번 망하는게 일본 교회라나...

    한국의 경우는 예수회가 아니라 파리외방전교회가 맡았고
    한국에서는 예수회의 방식의 정반대로 갔죠
    한 명 한 명 개별의 독자 신도를 만들었으나 토착 풍습은 거의 용인하지 않는
    이게 대박해의 원인이되었죠
    물론 당대 현실상 제사 지낸다고 해서 박해 안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 로자노프 2012/04/17 14:48 #

    그렇죠.
  • KITUS 2012/04/17 15:22 #

    안타까운 점은.. 여전히 아마쿠사는 교황청으로부터 '성인'이나 '복자'칭호가 내려지지 못하고..
    앞으로도 그럴 확률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 씁쓸하(..지도 않을수도;;)게 보였습니다.

    그 조선 말기에 프랑스군에게 조선정부를 무너뜨리고 천주교 국가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하다
    잡혀서 순교하신 분(갑자기 이름을 까먹었습니다;;)도 지금은 성인칭호를 받았고...(저도 천주교인이지만
    이분을 좀 안좋게 생각하는편입니다;; 너무 하셨다는 평) 또 이토 히로부미놈을 쏘아 도축(ㅋㅋ)시킨
    안중근 의사님도 요즘 '중근 토마스'라는 명칭으로 복자나 성자로 올리자는 의견도 있는데 이 둘에 비해서도
    아마쿠사는 아예 관심도 못보이는게 씁슬하죠;; 사람을 죽였다거나 뭔가 제국주의적(!?)인 느낌을 받은

    앞의 두 분은 그래도 이미 성자 호칭을 받거나 성자로 추대될 기미가 보이는데 반해..
    저 분은 악당이 되기도 하고 악마나 마왕, 음침한 남정네로 비하(?)되기 까지 하니..ㅠㅠ
  • 8비트 소년 2012/04/17 17:35 # 삭제

    황사영은 시복도 안되지 않았나요?
  • KITUS 2012/04/17 18:47 #

    아.. 그분 이름이 황사영이었군요;;

    지금 확인해보니 시성에서 제외되었다 하네요. 그럼 수정해야겠는데 안되나..?ㅠㅠ

    아마쿠사보다 어찌보면 더 나쁜 분위기가 나겠군요. 비록 안중근과 아마쿠사는 사람을
    죽였으나 그것이 개인의 이익이 아닌 뭔가 큰 뜻이 있었던 거에 비해... 황씨는;;
  • BigTrain 2012/04/17 18:33 #

    천주교가 탄압에 앞장서서 터진 반란인 이재수의 난과는 정반대라는 게 아이러니하지 싶습니다. 어딘가에선 박해받는 자들이 구심점, 어딘가에선 박해받는 자들의 척살 대상들..
  • 로자노프 2012/04/17 22:14 #

    뭐랄까 그게 아이러니라고 하지요.
  • 기번 2012/04/17 22:04 # 삭제

    한국이 일본과 달리 기독교가 번성한 이유는
    1. 기독교의 평등, 해방 사상을 통해서 근대화를 이룩하려는 근본 이념으로 삼았죠.
    기독교 선교사들이 백정 출신을 장로로 삼으려 하자 양반 출신들이 반대를 했지만
    끝내 장로로 임명할 정도로 봉건제 타파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던 선교사들의 역할이 컸죠.

    2.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항하기 위해서 기독교의 종말론, 해방 사상을 수용해서 독립 운동의
    사상적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특히 일본 천황을 현인신으로 해서 강요하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독립 운동을 했던 세력은 기독교 단체였죠. 기독교는 독립 운동의 온상이라고 탄압했던 이유가 거기 있어요.

    3. 한국 전쟁 이후 미국의 기독교 자선 단체가 다수의 한국인 고아를 입양하고, 보살펴 주는 등 선행을 많이 해서
    기독교 신도가 증대되었죠.

