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곳을 떠나야겠다>
- 20세기 경에 찍은 오이라트 대상 사진 -
13세기 초엽 경 칭기즈칸에게 복속되었던 오이라트 족은 원이 붕괴된 이후 점차 힘을 키워 15세기 경 몽골 초원을 제패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때 명의 황제를 붙잡으며 위세를 떨쳤던 에센이 황금씨족이 아닌데도 칸을 칭했다가 1년만에 피살당한 후 그 세력은 점차 본거지인 서부 몽골로 위축되었다. 그리고 한때 오이라트에게 복속되었던 몽골족은 16세기 경 알탄 칸의 지휘 하에 다시 부활하여 칭기즈칸때처럼 오이라트를 다시 복속시킬 수 있었다.
오이라트 족 자신들은 17세기 초에 다시 몽골족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4개 부족(1)으로 이루어져있던 오이라트 내에서 이 무렵 훗날 준가르가 되는 초로스 부족의 힘이 강대해지기 시작했다. 초로스 부족은 점차 힘을 키우며 오이라트 내 다른 부족들까지 지배하며 오이라트를 재통일하고자 했고(2) 이에 토르구트 부족은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동시에 토르구트 부족은 서쪽 지역이 러시아의 팽창으로 아스트라한 칸국, 시비르 칸국 등이 멸망했지만 아직 러시아의 통제력이 약해 목축하기 좋은 초원지역 다수가 공백지역에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토르구트 부족의 부족장 코 우틀룩이 이주라는 중대한 결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초로스 부족에 대한 불만, 서쪽의 공백 지역 확보 등을 위해 코 우틀룩은 1616년부터 군대를 볼가강까지 파견하며 이주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에 돌입했다. 코 우틀룩이 보낸 토르구트 군대는 아직까지 정찰 단계였지만 지나가는 길에 있던 히바 칸국, 러시아인들의 거주 지역 등을 짓밟으면서 노가이족이 사는 볼가강 하구까지 나아갔고, 그 곳에서 노가이 족도 공격했다.
노가이 족 역시 이들을 막아보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토르구트의 강력한 공격에 노가이족은 점점 패퇴하기 시작했다. 결국 노가이족은 오스만과 폴란드가 긴장 상태에 들어가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공격하며 활로를 찾으려 했다. 이런 노가이족의 공격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오스만 투르크가 호틴 조약으로 전쟁을 끝낸 뒤에도 계속되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대는 스웨덴과 전쟁 중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들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더군다나 일련의 정찰 결과 볼가강 하구로 이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토르구트 부족은 1630년 부터 대대적인 이주 작업에 돌입했다. 이들은 지나가던 길에 있던 히바 칸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주면서 서진했고 1632년부터 토르구트 부족은 볼가강 하구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1634년 노가이의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고 1639년에는 카스피해 지역의 투르크계 부족들도 제압하였다. 노가이는 이후 9년간 산발적으로 저항했고 이 과정에서 코 우틀룩이 전사했지만 결국 노가이족은 크림 칸국이나 러시아로 망명하거나, 토르구트에게 투항해야했다.
- 16~17세기 유럽 스텝 지역 유목민 전사들을 묘사한 그림. A는 16~17세기 체르케스인 귀족 출신 기병. B는 노가이 타타르 기병. C는 칼미크 귀족 출신 기병이다. -
이렇게 이들은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왔고, 준가리아에 정착하였다. 참으로 힘든 귀향이었다. 건륭제는 이들의 귀환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자신의 공덕을 찬양하는 두 개의 비석을 세웠다.
<남은 자들의 운명>
칼미크 족의 귀향은 어찌 되었든 성공한 셈이 되었다. 이 소식은 당시 귀족 및 정부의 압제에 시달리던 러시아의 하층민들과 소수민족들에게 자극제가 되었다. 마침 표트르 3세가 백성들을 위해 일하려다가 아내 예카테리나에게 죽었다는 뜬소문까지 나돌았고 이런 사회적인 상황을 이용하려던 코사크 출신 푸가초프가 표트르 3세를 참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 남아있던 칼미크 족들 중 일부도 권리 향상을 위해 다른 소수민족들처럼 푸가초프를 도왔다.
물론 푸가초프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제 노골적으로 칼미크 족을 동화시키고자 하였다. 칼미크의 자치권은 사라졌고 칼미크 족은 이제 돈 코사크에 편입됬다.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러시아는 이미 칼미크족의 대탈출 이전부터 이들을 정교회로 개종시키려고 했다. 그 결과 이미 일부 상류층은 러시아 정교회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것은 대탈출 이후로 한층 노골화되었는데, 러시아 정부는 칼미크 승려들이 수행을 위해 티베트로 떠나는 것을 제한했다. 또한 불교 사원을 러시아 정부가 지정한 곳에서 러시아 건축 양식에 따라 지을 것을 칼미크족에게 강요하고 고위 승려를 직접 임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칼미크 사원은 칼미크족의 빈곤화와 더불어 19세기 경부터 감소하기 시작했다.
- 틸지트에서 자신의 코사크, 칼미크, 바쉬키르인 지휘관들을 나폴레옹에게 소개하는 알렉산드르 1세 -
칼미크족의 활약 역시 미미해져갔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칼미크 족 군대가 종군하기도 했고 1807년 틸지트 전투 이후 맺어진 틸지트 화약 당시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나폴레옹에게 칼미크 지휘관을 소개시켜주기도 했다. 하지만 칼미크족이 돈 코사크 휘하에서 싸우게 된 만큼 이들의 군사적 기록은 미미할 수 밖에 없고, 점차적으로 러시아 내에서의 비중도 줄어갔다. 그나마 비중있는 것이라고는 레닌의 할머니가 칼미크족이라는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 정도랄까...
<최악의 시련 그리고 현재>
그러던 중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터지며 적백내전이 발발했다. 당시 돈 코사크에 속해 있던 칼미크 족은 돈 코사크에 딸려 백군으로 참전하였다. 칼미크족은 유목민들을 적대시하는 소비에트를 따르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일부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백군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려는 분위기가 감돌게 되었다.
