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사크의 기원과 풍습>

- 코사크족을 묘사한 그림 -
코사크. 아마도 코사크 댄스라는 특이한 춤과 몇몇 문학작품을 통해 익숙하게 다가오는 이 우크라이나와 남러시아를 떠돌던 이 유목민들의 기원은 조금 불분명한 구석이 있다. 몇몇 학자들은 이들이 10세기 경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하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코사크족이 1240년 키예프 공국이 멸망한 후 그 유민들과 쿠만족, 체르케스인등 남러시아의 투르크계 유목민들이 결합하면서 형성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코사크란 명칭은 이것보다 좀 더 논쟁이 분분한데 일반적으로는 '얽매이니 않는 자'들을 의미하는 투르크어 '카작'에서 유래했다고 하지만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방랑하는 자'를 지칭하는 '카즈마크', 혹은 쿠만족이 '수호자'등의 의미로 사용했던 '카자크'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흔히 코사크는 카자크라고도 불려지며 카자흐족등과 혼동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런 경향은 소련측이 철자나 발음 등이 비슷하고 유목민족이란 공통점이 있는 카자흐족과 코사크족을 그냥 닥치고 똑같은 이름으로 지칭하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두 종족은 분명 유목민족이기는 하지만 언어계통부터 문화, 생김새 등 다른 것이 너무나도 많다. 일단 카자흐족은 투르크계의 이슬람교도들이고 코사크족은 인도유럽어계 언어를 쓰는 유럽계 동방정교회 신자들이다.(1)
이들은 유랑생활을 하게 된 러시아 공국들의 생존자들과 폴란드나 모스크바 등에서 도망쳐 나온 유랑민들, 그리고 토착 투르크계 유목민족들을 받아들이면서 그 숫자를 불려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 대해 믿을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은 모스크바 공국의 연대기에 나온 기사로 이 기사에 의하면 1261년에 볼가강과 돈강 일대에 슬라브계 유목민들이 존재한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돈강 유역의 코사크족들은 모스크바 공국의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에게 성모 이콘을 바친 것으로 알려져있다.
초창기 코사크족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킵차크 칸국의 통제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4~15세기에 걸쳐 모스크바 공국과 리투아니아의 세력이 남하하고 킵차크 칸국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우크라이나 일대의 코사크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통제를 받게 되고 남러시아 일대의 코사크는 모스크바 공국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 오스프리에서 묘사한 코사크족 모습. 1번은 17세기 초의 자포로제 지도자. 2번은 17세기 우크라이나 코사크. 3번은 17세기 후반의 우크라이나 코사크 기병이다. -
하지만 그들의 통제와는 별개로 코사크는 그들의 풍습을 유지하였다. 코사크족은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지만 독특한 머리모양이나 헐렁한 바지 등 유목민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시츠라고 불리는 조그만 정착지들이 모여 연방 형태를 이루었으며 각 시츠는 나름대로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하지만 시츠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락을 했고 끈끈한 단결력을 과시했다. 이 단결력은 코사크족의 전통으로써 코사크 족은 부족원 중 한명이라도 납치되서 노예로 팔려가게 되는 상황이 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부족원을 구출하기 위해 군대를 움직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 이들은 꽤나 유쾌한 친구들이기도 했다. 1번은 군복 입은 코사크. 2번은 장교. 3번~5번은 모두 코사크 병사 -
코사크 족은 매우 평등했는데 그들의 족장 헤트만(2)도 선출직인데다가 헤트만이 업무를 태만하게 한다고 여기면 부족원들은 헤트만을 탄핵할 수가 있었다. 동시에 평시에는 헤트만 앞에서 어떤 말을 해도 거의 문제시 되지 않았다. 단 전시가 되면 총지휘관인 헤트만의 권력은 매우 강해져 즉결처분권이 주어졌을 정도였다.
이들은 유목생활도 했지만 농사도 병행하였다. 물론 평탄한 스텝 지대에 사는 만큼 이들은 기마술에 능숙했다. 단 타타르족들이 활을 선호한 반면 이들은 총을 선호했다. 근접 무기로는 창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고 대포는 기동성을 이유로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 단 대포의 위력을 무시하지는 않아서 소형 대포는 마차에 달아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메이스, 즉 철퇴의 경우 간혹 사용되었으며 동유럽권이 모두 그렇듯이(3) 지휘관의 권위를 상징하기도 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와의 협력과 전쟁>
14~15세기 들어와 일부 코사크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이들의 군사적 가치에 주목하여, 이들이 자신들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전쟁이 벌어질 때 병력(주로 경기병)을 보내주기만 하면 된다는 조건으로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그냥 내버려두었다. 종교도 건드리지 않고 그들 마음껏 활보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덕분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보호를 받으며 이들은 마음껏 크림 칸국을 약탈하였다.
단 이 시기 코사크들은 3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첫번째로 반자치적은 조직을 운영하며 연방의 통제를 받는 국경 지대 코사크. 연방의 용병으로 복무하며 어느정도 부를 얻고 종교 등 그들의 풍습을 광범위하게 인정받은 등록 코사크, 등록 코사크보다는 빈곤하고 연방의 통제를 받기는 하지만 국경 지대 코사크보다 훨씬 자유로우며 그 수도 가장 많고 주류이기도 한 자포코제 코사크로 나뉘어졌다. 이 세 부류는 그들이 처한 환경이 달라 반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6세기 후반.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지그문트 3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코사크족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다. 이에 분노한 코사크족들은 1591년 코친스키 주도로, 그리고 다시 1594년 세멘 날레바이코의 주도 하에 훗날 '대장 불리바'란 소설로 잘 알려지게 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두 반란 모두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시아-볼히니아 지방까지 휩쓴 대대적인 반란이었지만 두 반란 모두 연방 최고의 명장들인 얀 카를 코드키비에츠, 스타니슬라브 주키에브스키에 의해 진압되었다.