    일본의 경우는 천주교 세력들이 자선과 사회 봉사 활동을 해서 사회적인 공헌을 많이 하지 못했던 거 같습니다.
    이런 차이가 결정적인 요인 같네요.
  • 로자노프 2012/04/17 22:14 #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 오스왈드 2012/04/18 05:03 # 삭제

    엔도 슈샤코의 침묵이 저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죠

    그리고 한국에 왜 기독교가 번성했는지는 이미 여러 연구가 있는데...
    통상적으로 기번님의 의견이 교회의 공식 의견이라면...
    연구 결과는 반대를 보여주죠
    기번님의 의견 중 1번은 그냥 새로운 종교가 들어올 때 의례적으로 하는 것이고요
    후일 시간지나면 개신교도 남녀구별하고 신분구별했죠
    2번 독립운동의 경우는 많은 부분에서 과장되었다고 했죠
    신사참배 거부는 그게 독립운동 때문이 아니라 신앙 차원이었고
    3번 자원봉사의 경우 이미지를 좋게 할 수는 있어도 신도수를 늘게 하지는 못 합니다

    그럼 뭐냐고요?
    사실 50년대 까지 한국 기독교는 천주교 개신교 합쳐서 5프로도 채 되지 않았다 하죠
    현재 한국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성장은 60-70년대인데
    월남 기독교인들도 있지만
    이 시기 농촌 공동체가 파괴되고
    무속 신앙이 일제와 박정희 정부의 탄압을 거치면서 음지로 숨어들자
    그 사람들이 대거 교회로 갔다는 것이 정설로 되었죠
    천주교는 아직까지 직접 신도화 하는 선교에 머물렀고
    불교가 산중 불교 이미지를 못 벋을때...
    무속적 신앙은 지키지만 달리 갈 곳 없는 사람들을 교회가 수용하면서 신자수가 대폭 늘었죠
    인터넷 상에서 비웃음 당하는 목사들의 등장도 이무렵이고요
    그래서 신자수는 늘었으나 신학 수준은 대폭 하락했다고 하지요
    지금 여러 미디어에서 놀림거리가 되는 부흥회가 그 시작은 건전한 성경 및 신학 공부 모임이었다는 사실은..
  • 로자노프 2012/04/18 07:54 #

    음.... 확실히 그런 면이 있기도 하더군요.
  • 기번 2012/04/18 18:41 # 삭제

    교회의 연구가 아니고 일본 학자인 고사카 시로의 저서인 근대라는 아포리아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기독교로 대변되는 서구 문명이 한, 중, 일 3국으로 들어와서 어떻게 근대화를 이룩했는지에 대해 이렇게 썼죠.

    서구 문명을 수용하면서 근대화를 이룩한 방식이 제각기 달랐던 아시아의 3국에 대해 이렇게 썼더군요.

    중국은 기독교의 종말론과 해방 구원 사상을 홍수전의 대동 사상으로 인식하면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고.
    일본은 기독교의 메시아주의에 대항해서 천황을 현인신으로 만들었다.
    한국은 기독교의 평등, 해방사상을 수용해서 근대화를 이루는 기본 이념으로 삼았는데
    나중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기독교의 해방 사상이 독립 운동을 시작하는 이념으로 변모했다.
  • 기번 2012/04/18 18:43 # 삭제

    한국에서 기독교가 성공한 이유는
    1. 기독교의 평등, 해방 사상을 토대로 근대화를 이룩할 사상적 이념을 만들었다.
    2.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종말론, 해방 사상을 토대로 독립 운동의 이념으로 변모시켰다.

    결국 기독교 사상이 한국의 근대화, 독립 운동의 이념이 되었기 때문에 현대 한국에서 기독교가 번성했다는
    주장이죠.
    일본 학자의 연구라서 그런지 더 객관성이 있어 보여서 인용한 거죠.
  • 기번 2012/04/18 18:52 # 삭제

    고사카 시로의 저서를 보면서 기독교로 대변되는 서구 문명이 동아시아의 근대화에 미친 영향을 저렇게 연구하다니 일본 학자들의 노력과 열의, 수준이 의외로 놀라웠죠.
    특히 한국의 근대화에 대한 마땅한 연구서가 한국에도 없는 상황에 일본인이 저 정도 연구서를 냈다는 사실이 더 놀랍죠.
    많은 한국인들이 기독교라면 단순히 사이비 취급하는데 반해, 일본인이 기독교적인 서구 문명에 대해 저런 깊이 있는 연구를 하다니..
    기독교를 빼면 서구 문명이 성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본 학자들이 더 잘 알더군요.
  • 로자노프 2012/04/18 22:34 #