하지만 적군은 신속하게 볼가강 일대를 장악했고 1만명이 넘는 칼미크 기병대를 적군으로 편입시키며 이들의 백군 합류를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백군에 참여한 일부는 결국 적군에게 패배하고 도주했는데 지도층 인사들은 처형되었고, 나머지는 일단 사면을 받아 볼가강 하구에 살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모스크바 당국은 적백 내전이 어느 정도 정리되던 1920년 칼미크족이 사는 지역을 자치주로 만들어주었고, 1935년에는 자치 공화국으로 승격시켜주었다. 얼핏 보면 칼미크 족에 대한 대우가 제정 러시아 시절보다 좋아진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놈이 그 놈이었다. 소련 당국은 칼미크족이 17세기경 고안해낸 몽골 문자와 비슷한 문자 대신 키릴 문자를 쓸 것을 강요하여 성공시켰고,(8) 티베트 불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 사원을 폐쇄하고 승려들을 총살시키거나 시베리아 유형지로 보내버렸다. 그리고 1930년대 들어서는 집단 농장을 도입하며 칼미크가 유목 생활을 버리도록 강요하였다.
결정적인 시련은 1944년에 찾아왔다. 의심 많은 스탈린은 이 무렵 수많은 소수민족들을 나치와의 내통 혐의가 있다며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시켰는데 이 때 칼미크 족도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 칼미크 족은 강제로 볼가강 하구를 떠나 생판 다른 곳인 중앙아시아로 이주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더군다나 칼미크 족의 시련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솔제니친의 명저 수용소 군도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일인들과 그리스인들이 경제적 성공을 거두고 있을 때, 고려인들이 상당한 활동의 자유를 얻고, 중앙아시아의 여러 교육 기관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떠오를 때(9), 하다못해 체첸인들이 그들의 호전적인 민족성으로 소련 관리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있을 때, 칼미크 족은 외롭게 죽어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수용소 군도에서 솔제니친은 칼미크 족의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적어도 이런 말이 나온 것 자체가 칼미크 족의 처지가 좋지 못한 것이 널리 퍼져있었다는 이야기는 될 것이다.
흐루시초프가 1956년 일괄 사면령을 발표하면서 겨우 겨우 살아남은 칼미크족들은 볼가강 하구로 귀환했다. 흐루시초프는 이들의 고향을 자치구로 복원시켰다가 1년 후 칼미키아 자치 공화국으로 승격시켜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불교 사원을 짓는 것은 허락받지 못 했고, 칼미크 어로 말하는 것 역시 규제되었기에 칼미크 어를 쓸 줄 모르는 칼미크 족도 많아졌다.
이런 규제는 1980년 대 고르바초프의 페테스트로이카 등으로 풀리기 시작했다. 1988년부터 불교 사원이 다시 건설되었고, 칼미크어 복원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된 이후 이런 운동은 더욱 활력을 받게 되었다. 다만 인구 문제 등으로 칼미크 자치 공화국 정부는 몽골 정부 등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고 한다.
(1) 각각 초로스, 토르구트, 도르베트, 코슈트이다.
(2) 오이라트는 에센 칸 사후로 분열되어 있던 상태였다.
(3) 북방전쟁은 끝난 시점이기에 정황상 표트르 대제는 페르시아 원정을 위한 병력을 요청했을 공산이 크다.
(4) 콩타이지는 태자라던지 대공, 지도자 정도로 생각하는 게 좋은 칭호이다. 칸보다는 지위가 낮다.
(5) 아유카 칸 사후부터 칼미크 족의 대탈출 까지 러시아가 치룬 전쟁만 해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러시아-오스트리아-투르크 전쟁, 러시아-스웨덴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바르 동맹 토벌, 러시아-투르크 전쟁 등 상당히 많은 전쟁을 치루었고 이 전쟁들의 규모 역시 상당한 수준인 것이 많았다.
(6) 물론 동화 정책은 이전부터 종교를 중심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7) 유대인들도 하도 당한 나머지 마카베오 등이 셀레우코스 왕조에 대항할 때는 안식일 따위 무시하고 그냥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 때 다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공격을 하지 않다가 로마군에게 패배했다.
(8) 라틴 문자, 즉 알파벳 도입 시도도 있었으나 실패했다.
(9) 솔제니친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교육열로 교육 기관들을 점령했다고 표현했다. 고려인들은 나중에 경제적인 성공도 거두지만 이것은 60년대의 일이었다.

13세기 초엽 경 칭기즈칸에게 복속되었던 오이라트 족은 원이 붕괴된 이후 점차 힘을 키워 15세기 경 몽골 초원을 제패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때 명의 황제를 붙잡으며 위세를 떨쳤던 에센이 황금씨족이 아닌데도 칸을 칭했다가 1년만에 피살당한 후 그 세력은 점차 본거지인 서부 몽골로 위축되었다. 그리고 한때 오이라트에게 복속되었던 몽골족은 16세기 경 알탄 칸의 지휘 하에 다시 부활하여 칭기즈칸때처럼 오이라트를 다시 복속시킬 수 있었다.
오이라트 족 자신들은 17세기 초에 다시 몽골족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4개 부족(1)으로 이루어져있던 오이라트 내에서 이 무렵 훗날 준가르가 되는 초로스 부족의 힘이 강대해지기 시작했다. 초로스 부족은 점차 힘을 키우며 오이라트 내 다른 부족들까지 지배하며 오이라트를 재통일하고자 했고(2) 이에 토르구트 부족은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동시에 토르구트 부족은 서쪽 지역이 러시아의 팽창으로 아스트라한 칸국, 시비르 칸국 등이 멸망했지만 아직 러시아의 통제력이 약해 목축하기 좋은 초원지역 다수가 공백지역에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토르구트 부족의 부족장 코 우틀룩이 이주라는 중대한 결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초로스 부족에 대한 불만, 서쪽의 공백 지역 확보 등을 위해 코 우틀룩은 1616년부터 군대를 볼가강까지 파견하며 이주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에 돌입했다. 코 우틀룩이 보낸 토르구트 군대는 아직까지 정찰 단계였지만 지나가는 길에 있던 히바 칸국, 러시아인들의 거주 지역 등을 짓밟으면서 노가이족이 사는 볼가강 하구까지 나아갔고, 그 곳에서 노가이 족도 공격했다.

- 본격 굴러온 돌에게 박살날 박힌 돌이 된 민족 jpg -
노가이 족 역시 이들을 막아보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토르구트의 강력한 공격에 노가이족은 점점 패퇴하기 시작했다. 결국 노가이족은 오스만과 폴란드가 긴장 상태에 들어가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공격하며 활로를 찾으려 했다. 이런 노가이족의 공격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오스만 투르크가 호틴 조약으로 전쟁을 끝낸 뒤에도 계속되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대는 스웨덴과 전쟁 중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들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더군다나 일련의 정찰 결과 볼가강 하구로 이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토르구트 부족은 1630년 부터 대대적인 이주 작업에 돌입했다. 이들은 지나가던 길에 있던 히바 칸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주면서 서진했고 1632년부터 토르구트 부족은 볼가강 하구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1634년 노가이의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고 1639년에는 카스피해 지역의 투르크계 부족들도 제압하였다. 노가이는 이후 9년간 산발적으로 저항했고 이 과정에서 코 우틀룩이 전사했지만 결국 노가이족은 크림 칸국이나 러시아로 망명하거나, 토르구트에게 투항해야했다.