- "우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위해 충성을 다한다!" -
이후 한동안 코사크 족은 조용했다. 코사크 족은 다시 연방을 위해 봉사하였으며 키르홀름, 체초롱, 호틴 전투에도 종군하였다. 특히 호틴 전투에서 코사크 족의 소규모 경기병대는 오스만 2세의 오스만 제국군을 농락하며 시간을 휼륭하게 벌어주었고, 호틴 요새에서도 오스만 제국의 측면을 교란하며 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당시 코사크 족의 족장이었던 사하이다치니는 국가의 은인으로 대접받고 화려한 마차를 하사받기도 했다.(4)

- "못 살겠다! 갈아보자!" -
보흐단 크미엘니치크가 이끄는 자포로제 코사크-크림 칸국 연합군은 여러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군을 격파했다. 그 기세로 크미엘니치크는 1648년 크리스마스에 키예프에 입성할 수 있었고 164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 얀 카시미에슈 2세에게 광범위한 자치권을 코사크에게 주는 지브리브 조약을 강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 전쟁이 재개되었고 이번에는 반대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자포로제 코사크와 크림 칸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에 크미엘니치크는 1653년 러시아에 충성을 할테니 지원해줄 것을 요구했다. 러시아의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는 처음에는 폴란드와의 충돌을 우려하여 이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5) 그러나 젬스키 소보르(6)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힘이 많이 약화되었다고 보고 개입하는 것이 좋다고 결정했고 알렉세이 역시 이 판단에 동의, 페레야슬라브조약을 통해 자포로제 코사크의 충성 맹세를 받아내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공격했다. 국력이 피폐해져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의 침공으로 빌뉴스까지 위협받는 상황이 전개되었고 이는 대홍수로 확대되었다.
이후 1667년 러시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안드루소보 조약을 맺으면서 자포로제 코사크는 이제 연방이 아닌 차르의 신하가 되었다. 다만 서부 우크라이나의 코사크는 아직 연방의 통제를 받았고, 이에 불만을 품은 서부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헤트만 표트르 도로셴코는 우크라이나 지배 등을 위해 크림 칸국, 오스만제국을 끌어들여 연방을 공격했다. 이 전쟁 자체는 오스만 제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정작 도로셴코는 얀 소비에스키에 의해 패배하고 러시아로 도주했다. 하지만 이슬람교도를 끌어들인 것에 분노한 러시아는 그를 추방했다. 어찌 되었든 17세기 중엽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으로 코사크족은 점차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통제권 밖으로 벗어나게 되었다.
"자포로제 코사크들이 술탄에게 말한다!
"너, 터키 악마이자 빌어먹을 악마들의 형제이자 친구, 루시퍼의 개인비서야. 넌 도대체 얼마나 극악한 기사길래 니 엉덩이에 붙은 고슴도치 하나 못죽이냐? 악마의 똥이자 네 쫄따구들이 먹는 짬밥같은 새끼. 너같은 개새끼는 절대로 그리스도인의 아들들을 상대하지 못한다. 우린 결코 너희 군대를 두려워 하지 않으며, 땅위에서나 물위에서나 승리해서 네 어미를 따먹고 말테다.
너는 바빌론의 설거지꾼, 마케도니아의 바퀴제작자, 예루살렘의 양조자, 알렉산드리아의 염소랑 비역질 하는 놈, 상하이집트의 돼지치기, 아르메니아의 돼지, 포돌리아의 도둑놈, 타타르의 남창, 까먀니쯔의 망나니, 그리고 이 세상과 저승을 통틀어 가장 돌대가리인 놈이다. 주님앞의 천치, 독사의 손자, 우리 거시기의 경련. 돼지코, 암당나귀의 엉덩이, 도살장의 똥개이자 이교도 대가리, 네 어미나 실컷 따먹어라!"
이것이 자포로제 분들께서 너같은 새끼한테 하사하는 답장이다. 너는 그리스도교인의 돼지를 몰 자격조차 못된다. 이제 우린 끝을 맺고자 하는데, 우린 날짜를 알지 못하고 달력도 갖고있지 않다. 달은 하늘에 떠 있고, 년도는 책에 쓰여있고, 날짜는 네놈이 있는 곳의 날과 똑같다. 그러니 우리 엉덩이에 뽀뽀나 해라!"(8)
당연하겠지만 제정 러시아 당시 존재했던 코사크족의 행정구역들은 모조리 해체되었고, 코사크족은 억압받는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코사크 족은 소련에 대한 충성 자체가 의심받는 억압받는 민족이 되어버렸다. 적백내전이 종결될 당시 백군 편에 선 코사크 족 다수는 소련을 피해 해외로 도주했고 도주하지 못한 자들은 처형되거나 시베리아 유형지로 끌려가버렸다. 하지만 적군 편에 선 코사크 족도 이 훈령 덕에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나마 시간이 지나며 의심이 어느 정도 해소된 덕에 코사크 족은 1936년부터 소련군에 입대할 수 있게 되었다.
<2차 대전, 그리고 현재>
-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개선식에 참여한 코사크 군대 -
그러던 중 1941년 6월 나치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곧 모스크바 목전까지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코사크 족 다수는 소련군에 입대하여 소련군을 위해 싸웠다. 코사크족 기병대는 군마로 하여금 초가집의 초가 지붕을 뜯어먹게 하며 빠른 속도로 진격해 독일군을 도륙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세묜 부돈늬 원수는 이런 코사크족의 용맹을 찬양하며 그들이 항복하는 독일군의 손까지 베어버린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소련이 코사크족에게 그동안 가했던 탄압의 영향 때문에 나치 독일에 부역한 코사크족들도 존재했다. 이들 부대 역시 나름대로 활약했으며 독소전 당시 상당히 악명을 떨친 것으로 알려져있다. 물론 그 숫자가 많은 편은 아니라 나치 독일이 겨우 코사크족으로 2개 사단정도를 창설했을 때 소련은 코사크 족 출신으로 17개 사단이나 만들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이 패배함으로써 나치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후퇴하게 된다. 코사크 사단들 역시 같이 후퇴하다가 1945년 서방측에 투항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얄타 회담 등을 거친 미국과 영국은 코사크족은 서방 측이 포로로 잡아도 모조리 소련에 넘겨주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서방은 오스트리아의 린츠 등에서 코사크 족 수 만명을 통째로 소련측에 넘겨주었고 미국 거주 코사크족 백여명 가량도 이 때 소련으로 보내졌다.(13) 당연히 소련은 서방 측이 넘겨준 코사크족들 중 몇몇은 바로 처형해버리고 나머지는 모조리 시베리아 유형소로 보내버렸다가 흐루시초프가 집권하고 나서야 사면해주었다.