    글쎄요. 그건 아닌 것 같군요. 정작 일본에서 천주교나 개신교 비율은 모두 합쳐도 그닥이고... 뭐 저도 잘 모르는 영역이니 이 정도로만 하겠습니다.
  • 기번 2012/04/19 02:13 # 삭제

    고사카 시로의 연구 중에 가장 특기할 만한 점은 기독교 사상이 한 중 일 3국의 근대화에 미친 영향으로 인해 현재의 모습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이죠.
    홍수전이 기독교 사상을 수용해서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킨 사건을 아시아 최초의 근대화 운동이라고 정의했죠.
    구세주 신앙과 종말론, 지상 천국이라는 기독교의 사상을 홍수전이 흡수해서 태평 천국 운동을 일으키면서 중국 근대화의 토대가 마련되었고, 결국 공산주의 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마르크스가 고대 이스라엘을 최초의 원시 공산주의 사회로 정의내렸다는 이념에서 최초의 공산주의 사상이 등장하는데..기독교의 대동 사상이 현대 중국 공산주의의 이념을 이룬다는 겁니다.
  • 기번 2012/04/19 02:18 # 삭제

    반면 일본은 천주교의 전파로 인해서 일본 사회가 급속하게 변모했는데~~일본의 전통 제체와 충돌해서 시마바라의 난 같은 천주교인의 반란이 터져 나오죠. 로자노프님의 글에 나온 거처럼 천주교의 신앙과 이념은 일본의 전통 이념과 체제와 맞지 않는 것이라서, 결국 탄압과 박해로 인해서 사라지게 되죠.
    일본의 지배층은 천주교의 이념이 일본 사회를 붕괴시키는 위험 요소라고 봤고, 특히 메시아 사상을 가장 위험하다고 봤죠. 그래서, 일본의 천황을 현인신으로 만들어서 메시아 사상에 저항했다고 합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일본 제국은 일본 민중에게 철저히 천황 숭배를 강요했고 ,대다수의 일본인들이 이에 순종하면서
    기독교 세력은 현저히 사그라졌죠.
  • 기번 2012/04/19 02:26 # 삭제

    반면 한국은 기독교를 수용하면서 근대화의 정신을 배우게 되고, 이후 식민지 독립 운동의 이념으로 한국의 기독교를 새롭게 정착시키면서, 현재의 모습이 된 거죠.
    고사카 시로의 이론은 한, 중, 일 3국의 역사적 사건과 이념적 변화를 아주 잘 조화시키면서 논리적이고 개연성이 있기 때문에 타당하다고 봅니다.
    특히 시마바라의 난이 일본사에 미치는 영향을 잘 썼죠.
    시마바라의 난이 실패한 원인은 아직 서구 문명이 전 세계적인 지배 세력이 되지 못한 상황에 발생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고 봅니다.
  • 기번 2012/04/19 02:28 # 삭제

    고사카 시로의 연구를 보면서 그 논리적인 치밀성과 정연함, 개연성에 놀랬죠.
    한, 중, 일 3국의 근대화의 개념과 현재에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 이유에 대해 저렇게 잘 쓴 글은 처음 봤어요.
    이보다 더 나은 연구가 한국에서 나왔으면 좋겠군요.
  • 오스왈드 2012/04/19 09:36 # 삭제