한편 볼가강 유역에 이주한 토르구트 부족은 일단 서몽골과 튀르키스탄에 머무르던 오이라트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 한편 주변 민족들이 자신들을 부르던 새로운 명칭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바로 '칼미크'였다. 이 말은 본래 투르크계 언어로 '잔류자'란 뜻으로 14세기 경부터 오이라트 근처에 이웃해있던 투르크계 부족들이 그들을 지창하던 말이었다. 이 말을 러시아인들도 받아들여 오이라트 등을 칼미크라 불렀는데 본래 오이라트 족은 이 명칭을 경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싫어하였다. 하지만 볼가강 하구에 정착한 토르구트 부족은 이 명칭을 받아들였고, 스스로를 칼미크라 지칭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하여 볼가강 하구의 오이라트 부족은 칼미크라는 명칭으로 따로 불리기 시작했다.
<적의 적은 우리 편>

한편 노가이족을 몰아내고 새로 등장한 칼미크 족을 흥미롭게 쳐다보는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칼미크가 이주 과정에서 자신들의 마을 여러 개를 짓밟은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일단 칼미크는 그들에게 적대적이던 노가이족을 몰아내주었고, 종교 역시 티베트 불교로 러시아 정교회 입장에서 보기에는 티베트 불교는 적어도 전통적인 적대자들이었던 이슬람교도들보다는 상종하기 좋은 종자들로 인식되어졌다. 또 러시아는 시베리아 진출 과정에서 오이라트와 이미 접촉했으며 이 때부터 오이라트가 불교를 믿는 몽골계 부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곧 러시아의 위협이 되는 이슬람교를 믿는 투르크계 부족들과 쉽게 화합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러시아가 갖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러시아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이들은 근처의 투르크계 유목민족들을 동맹 대상이 아닌 약탈 대상으로 여겨 이들을 약탈하거나 복속시켰다. 특히 칼미크에 의해 자신들의 땅을 잃은 노가이는 칼미크의 잦은 습격 대상이 되었고 그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가축 등을 상당수 빼앗겨야 했다. 물론 칼미크가 서쪽으로만 약탈을 떠난 건 아니었고, 이들은 수시로 중앙아시아의 여러 칸국들을 약탈하며 그들에게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러시아는 칼미크에 접근하였고 러시아와 칼미크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이들의 관계는 러시아-코사크 관계와 비슷했는데 일단 칼미크족은 러시아의 명목상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러시아의 요구에 따라 일정한 수 이상의 기병대를 보내야하지만 대신 그들의 영역 내에서는 무슨 짓을 하던 러시아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관계는 1656년과 1662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갱신되었다.
물론 항상 관계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칼미크는 러시아의 법이 아닌 1640년 오이라트 각 부족들의 회의 결과를 토대로 준가르 분지에서 공표된 대법전 아치 짜아진 비치그(Iki Tsaadzhin Bichig)를 따랐고 양 측은 무역 과정에서 서로 불만족스러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더군다나 칼미크 족은 간혹 가다가 수틀리면 러시아에 대한 약탈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1682년 경 러시아측이 칼미크족에게 인질을 요구하자 분노한 칼미크 족은 카잔을 약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러시아와 칼미크는 화해했고,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칼미크 족은 러시아를 위해 기병대를 파견하였고, 러시아는 북방 전쟁이나 크림, 오스만 등 남방의 이슬람 세력들과 전쟁을 벌일 때 칼미크 기병대를 아주 잘 써먹었다.
<아유카 칸>
이렇게 러시아랑 적당히 잘 지내던 1669년 아유카가 칼미크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즉위 과정에서 어느 정도 내란을 겪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아유카의 치세는 칼미크가 가장 영광스러웠던 시기이기도 했다. 아유카는 3년 후 아스트라한을 방문해 러시아 관리 앞에서 자신의 차르의 신하임을 확인하였다. 사실은 종속이라기보다는 공존이었지만. 그는 러시아의 요구에 응해 크림칸국과 오스만 제국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기도 했다. 칼미크 기병대는 많은 수의 투르크 인들을 죽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1682년 러시아의 인질 인도 요구에 분노하여 위에서 서술했던 카잔 공격을 벌이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고 1년 후에는 크림 칸국 등의 뇌물을 받고 이슬람 세력에 대한 공세를 중단하기도 했다.