문제는 서방측이 이 과정에서 문제를 많이 일으켰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치 휘하에서 복무한 코사크족 병사들은 잔학행위를 꽤 많이 저지르기도 했기 때문에 소련이 처벌하려고 하는 것은 이상한 것도 아니었고 이들의 행동을 생각하면 서방측이 그들을 넘기는 것도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서방은 여자와 아이들, 심지어는 전부는 아니지만 독소전쟁과는 별로 상관 없이 적백내전 당시 망명해왔던 코사크족들도 넘겨버렸다. 그들은 딱히 나치 독일에 부역하지도 않았고, 특히 적백내전 당시 망명한 사람들은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이들까지 통째로 넘겨준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는 행동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흐루시초프가 이들을 사면해준 뒤에도 한동안 코사크족의 대우는 좋지 못했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 억압받았던 민족들의 복권에 대한 법이 통과되면서 코사크족에 대한 대우는 좋아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 덕에 코사크족은 세력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고, 체첸 전쟁 당시 군대를 편성해 러시아군을 돕기도 하였다. 그 이외에도 2009년 경 북카프카스 지역에 존재했던 구 테레크 코사크 구역을 다시 부활시키자는 건의를 하기도 했다. 물론 진짜로 그렇게 했다가는 친러계 잉구세티야, 체첸, 다게스탄 자치 공화국 정부들이 모조리 북카프카스에미리트(14)편으로 돌아설 우려가 있기 때문에 건의는 기각된 것으로 보인다.
<게임 속의 코사크>
코사크족이 워낙 러시아의 군사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만큼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에서 러시아가 등장할 경우 코사크는 높은 확률로 러시아의 특수 유닛으로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의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이외에도 엠파이어 토탈워나 나폴레옹 토탈워에서도 코사크족은 등장한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의 코사크 기병 모습 -
하지만 이런 게임에서 나올 경우 코사크족은 은근히 취급이 좋지 않은 편으로 전반적인 설정이 '가격이 싸지만 그 대신 성능도 비슷한 종류의 다른 유닛들보다 낮다.'식인 경우가 많다. 그나마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는 카드를 통해서 강화시킬 수 있지만 토탈워 시리즈에서는 그것도 안 된다고 봐야 되니....
(1) 이는 타타르에서도 알 수 있다. 보통 타타르는 러시아를 지배한 몽골족을 이르는 명칭이기도 하지만 간혹 쿠만족을 가르키는 명칭으로 쓰인다. 동양권에서 폴로베츠인의 춤이 간혹 달단인의 춤이란 제목으로 소개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2) 후스 전쟁 당시 보헤미아에서 쓰여진 명칭에서 유래된 것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원수를 가르키는 단어이기도 하다.
(3) 이슬람권의 영향으로 동유럽에서는 지휘관이 지휘 등의 용도로 메이스를 쓰는 일이 흔했다.
(4) 정작 사하이다치니는 호틴 전투 당시 입은 부상으로 1622년 병사했다.
(5) 사실 코사크족은 그 전에도 여러 번 러시아에 지원 요청을 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면전을 두려워한 모스크바가 그 때마다 모두 거부했다.
(6) 러시아의 전국 회의의자 신분제 의회.
(7) 이 일화 자체는 창작의 가능성이 높아보이지만 적어도 그림으로 그려질만큼 꽤나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다.
(8) 현재 이 편지는 jager의 번역본, 골리앗의 번역본, 앨런비의 번역본이 존재한다. jager 번역본은 가장 먼저 나왔지만 욕을 의도적으로 생략, 순화한 반면 골리앗 번역본은 욕까지도 충실하게 반영하여 이것이 가장 많이 퍼졌다. 앨런비 번역본은 골리앗 번역본보다도 욕을 더욱 충실히 반영했지만 워낙 늦게 나온 번역본이라 묻혔다...
(9) 하지만 러시아가 오스만제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하여 아조프를 접수하려고 하지를 않자 결국 아조프를 포기해야 했다.
(10) 여기서의 구교도는 카톨릭교회가 아니라 1652년 러시아정교회 총대주교가 된 니콘의 그리스식 의식으로의 전환 등을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에 반발하다가 쫓겨난 사제들로부터 비롯된 종파이다. 전통 의식을 고수한 이들은 러시아 정부의 탄압을 받았지만 끈질기게 그 교세를 이어나갔다고 한다.
(11) 다만 현재는 대부분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2) 바다갈매기란 뜻이다.
(13) 이 때 코사크족이 반항하자 최루탄이 사용되고 수면제 커피까지 동원되었다고 한다.
(14) 이츠케리야 체첸의 수장 도쿠 우마로프가 2007년 이츠케리야 체첸을 해산하고 새로 만든 분리주의 조직. 북카프카스 지역의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너, 터키 악마이자 빌어먹을 악마들의 형제이자 친구, 루시퍼의 개인비서야. 넌 도대체 얼마나 극악한 기사길래 니 엉덩이에 붙은 고슴도치 하나 못죽이냐? 악마의 똥이자 네 쫄따구들이 먹는 짬밥같은 새끼. 너같은 개새끼는 절대로 그리스도인의 아들들을 상대하지 못한다. 우린 결코 너희 군대를 두려워 하지 않으며, 땅위에서나 물위에서나 승리해서 네 어미를 따먹고 말테다.