    기독교에서 메시아가 있긴 하지만...
    고사카 시로의 연구는 지나치게 해방신학 민중 신학에 초점을 맞춘 듯...
    지금도 그렇지만 천주교의 메시아는 의례적 메시아에 가깝죠
    예수님 왔고 다시 올거야
    하지만 그걸로 끝...
    더구나 19세기 천주교는 개신교 및 기타 반기독교 세력과 싸우느라 완전히 의례화된 종교가 되었는데 거기서 무슨 메시아론이 더 있을지 모르겠네요
    홍수전은 가톨릭보다는 덜 의례화된-어차피 거기서 거기였지만- 개신교 사상을 받아들인것이고..
    천황제 숭배는 국학운동+반 막부라 기독교가 아니라 이슬람교가 들어왔어도 했을 거죠..
    고사카 시로는 너무 좌파에 가까운 해석이라 좀 그렇네요...
    더구나 한국에서 기독교의 급격한 성장은 60-70년대라 문명 운운하기도 그렇고..
    차라리 기존 사회학자들 연구대로 무속 신앙의 쇠퇴와 농촌 공동체 붕괴로 갈 곳 없던 이들의 집단 헌신 정도로 보는게 타당할 듯 합니다
  • 기번 2012/04/19 23:55 # 삭제

    기독교의 해방 사상이 60~70년대 학생 운동, 노조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말도 있죠. 한국이 군사 정권의 질곡 하에서 신음할 때 수많은 대학생, 노동자들이 기독교의 평등, 해방 사상에 영향을 받고 민주화 투쟁을 했다는 말도 있어요. 오스왈드님의 말처럼 60~70년대 기독교가 한국에서 급격한 성장을 한 이유가 거기에 있죠.
    기독교 사상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한국의 상황에 맞게 변모했기 때문에 현재의 발전을 이룩했다는 주장이죠.
  • 기번 2012/04/19 23:59 # 삭제

    박정희 정권 이후에 장기간의 군사 독재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이 해방, 민중 신학을 수용한 건 시대적인 요구 사항으로 당연한 거라고 봅니다. 독재에 저항하기 위한 정신, 이념을 해방, 민중 신학에서 발견하는 건 당연하죠.
  • ttttt 2012/07/15 12:38 #

    성경 구절은 빼오기 나름이라, 김일성도 어릴 적에는 그 쪽과 상관있었다더군요. 왕조형성, 신격화해놓은 걸 보면 참 잘 배운 듯.
  • ttttt 2012/07/15 12:42 #

    80년대 서울의 상징물 중 한 가지가 바로,
    동네 전봇대마다 빼놓지 않고 붙은 까만색 조루치료제광고랑 빨강색 대부흥회 광고라고 해도 될 겁니다.
    그리고 상업용 건물에는 극장포스터, 권투경기포스터와 함께 대부흥회 일시와 장소를 적은 다단광고지..
    길가 상업용 건물 지하실이나 이층을 향하는 십자가와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

    사회안전망과 복지가 없던 시대에 교회는 "초코파이 하나"주는 자선단체 이미지가 강했어요. 게다가 무려 "미국"하고 연결돼서 문명적인 선입견도 확실하고, 그 쪽 지원도 받고 코쟁이 언니오빠도 만나고.. 연줄도 만들고.. 교회니까 건물도 크고(교회를 믿을 수 있느냐는 그 교회가 얼마나 큰 성전을 갖고 있느냐가 결정하는 성향은 지금도 뭐). 부모들에겐 아이들 맡기기 나쁘지 않은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교회가 제공헀다 해도 될 겁니다. 사실, 탁아소니 고아원이니하는 곳 말고 제대로 된 아이돌보기 서비스가 흔하지도 않았고, 스카우트니 무슨 연맹이니하는 돈드는 단체가입말고는 교회만큼 그 시대 부모가 주말과 여름에 아이들을 무료나 저렴하게 보낼 수 있는 데도 없었습니다. 당시 불교는 이런 것과 무관했습니다. 즉, 교회는 문명화, 도시화, 핵가족화로 변화된 사회의 니즈를 만족시켜주었는데 그 결과는 신세대의 대거 기독교도화.. 부모세대에게는 영적 강도, 강간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죠. 뭐, 제사 거부만 하지 않으면 예수든 부처든 조로아스터를 믿든 한국사람은 별 상관안합니다만.

    (기독교인이 그 사실을 납득하지 못한다면, 자기 자식을 마음놓고 공짜로 영재교육해준다는 어린이집에 맡겼더니 아이가 어느새 꾸란을 암송하고 있더라고 생각하면 딱 감이 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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