러시아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는 1693년 러시아에 대항하는 바쉬키르인들을 러시아를 대신하여 응징하였고, 1697년에는 새로운 동맹 조약에도 서명하였다. 그리고 2차 빈 공방전 이후 벌어진 대 오스만 전쟁에도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칼미크 기병대는 1696년 오스만 군대를 격파했고, 아조프 공성전에도 참여하였다. 칼미크 기병대는 북방전쟁에도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인상 깊은 활약을 벌였고, 1708~1709년 우크라이나에 진입한 스웨덴 군대를 표트르 대제가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 표트르 대제와 아유카 칸의 만남. 두 걸출한 군주의 회견 -
러시아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1722년 사라토프에서 아유카 칸을 정중하게 예우하며 접견하였다. 이 때 표트르 대제는 야유카에게 1만명의 기병대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다.(3) 하지만 아유카는 이런 요구에 5천 명의 병력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대답하는 여유를 보였다. 칼미크 기병대의 강력함, 동시에 칼미크의 힘이 러시아로써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화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아유카는 거리가 상당히 먼 편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티베트, 준가르 등과 연락을 하였고 통혼까지 하였다. 이런 열의 덕에 아유카는 갈단이 죽기 직전 달라이 라마로부터 칸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비록 아유카는 칸이 될 수 있는 황금씨족은 아니었지만 몽골 유목민들 사이에서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던 달라이 라마로부터 인정받은 칸이었으므로 나름대로 강력한 권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마침 갈단이 죽고 준가르의 지도자가 된 체왕 랍탄의 칭호는 겨우 콩타이지(4)였다. 당연히 아유카는 이 기회에 오이라트 전체를 지배하기로 결정하고 준가르로 15000호의 사람들을 자신의 아들 체렌 도르쿠에게 딸려보냈다. 하지만 이들은 체왕 랍탄에게 공격당해 사람들은 체왕 랍탄이 가져가버리고 체렌 도르쿠는 겨우 목숨만 건져 칼미크로 귀환해야 했다.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
아유카 칸은 1724년 2월 사망했다. 그의 아들 체렌 도르쿠는 멍청한 인물이었고, 설상가상 칸의 자리를 두고 내분이 터졌다. 칼미크의 약화는 필연적이었다. 더군다나 러시아 역시 이제 더 이상 칼미크의 좋은 이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칼미크에게 착취자로 비춰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럴만한 이유도 있었다. 18세기 들어와 러시아의 국력은 강해졌지만 그에 비례하여 규모가 큰 전쟁도 자주 치루게 되었다.(5) 그러면서 러시아는 칼미크 족에게 병력을 요구하는 빈도와 요구하는 병력의 숫자도 날로 증가하였다. 더군다나 러시아인들, 그리고 예카테리나 대제 즉위 후에는 독일인들까지 농사를 짓겠다면서 칼미크 족이 사는 볼가강 하구까지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1750년대부터 러시아인들은 칼미크에게 오이라트 부족들이 모여 결정한 법 대신, 러시아의 법을 따르라고 하면서 칼미크 족을 동화시키려고 했다.(6)
설상가상으로 러시아와 독일인 농민들이 몰려오면서 예카테리나 대제는 칼미크 족에게 좀 더 동쪽의 땅으로 이주할 것을 제안했는데 예카테리나 대제가 제안한 땅은 목축이 불가능한 땅이었다. 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지도만 본 예카테리나 대제와 그녀의 신하들이 내린 탁상 공론일 뿐이었지만 칼미크 족에게는 지금 우리보고 죽으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침 이 때 준가르가 멸망했다는 소식, 그리고 기근과 전염병, 그리고 청의 대학살로 준가리아 지역의 인구가 격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칼미크 족은 이 소식을 듣고 1750년대 후반부터 청의 건륭제와 접촉하며 이주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물론 건륭제는 준가르 평정과 준가리아 지역 인구 확보를 위해 이들의 이주를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그 정보가 새어나가기도 했다. 이로 인해 1767년의 이주 계획은 물거품으로 건너가기는 했지만 당시 칼미크의 지배자였던 우바시 칸은 예카테리나 대제에게 오리발을 내밀며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로부터 길일을 받은 후 1771년 1월. 카자흐족 정벌을 핑계로 부족민들을 불러모으며 이주를 시작했다. 그는 이주 전날에야 부족민들에게 이제 준가리아로 귀향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고난의 행군>
- 가자 고향으로! -
1771년 1월 5일. 칼미크족은 드디어 귀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주를 시작할 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부 칼미크 족은 오랫동안 그들의 터전이었던 볼가강 하구의 초원 지대, 즉 칼미크 초원을 떠나기를 거부했고, 하필 볼가강의 얼음이 생각보다 빨리 녹으면서 볼가강 서쪽의 칼미크 족 다수는 이주에 합류하지 못 하게 되었고 그 숫자는 6~7만명 정도였다. 그래도 20만 명의 칼미크 족이 우바시 칸을 따라 이주하기 시작했다. 우바시 칸은 주도면밀하게 정예부대를 보내 요새들 간 연락을 차단시켰다. 이로 인해 러시아 군대가 머무르던 오렌부르크에서 상황을 파악하는데는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예카테리나 대제한테 이 소식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서둘러 코사크, 바쉬키르 인들 자신의 군대에게 추격을 명하는 한편 이 무렵에 이미 어느 정도 러시아의 영향력에 들어가있던 카자흐 족, 그리고 그 동안 칼미크 족의 약탈에 시달렸던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계 유목민족들에게 칼미크 족의 탈출을 통보하고 그들을 막을 것을 요청했다. 칼미크족이 꽤 치밀하게 준비했음에도 그들은 여자, 아이, 노인까지 동반한 거대한 집단이라 속도는 느릴 수 밖에 없었고 추격대는 곧 칼미크 족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주하던 칼미크 족은 전통 명절은 쐬고자 하였고, 그래서 몽골의 설날 격인 차강사르가 되자 칼미크족은 도주 중임에도 불구하고 멈춰서서 춤추며 즐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법칙이라면 법칙이랄까. 이런 칼미크 인들의 행동은 안식일을 지키던 유대인들(7)이나 미사 일이라고 경계 안 하던 필리페 데 브리투의 고사가 생각나기에는 충분했다. 아니나다를까 카자흐, 러시아, 바쉬키르 연합군이 들이닥쳤고, 칼미크 족은 9천여명이 죽는 대패를 당했다. 이후 겨우 도주한 칼미크 족은 어느 협곡에서 러시아 군대에게 꼬리를 잡히지만 반격을 가해 5천명의 러시아 병력을 몰살시켰다.
하지만 이것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추격을 단념시키게 하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칼미크 족은 이들의 추격을 어렵게 하기 위해 늪지대로 들어갔는데 이것이 칼미크 족에게도 독이 되었다. 하필 식량도 떨어지고 가축들에게 먹일 풀도 없는 지역이라 칼미크 족은 눈물을 머금고 가축들을 죽였는데 이 때 죽인 가축들이 칼미크 족이 데려온 가축 숫자의 절반이었다. 더군다나 겨울이라 해도 늪지대가 완전히 얼어있던 것도 아니라 3천~5천명 가량이 늪지대에서 빠져죽었다. 당연히 병이나 굶주림으로 죽은 사람도 많았다. 이 늪지대를 1달 가량 통과했는데 통과했을 때는 그나마 남아있던 가축들도 거의 죽어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우바쉬 칸은 추격대가 이들을 앞질러서 늪지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산 넘어 산이오, 설상가상이라구나. -
결국 우바쉬 칸은 우회로를 택했다. 문제는 그 우회로는 사막지대였다는 것이었다. 물론 사막지대와 늪지대 사이에 초원지대가 있기는 했지만 하필 러시아군의 청야 전술로 쑥대밭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별 도움은 되지 못했다. 당연히 사막지대에서 칼미크 족은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수시로 찾아오는 러시아와 바쉬키르, 카자흐 추격대의 습격에 시달려야 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들은 이렇게 겨우 탈라스 강에 도착했으나 여기서 자신들의 땅을 지키려는 키르기스 군대와 조우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결국 이들은 다시 사막지대로 들어가야했고, 역시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 때 상황이 처참하여 우바쉬 칸의 딸도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다 죽어야했다. 그렇게 그들은 겨우 청나라가 통제하고 있던 그들의 고향, 이리 일대에 도착했다. 이 때 도착한 칼미크 족은 출발할 때의 절반 이하로 겨우 8만여명 정도였다.