너는 바빌론의 설거지꾼, 마케도니아의 바퀴제작자, 예루살렘의 양조자, 알렉산드리아의 염소랑 비역질 하는 놈, 상하이집트의 돼지치기, 아르메니아의 돼지, 포돌리아의 도둑놈, 타타르의 남창, 까먀니쯔의 망나니, 그리고 이 세상과 저승을 통틀어 가장 돌대가리인 놈이다. 주님앞의 천치, 독사의 손자, 우리 거시기의 경련. 돼지코, 암당나귀의 엉덩이, 도살장의 똥개이자 이교도 대가리, 네 어미나 실컷 따먹어라!"
이것이 자포로제 분들께서 너같은 새끼한테 하사하는 답장이다. 너는 그리스도교인의 돼지를 몰 자격조차 못된다. 이제 우린 끝을 맺고자 하는데, 우린 날짜를 알지 못하고 달력도 갖고있지 않다. 달은 하늘에 떠 있고, 년도는 책에 쓰여있고, 날짜는 네놈이 있는 곳의 날과 똑같다. 그러니 우리 엉덩이에 뽀뽀나 해라!"(8)
<러시아의 첨병, 그리고 반항과 좌절>

- 코사크 기병대를 묘사한 그림 -
한편 15~16세기 들어와 또 다른 코사크족들은 모스크바 공국. 즉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돈 코사크라고 불려졌다. 러시아는 폴란드가 코사크족을 대했던 것 처럼 그들의 자치권을 보장해주고 대신 그들이 전쟁 시에 러시아를 위해 봉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전반적으로 돈 코사크와 러시아 모두 정교회를 믿었기에 큰 충돌은 없었다. 돈 코사크는 러시아가 시베리아로 확장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코사크 족은 여러 곳으로 흩어져 카프카스의 테렉 강유역, 시베리아, 아무르 강 및 우수리 지역까지 퍼져나갔다.
- 소설 폴란드 기병으로 어느정도 알려진 렘브란트의 그림. 악명 높은 리소브치치를 묘사하고 있다. -

- 코사크 기병대를 묘사한 그림 -
한편 15~16세기 들어와 또 다른 코사크족들은 모스크바 공국. 즉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돈 코사크라고 불려졌다. 러시아는 폴란드가 코사크족을 대했던 것 처럼 그들의 자치권을 보장해주고 대신 그들이 전쟁 시에 러시아를 위해 봉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전반적으로 돈 코사크와 러시아 모두 정교회를 믿었기에 큰 충돌은 없었다. 돈 코사크는 러시아가 시베리아로 확장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코사크 족은 여러 곳으로 흩어져 카프카스의 테렉 강유역, 시베리아, 아무르 강 및 우수리 지역까지 퍼져나갔다.

- 소설 폴란드 기병으로 어느정도 알려진 렘브란트의 그림. 악명 높은 리소브치치를 묘사하고 있다. -
물론 항상 러시아에 충성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 동란 시기 당시 일부 돈 코사크 족들은 가짜 드미트리를 지원하기 위해 온 리소브스키의 부하들로 들어가 그 악명 높은 경기병대 리소브치치의 일원이 되었다. 동란의 시대가 끝난 후 이 코사크족이 포함된 리소프치치 중 일부는 보헤미아로 흘러들어가 황제와 바이에른을 도와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를 무찌르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단 이 용병대의 잔인함과 포악함에 경악한 카톨릭측은 백산 전투 이후 이들을 해산시켰다.
동란의 시대가 지난 이후 코사크족은 다시 러시아에 충성했다. 물론 자치권도 그대로라 호틴 전투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지원하기도 하고 1637년에는 독자적으로 아조프를 점령하기도 하였다.(9) 하지만 러시아의 전제정이 강화되며 농민에 대한 통제와 억압이 강해지고 이 과정에서 코사크 역시 이전보다 강한 통제를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당연히 생겨났다. 이들은 서로 뭉치기 시작했고 그 지도자로 돈 코사크 하층민 출신인그 유명한 스텐카 라진이 선출됬다.
- "이대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대로 살 수는 없다!" -
스텐카 라진의 무리는 처음에는 볼가강 등을 오가는 선박 등을 공격했다. 그리고 1668년에는 대담하게도 페르시아를 습격하여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후 스텐카 라진은 1670년 6월 반란을 일으켜 아스트라한, 볼고그라드 등을 점령하고 귀족들을 제거한 뒤 코사크 자치 공동체를 세웠다. 그리고 그는 불만을 품은 농민, 코사크, 소수민족들을 모아 사라토프와 사마라까지 함락시켰다. 하지만 모스크바에서 내려온 정예군대에게 대패, 도주하다가 1671년, 그의 형제와 함깨 코사크 지도층들에게 붙잡혀 모스크바로 압송된 후 처형되었다. 하지만 그는 민중들의 영웅으로 남았고 페르시아 혹은 러시아의 어느 영주의 딸과의 사랑에 대해 다룬 민요가 러시아에 유행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돈 코사크 출신 불라빈이 북방전쟁 중이던 1707년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당했다. 한편 17세기 중엽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대신 러시아의 통제를 받게 된 우크라이나 코사크족들 중 일부도 러시아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일부 코사크 족들은 1708~1709년, 칼 12세의 스웨덴 군대가 우크라이나로 진격하자 그에게 합류하기도 했다. 물론 폴타바 전투에서 러시아 군대가 승리하면서 이들은 죽거나 오스만제국으로 도주해야했다.
그리고 코사크 족은 1773년 다시 한 번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지도자는 돈 코사크 출신의 탈영병 예멜리아 푸가초프였다. 그는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폐위되고 살해된 표트르 3세를 참칭하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당시 러시아는 전제 군주정이 강화되며 농노제가 강화되고, 피지배층과 소수민족들, 그리고 구교도(10)들을 압박하였다. 당시 농민들은 표트르 3세가 농민들을 도우려고 하다가 살해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푸가초프는 이 점을 잘 파고들어 농민들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농노제를 폐지하고 구교도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겠다고 공약하는 등 이상적인 주장을 펼치며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특히 바쉬키르인들이 푸가초프를 크게 도와주었다.
- 푸가초프 군대의 진격을 그린 그림 -
동란의 시대가 지난 이후 코사크족은 다시 러시아에 충성했다. 물론 자치권도 그대로라 호틴 전투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지원하기도 하고 1637년에는 독자적으로 아조프를 점령하기도 하였다.(9) 하지만 러시아의 전제정이 강화되며 농민에 대한 통제와 억압이 강해지고 이 과정에서 코사크 역시 이전보다 강한 통제를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당연히 생겨났다. 이들은 서로 뭉치기 시작했고 그 지도자로 돈 코사크 하층민 출신인그 유명한 스텐카 라진이 선출됬다.

- "이대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대로 살 수는 없다!" -
스텐카 라진의 무리는 처음에는 볼가강 등을 오가는 선박 등을 공격했다. 그리고 1668년에는 대담하게도 페르시아를 습격하여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후 스텐카 라진은 1670년 6월 반란을 일으켜 아스트라한, 볼고그라드 등을 점령하고 귀족들을 제거한 뒤 코사크 자치 공동체를 세웠다. 그리고 그는 불만을 품은 농민, 코사크, 소수민족들을 모아 사라토프와 사마라까지 함락시켰다. 하지만 모스크바에서 내려온 정예군대에게 대패, 도주하다가 1671년, 그의 형제와 함깨 코사크 지도층들에게 붙잡혀 모스크바로 압송된 후 처형되었다. 하지만 그는 민중들의 영웅으로 남았고 페르시아 혹은 러시아의 어느 영주의 딸과의 사랑에 대해 다룬 민요가 러시아에 유행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돈 코사크 출신 불라빈이 북방전쟁 중이던 1707년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당했다. 한편 17세기 중엽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대신 러시아의 통제를 받게 된 우크라이나 코사크족들 중 일부도 러시아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일부 코사크 족들은 1708~1709년, 칼 12세의 스웨덴 군대가 우크라이나로 진격하자 그에게 합류하기도 했다. 물론 폴타바 전투에서 러시아 군대가 승리하면서 이들은 죽거나 오스만제국으로 도주해야했다.
그리고 코사크 족은 1773년 다시 한 번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지도자는 돈 코사크 출신의 탈영병 예멜리아 푸가초프였다. 그는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폐위되고 살해된 표트르 3세를 참칭하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당시 러시아는 전제 군주정이 강화되며 농노제가 강화되고, 피지배층과 소수민족들, 그리고 구교도(10)들을 압박하였다. 당시 농민들은 표트르 3세가 농민들을 도우려고 하다가 살해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푸가초프는 이 점을 잘 파고들어 농민들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농노제를 폐지하고 구교도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겠다고 공약하는 등 이상적인 주장을 펼치며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특히 바쉬키르인들이 푸가초프를 크게 도와주었다.

- 푸가초프 군대의 진격을 그린 그림 -
푸가초프의 군대는 이런 열렬한 호응을 토대로 카잔까지 진격하였다. 그러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것을 좌시하지 않기로 하고 본격적인 대응에 나섰다. 푸가초프는 정예병력들과의 충돌이 큰 피해를 가져올 것을 알고 광부들에게 총을 지급하고 포병대를 포함한 정규군등을 창설하려 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그럴 시간도 주지 않았다. 1774년 카잔 전투에서 러시아의 잘 훈련된 정규군은 푸가초프의 반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푸가초프는 도주하다가 배신한 동료들에 의해 러시아 정부에 넘겨져 처형당했다.
이후 러시아는 코사크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이들은 1775년 자포로제 코사크를 해체시켰다. 일부 코사크 족은 이에 저항하여 오스만 투르크로 도주하여 술탄을 위해 봉사하기도 했고, 일부는 아예 아나톨리아 반도로 넘어가 20세기 중반까지 어업을 하며 살아갔다.(11) 점차 코사크의 특권은 박탈되었고 대신 코사크 상류층들은 귀족으로 편입되며 평등했던 코사크족의 사회는 본격적인 계층 분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농노해방령 이후 코사크 족 내에서는 토지 소유자와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자간의 구별이 생겨나고 코사크 마을에 러시아 농민들이 밀려들어오면서 코사크 정착지라고 해도 코사크 족이 아닌 러시아인들도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고요한 돈강'의 저자 미하일 숄로호프가 있다.
이후 러시아는 코사크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이들은 1775년 자포로제 코사크를 해체시켰다. 일부 코사크 족은 이에 저항하여 오스만 투르크로 도주하여 술탄을 위해 봉사하기도 했고, 일부는 아예 아나톨리아 반도로 넘어가 20세기 중반까지 어업을 하며 살아갔다.(11) 점차 코사크의 특권은 박탈되었고 대신 코사크 상류층들은 귀족으로 편입되며 평등했던 코사크족의 사회는 본격적인 계층 분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농노해방령 이후 코사크 족 내에서는 토지 소유자와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자간의 구별이 생겨나고 코사크 마을에 러시아 농민들이 밀려들어오면서 코사크 정착지라고 해도 코사크 족이 아닌 러시아인들도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고요한 돈강'의 저자 미하일 숄로호프가 있다.
물론 코사크족 자체는 러시아에서 중요한 군사 자원으로 취급되어 러시아군을 위해 복무하였고 카프카스 등 국경 지역에는 코사크 행정구역이 설치되었다. 이런 코사크 행정 구역에서 코사크족은 러시아의 첨병으로써 러시아가 체첸인 등 다른 소수민족들을 지배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당연히 소수민족들에게 코사크족은 러시아랑 다를 거 하나 없는 착취자였을 뿐이었지만.
<의외의 활약>
사실 코사크 족의 활약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출난지라 언급을 안 해둘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원정이고 또 하나는 코사크의 해상 활동이다.