- 대장정급 칼미크의 고난의 행군 -
하지만 워낙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던 이들이라 고향에 돌아온 후에도 청이 칼미크 족을 수용하는 동안에도 1만 명 가량이 죽었다. 당시 수용 절차를 담당했던 청의 관리 서혁덕은 건륭제에게 보내는 상소에서 그 처참한 실상을 알 수 있다.
<적의 적은 우리 편>

- "안녕하세요. 새로 들어온 이웃 칼미크라고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엉. 원래 살던 그 못된 노가이는요?" "아. 쫓아내는 중입니다." -
한편 노가이족을 몰아내고 새로 등장한 칼미크 족을 흥미롭게 쳐다보는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칼미크가 이주 과정에서 자신들의 마을 여러 개를 짓밟은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일단 칼미크는 그들에게 적대적이던 노가이족을 몰아내주었고, 종교 역시 티베트 불교로 러시아 정교회 입장에서 보기에는 티베트 불교는 적어도 전통적인 적대자들이었던 이슬람교도들보다는 상종하기 좋은 종자들로 인식되어졌다. 또 러시아는 시베리아 진출 과정에서 오이라트와 이미 접촉했으며 이 때부터 오이라트가 불교를 믿는 몽골계 부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곧 러시아의 위협이 되는 이슬람교를 믿는 투르크계 부족들과 쉽게 화합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러시아가 갖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 1700년 경 칼미크의 영역. 실질 지배지역만 표시한 듯 하다. -
러시아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이들은 근처의 투르크계 유목민족들을 동맹 대상이 아닌 약탈 대상으로 여겨 이들을 약탈하거나 복속시켰다. 특히 칼미크에 의해 자신들의 땅을 잃은 노가이는 칼미크의 잦은 습격 대상이 되었고 그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가축 등을 상당수 빼앗겨야 했다. 물론 칼미크가 서쪽으로만 약탈을 떠난 건 아니었고, 이들은 수시로 중앙아시아의 여러 칸국들을 약탈하며 그들에게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러시아는 칼미크에 접근하였고 러시아와 칼미크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이들의 관계는 러시아-코사크 관계와 비슷했는데 일단 칼미크족은 러시아의 명목상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러시아의 요구에 따라 일정한 수 이상의 기병대를 보내야하지만 대신 그들의 영역 내에서는 무슨 짓을 하던 러시아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관계는 1656년과 1662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갱신되었다.
물론 항상 관계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칼미크는 러시아의 법이 아닌 1640년 오이라트 각 부족들의 회의 결과를 토대로 준가르 분지에서 공표된 대법전 아치 짜아진 비치그(Iki Tsaadzhin Bichig)를 따랐고 양 측은 무역 과정에서 서로 불만족스러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더군다나 칼미크 족은 간혹 가다가 수틀리면 러시아에 대한 약탈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1682년 경 러시아측이 칼미크족에게 인질을 요구하자 분노한 칼미크 족은 카잔을 약탈하기도 했다.

- 칼미크 전사들 -
그러나 이후 러시아와 칼미크는 화해했고,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칼미크 족은 러시아를 위해 기병대를 파견하였고, 러시아는 북방 전쟁이나 크림, 오스만 등 남방의 이슬람 세력들과 전쟁을 벌일 때 칼미크 기병대를 아주 잘 써먹었다.
<아유카 칸>
이렇게 러시아랑 적당히 잘 지내던 1669년 아유카가 칼미크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즉위 과정에서 어느 정도 내란을 겪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아유카의 치세는 칼미크가 가장 영광스러웠던 시기이기도 했다. 아유카는 3년 후 아스트라한을 방문해 러시아 관리 앞에서 자신의 차르의 신하임을 확인하였다. 사실은 종속이라기보다는 공존이었지만. 그는 러시아의 요구에 응해 크림칸국과 오스만 제국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기도 했다. 칼미크 기병대는 많은 수의 투르크 인들을 죽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1682년 러시아의 인질 인도 요구에 분노하여 위에서 서술했던 카잔 공격을 벌이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고 1년 후에는 크림 칸국 등의 뇌물을 받고 이슬람 세력에 대한 공세를 중단하기도 했다.

- 엠파이어 토탈워에 등장하는 칼미크 기병대 -
러시아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는 1693년 러시아에 대항하는 바쉬키르인들을 러시아를 대신하여 응징하였고, 1697년에는 새로운 동맹 조약에도 서명하였다. 그리고 2차 빈 공방전 이후 벌어진 대 오스만 전쟁에도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칼미크 기병대는 1696년 오스만 군대를 격파했고, 아조프 공성전에도 참여하였다. 칼미크 기병대는 북방전쟁에도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인상 깊은 활약을 벌였고, 1708~1709년 우크라이나에 진입한 스웨덴 군대를 표트르 대제가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러시아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1722년 사라토프에서 아유카 칸을 정중하게 예우하며 접견하였다. 이 때 표트르 대제는 야유카에게 1만명의 기병대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다.(3) 하지만 아유카는 이런 요구에 5천 명의 병력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대답하는 여유를 보였다. 칼미크 기병대의 강력함, 동시에 칼미크의 힘이 러시아로써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화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아유카는 거리가 상당히 먼 편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티베트, 준가르 등과 연락을 하였고 통혼까지 하였다. 이런 열의 덕에 아유카는 갈단이 죽기 직전 달라이 라마로부터 칸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비록 아유카는 칸이 될 수 있는 황금씨족은 아니었지만 몽골 유목민들 사이에서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던 달라이 라마로부터 인정받은 칸이었으므로 나름대로 강력한 권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마침 갈단이 죽고 준가르의 지도자가 된 체왕 랍탄의 칭호는 겨우 콩타이지(4)였다. 당연히 아유카는 이 기회에 오이라트 전체를 지배하기로 결정하고 준가르로 15000호의 사람들을 자신의 아들 체렌 도르쿠에게 딸려보냈다. 하지만 이들은 체왕 랍탄에게 공격당해 사람들은 체왕 랍탄이 가져가버리고 체렌 도르쿠는 겨우 목숨만 건져 칼미크로 귀환해야 했다.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