먼저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원정부터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코사크족 출신인 예르마크는 한때 정부군에 쫓기다가 시베리아 지역을 개척할 권리를 가지게 된 상인 가문 스트로가노프 가문 휘하에 들어가게 됬다.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시베리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예르마크로 하여금 탐험대를 이끌고 시베리아를 탐험하게 하였다.
시베리아를 탐험하며 영역을 확장하던 예르마크는 당시 시베리아에 있던 시비르 칸국과 충돌했다. 하지만 시비르 칸국은 총 등의 화기를 잘 몰랐기에 화기를 아주 잘 다루던 예르마크의 사설 원정대에 의해 격파당하고 말았다. 예르마크는 1582년 10월 시비르 칸국의 수도 콰실리크를 점령하고 그 곳에 있던 모피들을 이반 뇌제에게 보냈다. 귀가 찢어진 이반 뇌제는 예르마크의 죄를 아주 가볍게 용서해주고, 사슬갑옷까지 하사했다. 이후 예르마크는 계속 시비르 칸국을 압박했다.
하지만 시비르 칸국의 칸 쿠춤 칸은 반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1585년 예르마크의 부대를 기습했다. 부상을 입은 예르마크는 강을 헤엄쳐 도주하려고 하였지만 이반 뇌제가 준 사슬 갑옷의 무게를 못 이기고 익사해버렸고 시비르 칸국은 콰실리크를 탈환했다. 하지만 시비르 칸국은 이 통쾌한 복수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압박을 이겨낼 수 없었고 결국 1598년 멸망했다.
한편 코사크족은 활발한 해상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차이키(12)라고 하는 소형 선박을 아주 잘 다루었으며 이 배를 타고 흑해 일대를 누비며 크림 칸국과 오스만 제국에 대한 해적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해적 활동은 사하이다치니가 자포로제 코사크의 헤트만이 된 시점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는 차이키를 300척이나 건조하게 한 후 3~40척의 함대로 여러 곳을 동시에 타격하며 적을 괴롭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들은 오스만이나 크림 칸국의 주력군이 도착할 때 쯤에 약삭빠르게 도주하여 그들의 뒤통수를 후렸고, 1616년에는 크림 칸국의 약탈 부대가 잡아온 포로들을 노예로 파는 시장이 존재하던 카파를 습격, 14,000명의 오스만, 크림 칸국의 병사들을 몰살시키는 대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코사크 해적들은 카파뿐만 아니라 트레비존드, 시노페, 심지어는 콘스탄티노플 인근까지 약탈했고 덕분에 흑해는 한 때 코사크 해로 불리었다. 지중해에서 바르바리 해적을 통해 재미를 보던 오스만 제국은 반대로 흑해에서는 코사크 해적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의외의 활약>
사실 코사크 족의 활약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출난지라 언급을 안 해둘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원정이고 또 하나는 코사크의 해상 활동이다.
먼저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원정부터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코사크족 출신인 예르마크는 한때 정부군에 쫓기다가 시베리아 지역을 개척할 권리를 가지게 된 상인 가문 스트로가노프 가문 휘하에 들어가게 됬다.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시베리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예르마크로 하여금 탐험대를 이끌고 시베리아를 탐험하게 하였다.
시베리아를 탐험하며 영역을 확장하던 예르마크는 당시 시베리아에 있던 시비르 칸국과 충돌했다. 하지만 시비르 칸국은 총 등의 화기를 잘 몰랐기에 화기를 아주 잘 다루던 예르마크의 사설 원정대에 의해 격파당하고 말았다. 예르마크는 1582년 10월 시비르 칸국의 수도 콰실리크를 점령하고 그 곳에 있던 모피들을 이반 뇌제에게 보냈다. 귀가 찢어진 이반 뇌제는 예르마크의 죄를 아주 가볍게 용서해주고, 사슬갑옷까지 하사했다. 이후 예르마크는 계속 시비르 칸국을 압박했다.
하지만 시비르 칸국의 칸 쿠춤 칸은 반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1585년 예르마크의 부대를 기습했다. 부상을 입은 예르마크는 강을 헤엄쳐 도주하려고 하였지만 이반 뇌제가 준 사슬 갑옷의 무게를 못 이기고 익사해버렸고 시비르 칸국은 콰실리크를 탈환했다. 하지만 시비르 칸국은 이 통쾌한 복수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압박을 이겨낼 수 없었고 결국 1598년 멸망했다.
한편 코사크족은 활발한 해상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차이키(12)라고 하는 소형 선박을 아주 잘 다루었으며 이 배를 타고 흑해 일대를 누비며 크림 칸국과 오스만 제국에 대한 해적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해적 활동은 사하이다치니가 자포로제 코사크의 헤트만이 된 시점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는 차이키를 300척이나 건조하게 한 후 3~40척의 함대로 여러 곳을 동시에 타격하며 적을 괴롭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들은 오스만이나 크림 칸국의 주력군이 도착할 때 쯤에 약삭빠르게 도주하여 그들의 뒤통수를 후렸고, 1616년에는 크림 칸국의 약탈 부대가 잡아온 포로들을 노예로 파는 시장이 존재하던 카파를 습격, 14,000명의 오스만, 크림 칸국의 병사들을 몰살시키는 대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코사크 해적들은 카파뿐만 아니라 트레비존드, 시노페, 심지어는 콘스탄티노플 인근까지 약탈했고 덕분에 흑해는 한 때 코사크 해로 불리었다. 지중해에서 바르바리 해적을 통해 재미를 보던 오스만 제국은 반대로 흑해에서는 코사크 해적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적백내전-코사크의 시련>
1917년. 러시아에 존재하던 온갖 모순이 폭발하면서 혁명이 벌어졌다. 황제는 퇴위했고 케렌스키 중심의 공화정이 들어섰다. 하지만 공화정 역시 곧 볼셰비키에 의해 무너지고 소비에트 연방, 즉 소련이 들어섰다. 하지만 체코 군단의 반란을 시작으로 레닌에 반대하는 온갖 세력들이 모여 백군을 이루고 적군, 즉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가 두 조각 났던 적백내전의 시작이었다.