아유카 칸은 1724년 2월 사망했다. 그의 아들 체렌 도르쿠는 멍청한 인물이었고, 설상가상 칸의 자리를 두고 내분이 터졌다. 칼미크의 약화는 필연적이었다. 더군다나 러시아 역시 이제 더 이상 칼미크의 좋은 이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칼미크에게 착취자로 비춰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럴만한 이유도 있었다. 18세기 들어와 러시아의 국력은 강해졌지만 그에 비례하여 규모가 큰 전쟁도 자주 치루게 되었다.(5) 그러면서 러시아는 칼미크 족에게 병력을 요구하는 빈도와 요구하는 병력의 숫자도 날로 증가하였다. 더군다나 러시아인들, 그리고 예카테리나 대제 즉위 후에는 독일인들까지 농사를 짓겠다면서 칼미크 족이 사는 볼가강 하구까지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1750년대부터 러시아인들은 칼미크에게 오이라트 부족들이 모여 결정한 법 대신, 러시아의 법을 따르라고 하면서 칼미크 족을 동화시키려고 했다.(6)
설상가상으로 러시아와 독일인 농민들이 몰려오면서 예카테리나 대제는 칼미크 족에게 좀 더 동쪽의 땅으로 이주할 것을 제안했는데 예카테리나 대제가 제안한 땅은 목축이 불가능한 땅이었다. 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지도만 본 예카테리나 대제와 그녀의 신하들이 내린 탁상 공론일 뿐이었지만 칼미크 족에게는 지금 우리보고 죽으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침 이 때 준가르가 멸망했다는 소식, 그리고 기근과 전염병, 그리고 청의 대학살로 준가리아 지역의 인구가 격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칼미크 족은 이 소식을 듣고 1750년대 후반부터 청의 건륭제와 접촉하며 이주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물론 건륭제는 준가르 평정과 준가리아 지역 인구 확보를 위해 이들의 이주를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그 정보가 새어나가기도 했다. 이로 인해 1767년의 이주 계획은 물거품으로 건너가기는 했지만 당시 칼미크의 지배자였던 우바시 칸은 예카테리나 대제에게 오리발을 내밀며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로부터 길일을 받은 후 1771년 1월. 카자흐족 정벌을 핑계로 부족민들을 불러모으며 이주를 시작했다. 그는 이주 전날에야 부족민들에게 이제 준가리아로 귀향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고난의 행군>
- 가자 고향으로! -
1771년 1월 5일. 칼미크족은 드디어 귀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주를 시작할 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부 칼미크 족은 오랫동안 그들의 터전이었던 볼가강 하구의 초원 지대, 즉 칼미크 초원을 떠나기를 거부했고, 하필 볼가강의 얼음이 생각보다 빨리 녹으면서 볼가강 서쪽의 칼미크 족 다수는 이주에 합류하지 못 하게 되었고 그 숫자는 6~7만명 정도였다. 그래도 20만 명의 칼미크 족이 우바시 칸을 따라 이주하기 시작했다. 우바시 칸은 주도면밀하게 정예부대를 보내 요새들 간 연락을 차단시켰다. 이로 인해 러시아 군대가 머무르던 오렌부르크에서 상황을 파악하는데는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예카테리나 대제한테 이 소식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서둘러 코사크, 바쉬키르 인들 자신의 군대에게 추격을 명하는 한편 이 무렵에 이미 어느 정도 러시아의 영향력에 들어가있던 카자흐 족, 그리고 그 동안 칼미크 족의 약탈에 시달렸던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계 유목민족들에게 칼미크 족의 탈출을 통보하고 그들을 막을 것을 요청했다. 칼미크족이 꽤 치밀하게 준비했음에도 그들은 여자, 아이, 노인까지 동반한 거대한 집단이라 속도는 느릴 수 밖에 없었고 추격대는 곧 칼미크 족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주하던 칼미크 족은 전통 명절은 쐬고자 하였고, 그래서 몽골의 설날 격인 차강사르가 되자 칼미크족은 도주 중임에도 불구하고 멈춰서서 춤추며 즐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법칙이라면 법칙이랄까. 이런 칼미크 인들의 행동은 안식일을 지키던 유대인들(7)이나 미사 일이라고 경계 안 하던 필리페 데 브리투의 고사가 생각나기에는 충분했다. 아니나다를까 카자흐, 러시아, 바쉬키르 연합군이 들이닥쳤고, 칼미크 족은 9천여명이 죽는 대패를 당했다. 이후 겨우 도주한 칼미크 족은 어느 협곡에서 러시아 군대에게 꼬리를 잡히지만 반격을 가해 5천명의 러시아 병력을 몰살시켰다.
하지만 이것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추격을 단념시키게 하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칼미크 족은 이들의 추격을 어렵게 하기 위해 늪지대로 들어갔는데 이것이 칼미크 족에게도 독이 되었다. 하필 식량도 떨어지고 가축들에게 먹일 풀도 없는 지역이라 칼미크 족은 눈물을 머금고 가축들을 죽였는데 이 때 죽인 가축들이 칼미크 족이 데려온 가축 숫자의 절반이었다. 더군다나 겨울이라 해도 늪지대가 완전히 얼어있던 것도 아니라 3천~5천명 가량이 늪지대에서 빠져죽었다. 당연히 병이나 굶주림으로 죽은 사람도 많았다. 이 늪지대를 1달 가량 통과했는데 통과했을 때는 그나마 남아있던 가축들도 거의 죽어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우바쉬 칸은 추격대가 이들을 앞질러서 늪지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우바쉬 칸은 우회로를 택했다. 문제는 그 우회로는 사막지대였다는 것이었다. 물론 사막지대와 늪지대 사이에 초원지대가 있기는 했지만 하필 러시아군의 청야 전술로 쑥대밭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별 도움은 되지 못했다. 당연히 사막지대에서 칼미크 족은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수시로 찾아오는 러시아와 바쉬키르, 카자흐 추격대의 습격에 시달려야 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들은 이렇게 겨우 탈라스 강에 도착했으나 여기서 자신들의 땅을 지키려는 키르기스 군대와 조우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결국 이들은 다시 사막지대로 들어가야했고, 역시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 때 상황이 처참하여 우바쉬 칸의 딸도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다 죽어야했다. 그렇게 그들은 겨우 청나라가 통제하고 있던 그들의 고향, 이리 일대에 도착했다. 이 때 도착한 칼미크 족은 출발할 때의 절반 이하로 겨우 8만여명 정도였다.

하지만 워낙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던 이들이라 고향에 돌아온 후에도 청이 칼미크 족을 수용하는 동안에도 1만 명 가량이 죽었다. 당시 수용 절차를 담당했던 청의 관리 서혁덕은 건륭제에게 보내는 상소에서 그 처참한 실상을 알 수 있다.
"투항한 자들을 살펴보니 노약자나 부상자,아녀자들이 많았는데 ,너나 없이 정신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저들이 우리주둔지로 들어온 후 모두들 통곡하고 애원할 따름 었습니다 .그들의 참혹하고 궁핍한 모습을 보면서 실로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옷이 제대로 없었으며 ,그나마 입고있던 옷도 다 찌져지고 아이들은 아예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습니다 .신발을 신지 않은 이도 부지기수 입니다 , 도중에 극도의 기아에 허덕였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 고기를 포식한 후 온몸에 열이 나자 물로 뛰어 들어 배가 불어 죽거나 병이 들어 죽은 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 서혁덕의 상소 -
- 서혁덕의 상소 -
이렇게 이들은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왔고, 준가리아에 정착하였다. 참으로 힘든 귀향이었다. 건륭제는 이들의 귀환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자신의 공덕을 찬양하는 두 개의 비석을 세웠다.
<남은 자들의 운명>
칼미크 족의 귀향은 어찌 되었든 성공한 셈이 되었다. 이 소식은 당시 귀족 및 정부의 압제에 시달리던 러시아의 하층민들과 소수민족들에게 자극제가 되었다. 마침 표트르 3세가 백성들을 위해 일하려다가 아내 예카테리나에게 죽었다는 뜬소문까지 나돌았고 이런 사회적인 상황을 이용하려던 코사크 출신 푸가초프가 표트르 3세를 참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 남아있던 칼미크 족들 중 일부도 권리 향상을 위해 다른 소수민족들처럼 푸가초프를 도왔다.
물론 푸가초프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제 노골적으로 칼미크 족을 동화시키고자 하였다. 칼미크의 자치권은 사라졌고 칼미크 족은 이제 돈 코사크에 편입됬다.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러시아는 이미 칼미크족의 대탈출 이전부터 이들을 정교회로 개종시키려고 했다. 그 결과 이미 일부 상류층은 러시아 정교회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것은 대탈출 이후로 한층 노골화되었는데, 러시아 정부는 칼미크 승려들이 수행을 위해 티베트로 떠나는 것을 제한했다. 또한 불교 사원을 러시아 정부가 지정한 곳에서 러시아 건축 양식에 따라 지을 것을 칼미크족에게 강요하고 고위 승려를 직접 임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칼미크 사원은 칼미크족의 빈곤화와 더불어 19세기 경부터 감소하기 시작했다.

칼미크족의 활약 역시 미미해져갔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칼미크 족 군대가 종군하기도 했고 1807년 틸지트 전투 이후 맺어진 틸지트 화약 당시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나폴레옹에게 칼미크 지휘관을 소개시켜주기도 했다. 하지만 칼미크족이 돈 코사크 휘하에서 싸우게 된 만큼 이들의 군사적 기록은 미미할 수 밖에 없고, 점차적으로 러시아 내에서의 비중도 줄어갔다. 그나마 비중있는 것이라고는 레닌의 할머니가 칼미크족이라는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 정도랄까...
<최악의 시련 그리고 현재>
그러던 중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터지며 적백내전이 발발했다. 당시 돈 코사크에 속해 있던 칼미크 족은 돈 코사크에 딸려 백군으로 참전하였다. 칼미크족은 유목민들을 적대시하는 소비에트를 따르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일부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백군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려는 분위기가 감돌게 되었다.
하지만 적군은 신속하게 볼가강 일대를 장악했고 1만명이 넘는 칼미크 기병대를 적군으로 편입시키며 이들의 백군 합류를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백군에 참여한 일부는 결국 적군에게 패배하고 도주했는데 지도층 인사들은 처형되었고, 나머지는 일단 사면을 받아 볼가강 하구에 살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모스크바 당국은 적백 내전이 어느 정도 정리되던 1920년 칼미크족이 사는 지역을 자치주로 만들어주었고, 1935년에는 자치 공화국으로 승격시켜주었다. 얼핏 보면 칼미크 족에 대한 대우가 제정 러시아 시절보다 좋아진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놈이 그 놈이었다. 소련 당국은 칼미크족이 17세기경 고안해낸 몽골 문자와 비슷한 문자 대신 키릴 문자를 쓸 것을 강요하여 성공시켰고,(8) 티베트 불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 사원을 폐쇄하고 승려들을 총살시키거나 시베리아 유형지로 보내버렸다. 그리고 1930년대 들어서는 집단 농장을 도입하며 칼미크가 유목 생활을 버리도록 강요하였다.
결정적인 시련은 1944년에 찾아왔다. 의심 많은 스탈린은 이 무렵 수많은 소수민족들을 나치와의 내통 혐의가 있다며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시켰는데 이 때 칼미크 족도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 칼미크 족은 강제로 볼가강 하구를 떠나 생판 다른 곳인 중앙아시아로 이주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더군다나 칼미크 족의 시련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솔제니친의 명저 수용소 군도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일인들과 그리스인들이 경제적 성공을 거두고 있을 때, 고려인들이 상당한 활동의 자유를 얻고, 중앙아시아의 여러 교육 기관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떠오를 때(9), 하다못해 체첸인들이 그들의 호전적인 민족성으로 소련 관리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있을 때, 칼미크 족은 외롭게 죽어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수용소 군도에서 솔제니친은 칼미크 족의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적어도 이런 말이 나온 것 자체가 칼미크 족의 처지가 좋지 못한 것이 널리 퍼져있었다는 이야기는 될 것이다.
- 칼미크 족 강제 이주 희생자 위령비 -
이런 규제는 1980년 대 고르바초프의 페테스트로이카 등으로 풀리기 시작했다. 1988년부터 불교 사원이 다시 건설되었고, 칼미크어 복원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된 이후 이런 운동은 더욱 활력을 받게 되었다. 다만 인구 문제 등으로 칼미크 자치 공화국 정부는 몽골 정부 등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고 한다.
(1) 각각 초로스, 토르구트, 도르베트, 코슈트이다.
(2) 오이라트는 에센 칸 사후로 분열되어 있던 상태였다.
(3) 북방전쟁은 끝난 시점이기에 정황상 표트르 대제는 페르시아 원정을 위한 병력을 요청했을 공산이 크다.