- 적백내전 당시의 코사크 병사들 -
이 전쟁 당시 코사크족은 전반적으로 적군, 즉 소련을 적대했다. 우크라이나 지역의 코사크족은 아예 이 기회에 러시아로부터 독립하고자 하였고 러시아 지역의 코사크들은 황제에게 충성하던 전통 및 그들의 전통적인 이득을 지키기 위해 백군의 편에 섰다. 하지만 계층 분화로 인해 하층민으로 분류되던 코사크족들은 소련을 위해 봉사하였다.
1917년. 러시아에 존재하던 온갖 모순이 폭발하면서 혁명이 벌어졌다. 황제는 퇴위했고 케렌스키 중심의 공화정이 들어섰다. 하지만 공화정 역시 곧 볼셰비키에 의해 무너지고 소비에트 연방, 즉 소련이 들어섰다. 하지만 체코 군단의 반란을 시작으로 레닌에 반대하는 온갖 세력들이 모여 백군을 이루고 적군, 즉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가 두 조각 났던 적백내전의 시작이었다.

- 적백내전 당시의 코사크 병사들 -
이 전쟁 당시 코사크족은 전반적으로 적군, 즉 소련을 적대했다. 우크라이나 지역의 코사크족은 아예 이 기회에 러시아로부터 독립하고자 하였고 러시아 지역의 코사크들은 황제에게 충성하던 전통 및 그들의 전통적인 이득을 지키기 위해 백군의 편에 섰다. 하지만 계층 분화로 인해 하층민으로 분류되던 코사크족들은 소련을 위해 봉사하였다.
"코사크 사회를 완전 말살하라. 코사크의 지도층을 물론 지식층은 즉시 총살. 이외의 코사크에 대해서도 당지도부의 엄중한 감시하에 둘 것이며 불순한 행동이 있을시에는 즉시 체포하여 총살 내지는 추방하도록 하라."
당연하겠지만 제정 러시아 당시 존재했던 코사크족의 행정구역들은 모조리 해체되었고, 코사크족은 억압받는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코사크 족은 소련에 대한 충성 자체가 의심받는 억압받는 민족이 되어버렸다. 적백내전이 종결될 당시 백군 편에 선 코사크 족 다수는 소련을 피해 해외로 도주했고 도주하지 못한 자들은 처형되거나 시베리아 유형지로 끌려가버렸다. 하지만 적군 편에 선 코사크 족도 이 훈령 덕에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나마 시간이 지나며 의심이 어느 정도 해소된 덕에 코사크 족은 1936년부터 소련군에 입대할 수 있게 되었다.
<2차 대전, 그리고 현재>

그러던 중 1941년 6월 나치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곧 모스크바 목전까지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코사크 족 다수는 소련군에 입대하여 소련군을 위해 싸웠다. 코사크족 기병대는 군마로 하여금 초가집의 초가 지붕을 뜯어먹게 하며 빠른 속도로 진격해 독일군을 도륙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세묜 부돈늬 원수는 이런 코사크족의 용맹을 찬양하며 그들이 항복하는 독일군의 손까지 베어버린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소련이 코사크족에게 그동안 가했던 탄압의 영향 때문에 나치 독일에 부역한 코사크족들도 존재했다. 이들 부대 역시 나름대로 활약했으며 독소전 당시 상당히 악명을 떨친 것으로 알려져있다. 물론 그 숫자가 많은 편은 아니라 나치 독일이 겨우 코사크족으로 2개 사단정도를 창설했을 때 소련은 코사크 족 출신으로 17개 사단이나 만들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이 패배함으로써 나치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후퇴하게 된다. 코사크 사단들 역시 같이 후퇴하다가 1945년 서방측에 투항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얄타 회담 등을 거친 미국과 영국은 코사크족은 서방 측이 포로로 잡아도 모조리 소련에 넘겨주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서방은 오스트리아의 린츠 등에서 코사크 족 수 만명을 통째로 소련측에 넘겨주었고 미국 거주 코사크족 백여명 가량도 이 때 소련으로 보내졌다.(13) 당연히 소련은 서방 측이 넘겨준 코사크족들 중 몇몇은 바로 처형해버리고 나머지는 모조리 시베리아 유형소로 보내버렸다가 흐루시초프가 집권하고 나서야 사면해주었다.
문제는 서방측이 이 과정에서 문제를 많이 일으켰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치 휘하에서 복무한 코사크족 병사들은 잔학행위를 꽤 많이 저지르기도 했기 때문에 소련이 처벌하려고 하는 것은 이상한 것도 아니었고 이들의 행동을 생각하면 서방측이 그들을 넘기는 것도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서방은 여자와 아이들, 심지어는 전부는 아니지만 독소전쟁과는 별로 상관 없이 적백내전 당시 망명해왔던 코사크족들도 넘겨버렸다. 그들은 딱히 나치 독일에 부역하지도 않았고, 특히 적백내전 당시 망명한 사람들은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이들까지 통째로 넘겨준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는 행동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흐루시초프가 이들을 사면해준 뒤에도 한동안 코사크족의 대우는 좋지 못했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 억압받았던 민족들의 복권에 대한 법이 통과되면서 코사크족에 대한 대우는 좋아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 덕에 코사크족은 세력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고, 체첸 전쟁 당시 군대를 편성해 러시아군을 돕기도 하였다. 그 이외에도 2009년 경 북카프카스 지역에 존재했던 구 테레크 코사크 구역을 다시 부활시키자는 건의를 하기도 했다. 물론 진짜로 그렇게 했다가는 친러계 잉구세티야, 체첸, 다게스탄 자치 공화국 정부들이 모조리 북카프카스에미리트(14)편으로 돌아설 우려가 있기 때문에 건의는 기각된 것으로 보인다.