(4) 콩타이지는 태자라던지 대공, 지도자 정도로 생각하는 게 좋은 칭호이다. 칸보다는 지위가 낮다.
(5) 아유카 칸 사후부터 칼미크 족의 대탈출 까지 러시아가 치룬 전쟁만 해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러시아-오스트리아-투르크 전쟁, 러시아-스웨덴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바르 동맹 토벌, 러시아-투르크 전쟁 등 상당히 많은 전쟁을 치루었고 이 전쟁들의 규모 역시 상당한 수준인 것이 많았다.
(6) 물론 동화 정책은 이전부터 종교를 중심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7) 유대인들도 하도 당한 나머지 마카베오 등이 셀레우코스 왕조에 대항할 때는 안식일 따위 무시하고 그냥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 때 다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공격을 하지 않다가 로마군에게 패배했다.
(8) 라틴 문자, 즉 알파벳 도입 시도도 있었으나 실패했다.
(9) 솔제니친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교육열로 교육 기관들을 점령했다고 표현했다. 고려인들은 나중에 경제적인 성공도 거두지만 이것은 60년대의 일이었다.
덧글
그러고보면 대개 유목민족들이 서방으로는 많이 가도 이상하게 동방으로 오는 경우는 없더군요. 칼미크의 귀환을 그렇게 보면 참 재밌는 현상이 아닐까 싶네요.
그동안 정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Khayr// 확실히 그런 감이 있더군요.
그리고, 링크 신고합니다.
연재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지킨다고 하다가 폼페이우스에게 당하고
최악의 수모까지 당하죠
유대 성전의 지성소
대사제 이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는 곳에 군화발로 들어간 폼페이우스...
물론 그 때는 들어가봐야 건질 것도 없었지만..
찢어놨는지 한국인들은 찌라시 언론에 세뇌되서 잘 모르지요,, 한국 언론도 철저히 쉬쉬하고 ,,,기독교선교사들은
저들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요, 우리가 노가이니 칼믹이니 타타르니 하는데,,사실은 저들은 한국인과 핏줄이
같은...조상이 같은 동이족 계열입니다. 유투브에 "kalmyk song, nogai song, tatar song등을 검색해 보시면
음운과 가락,박자가 한국인의 정서와 아주 잘 맞고요...타타르인, 노가이인등도 러시아계,아랍계와 혼혈화된지
2대나 3대정도밖에 안된게 대부분이고,,즉 소련공산당 시절에 혼혈화 시킨 겁니다.
그 원인은 소련공산당의 실체에서 찾아야 합니다. 소련 공산당은 그 배후가 서양 유퇘금융자본이고,
영미 지배층과 소련공산당 지배층은 그 핵심이 모두 유퇘자본과 그 똘마니 유퇘들입니다.
소련 공산당 핵심인물 59명중에 56명이 유퇘인이었고,,,나머지 3명도 유퇘인을 마누라로 두었으며
레닌,트로츠키등 볼세비키 공산당 혁명인물 대부분이 유퇘계였고,,,스탈린역시 그루지야 태생 유태인으로
성씨와 이름까지 러시아식으로 위장한 겁니다. 원래 이름은 요셉 쥬가쉬빌로 그루지아 태생 유태인으로
영미를 조종하는 로쓰차일드의 똘마니출신으로 지금의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로쓰차일드 똘마니로 노동자들
선동하던 놈이었구요,,,러시아를 공산주의로 장악할려고 영미와 서유럽 유퇘들이 돈을 대줘서 러시아를 집어삼킨게
바로 유퇘자본입니다. 이들은 스탈린을 내세워서 러시아 남부와 중앙아시아의 동이족들을 혼혈화시키거나
잡종화시키거나 세력을 약화시킬려고 강제이주를 하거나..시베리아에 러시아백인 범죄자들을 이주시켜서
시베리아의 동이족들을 혼혈화시키는 수작질을 벌였습니다. 중국이 공산화된 이유역시 유퇘자본이 유퇘인 루즈벨트
정권과 유퇘인 스탈린정권을 시켜서 양쪽에서 손문,장개석 모택동을 후원했고요..공산화가 완성되자 사냥개역할을 했던 일제와 장개석은 열도와 대만섬으로 쫒아낸겁니다. 토사구팽한것이지요...
그래서 중앙아시아와 칼믹족등 남러시아의 동이족 학살과 인종청소엔 유퇘족이 깊숙히 개입되있고..
이것을 소련공산당이라는 가면을 디집어쓰고 벌인 일입니다. 히틀러와 나찌당역시 이놈들이 배후에서 돈을 대줘서
독일을 장악한 것이고요..스탈린그라드에서 대량의 동이족을 총알받이로 학살했는데..이 작업엔 히틀러 나찌군과
스탈린군의 합작이 있었습니다. 사실 스탈린은 히틀러 침공전에 실각위기에 있었는데 러시아 민족주의 세력이
소련공산당이 유퇘세력임을 알고 스탈린을 실각시키려고 저항했었는데...이때 히틀러와 나찌군이 러시아침공으로
스탈린을 살려주면서....오히려 중앙아와 러시아남부 동이족 몽골계를 대량 차출해서...총알받이로 인종청소 한겁니다.
이 모든 작업에 유퇘자본이 배후에 있고요..그래서 서방언론은 스탈린의 동이족 대학살을 철저히 숨기는 거고요..
우크라이나인 수백만명을 굶어죽인 스탈린은 굶주림에 지친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집과 땅을 주겠다며
시베리아로 이주시켜서 수십만명을 시베리아와 극동에 사는 동이족 거주지로 이주시켜서 역시 혼혈을 조장했고요..
극동에 살던 고려인들을 지식인은 3천명가까이 학살한 후에 글과 역사를 모르는 나머지는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켜서 인종청소한 더러운 유퇘인 놈이죠..한국 언론에서 이런 사실을 숨기는 것은
한국 정치인들 핵심은 영미의 지배자가 유퇘자본임을 잘 알고있고..그래서 일부러 한국의 언론과 정치세력은
좌우를 막론하고 이런것을 철저히 숨겨서 한국인들이 알지못하게 하는 겁니다.
사실 한국전역시 이놈들이 배후에서 기획한 시나리오인데... 한국전때 모택동군과 한국군양쪽 모두에
기름을 대준놈들이 이놈들이죠...북한 나진항으로 몰래 기름을 실어 날랐다고 합니다.
남과북 양쪽 서로 죽이게 만들어서 영원히 원수로 만들고....한반도에 군대를 주둔할 명분을
만들려는 속셈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