<게임 속의 코사크>
코사크족이 워낙 러시아의 군사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만큼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에서 러시아가 등장할 경우 코사크는 높은 확률로 러시아의 특수 유닛으로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의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이외에도 엠파이어 토탈워나 나폴레옹 토탈워에서도 코사크족은 등장한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의 코사크 기병 모습 -
하지만 이런 게임에서 나올 경우 코사크족은 은근히 취급이 좋지 않은 편으로 전반적인 설정이 '가격이 싸지만 그 대신 성능도 비슷한 종류의 다른 유닛들보다 낮다.'식인 경우가 많다. 그나마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는 카드를 통해서 강화시킬 수 있지만 토탈워 시리즈에서는 그것도 안 된다고 봐야 되니....
(1) 이는 타타르에서도 알 수 있다. 보통 타타르는 러시아를 지배한 몽골족을 이르는 명칭이기도 하지만 간혹 쿠만족을 가르키는 명칭으로 쓰인다. 동양권에서 폴로베츠인의 춤이 간혹 달단인의 춤이란 제목으로 소개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2) 후스 전쟁 당시 보헤미아에서 쓰여진 명칭에서 유래된 것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원수를 가르키는 단어이기도 하다.
(3) 이슬람권의 영향으로 동유럽에서는 지휘관이 지휘 등의 용도로 메이스를 쓰는 일이 흔했다.
(4) 정작 사하이다치니는 호틴 전투 당시 입은 부상으로 1622년 병사했다.
(5) 사실 코사크족은 그 전에도 여러 번 러시아에 지원 요청을 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면전을 두려워한 모스크바가 그 때마다 모두 거부했다.
(6) 러시아의 전국 회의의자 신분제 의회.
(7) 이 일화 자체는 창작의 가능성이 높아보이지만 적어도 그림으로 그려질만큼 꽤나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다.
(8) 현재 이 편지는 jager의 번역본, 골리앗의 번역본, 앨런비의 번역본이 존재한다. jager 번역본은 가장 먼저 나왔지만 욕을 의도적으로 생략, 순화한 반면 골리앗 번역본은 욕까지도 충실하게 반영하여 이것이 가장 많이 퍼졌다. 앨런비 번역본은 골리앗 번역본보다도 욕을 더욱 충실히 반영했지만 워낙 늦게 나온 번역본이라 묻혔다...
(9) 하지만 러시아가 오스만제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하여 아조프를 접수하려고 하지를 않자 결국 아조프를 포기해야 했다.
(10) 여기서의 구교도는 카톨릭교회가 아니라 1652년 러시아정교회 총대주교가 된 니콘의 그리스식 의식으로의 전환 등을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에 반발하다가 쫓겨난 사제들로부터 비롯된 종파이다. 전통 의식을 고수한 이들은 러시아 정부의 탄압을 받았지만 끈질기게 그 교세를 이어나갔다고 한다.
(11) 다만 현재는 대부분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2) 바다갈매기란 뜻이다.
(13) 이 때 코사크족이 반항하자 최루탄이 사용되고 수면제 커피까지 동원되었다고 한다.
(14) 이츠케리야 체첸의 수장 도쿠 우마로프가 2007년 이츠케리야 체첸을 해산하고 새로 만든 분리주의 조직. 북카프카스 지역의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덧글
당시에 조총에 철제 탄환(그것도 담금질 한거)을 쓰고 조준사격을 하는 게 조선군이라 코사크들의 피해가 막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에 설명된 대로 해적질 하던 버릇을 살려 배에 짱박혀 안나왔는데, 조선측에서 배에 불을 질러 버렸다지요.(전리품을 탐낸 청군 지휘관 때문에 인명피해가 발생했지만...)
아무튼 포로도 몇명 잡혔는데, 간장에 밥 비벼 주니 안 먹더라... 사람 입맛은 다른가 보다...라는 조선측의 기록도 있고, 러시아 측 기록에는 대두병(조선군)이 ㄷㄷㄷ하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터키의 임프이자 똥같은 악마들의 친구이자 형제이며 루시퍼의 꼬붕인 술탄아. 얼마나 병신같은 기사길래 니 후장에 붙은 고슴도치 한마리도 족치지 못하냐? 악마의 똥같은 짬 찌끄레기야. 너 같은 개새끼는 절대로 기독교 형제들을 이기지 못할꺼다. 우린 니네 좆만한 쫄따구들이 무섭지도 않고, 땅에서든 바다에서든 박살내서 니 애미를 따먹어주마!
너는 바빌론의 설걷이꾼, 마케도니아의 마부, 예루살렘의 양조자, 알렉산드리아에서 염소와 떡칠 새끼, 이집트의 돼지치기, 아르메니아의 돼지새끼, 포돌리아의 도둑놈, 타타르의 창남, 카먀네트의 망나니, 그리고 이 모든 세상에서 가장 골빈 놈이다. 신 앞의 천치, 독사의 손자, 우리의 쥐가 난 좆 대가리, 돼지 주둥아리, 당나귀 엉덩이에 도살장의 똥개이자 이교도의 대갈통이나 달고 있고 니 애미와 할 씨발새끼야!
이것이 너같은 좆만한 새끼에게 주는 우리 자포로제 형제들의 답장이다. 너는 기독교의 돼지에게 먹이를 줄 정도도 안되거든? 이제 끝을 맺는데, 우리는 달력 그딴거 안키워서 오늘이 몇 일인가 몰라. 달은 하늘에 있는 것이고, 몇 년인가는 책에 적혀있고, 날짜는 니가 있는 동네와 똑같다. 우리 똥꾸녕이나 쭈욱 빨아라!
-코사크의 수령 이반 시르코와 자포로제의 형제들-
이렇게 의도적 의역으로 쌍욕하는 것이 됴티 아니한가? 내 번역은 일부로 늬앙스 맞춰서 과격하게 한거임 'ㅅ'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총이 만병지왕이군요.
푸슈킨의 대위의 딸...
읽어보시며 나름 재밌습니다. 양도 길지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