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유목민들 7. 페체네그와 마자르. 공국 문화부 직할 역사연구소

 <굴러온 돌>

 페체네그 족은 본래 중앙아시아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튀르크계 유목민족이었다. 이들은 8세기 경에 역사 속에 처음 출현했는데 본래 볼가강 하류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9세기 중반 오구즈의 압력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새로운 땅을 얻기 위해 하자르 족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하자르는 북방에서 밀려오는 바이킹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오구즈인들과 협력하여 되레 페체네그족을 서쪽으로 쫓아냈다. 

 그렇게 서쪽으로 쫓겨난 페체네그는 마침 돈강과 드네프르강 사이의 레베디아라 불리던 곳에 살던 마자르 족을 공격하였다. 마자르족은 페체네그의 공격을 비해 드네프르강 서쪽으로 도주하였다. 그리고 페체네그는 레베디아에 눌러앉았다. 이것이 854년 경의 일이었다.

 이후 895년. 페체네그족은 다시 한 번 마자르를 공격한다. 마자르의 공격을 받은 불가리아의 차르 시메온의 지원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페체네그족은 불가리아와 함께 마자르족을 협공하여 그들을 판노니아로 쫓아내고 드네프르강 서쪽에 마자르족이 마련했던 새 정착지마저 빼았았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두번이나 빼낸 셈이었다.

 <러시아와의 전쟁>

 마자르에 대한 일련의 공세로 인해 페체네그는 이제 스텝 서쪽 지역의 패권을 하자르로부터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하자르를 몰아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로써 페체네그 역시 나름대로 큰 기침 한 번 내뱉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스텝의 서쪽은 비잔틴, 러시아의 세력권과 맞닿은 곳이었고 이는 페체네그가 러시아, 비잔틴과 충돌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페체네그는 러시아의 여러 공국이나 비잔틴제국과 때때로 제휴하거나 전쟁을 벌였다.

 실제로 페체네그족은 915년에는 키예프 공국의 대공 이고르와 전쟁을 치뤘으나 943년 이고르 공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때는 그 동맹자로써 참전하였다. 그리고 968년 경에는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라프를 위험시한 비잔틴의 요청으로 키예프를 공격. 불가리아를 공격하던 스뱌토슬라프가 키예프로 허둥지둥 돌아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971년 페체네그의 군대는 비잔틴군에게 대패를 당하여 불가리아를 포기하고 겨우 키예프로 귀환하던 스뱌토슬라프를 공격하여 그를 죽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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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뱌토슬라프. 자네의 목은 우리가 거둬가겠네. -

 페체네그족의 족장 쿠르야는 유목민들의 오랜 전통대로 스뱌토슬라프의 두개골을 술잔으로 만들어주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스뱌토슬라프는 이틸을 파괴함으로써 페체네그족이 흑해 북부 스텝의 대다수를 평정할 수 있도록 공헌해준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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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뱌토슬라프 덕분에 덕 본 것은 우리 페체네그라네. -

 이후 페체네그는 키예프 공국 등 러시아의 여러 공국들과 전쟁을 벌였다. 안되겠다 싶은 페체네그는 한때 폴란드랑 동맹을 맺기도 했고 러시아 공국들과 우호관계인 비잔틴 제국을 1026년에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키예프 대공 야로슬라브는 1036년 페체네그족의 군대를 대파했다. 그리고 이로써 페체네그는 러시아 공국들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더군다나 이 즈음 오구즈와 그 일족 중 하나인 쿠만인들이 페체네그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오구즈의 군대는 어찌어찌 막아냈지만 쿠만의 압박은 너무나도 거셌고 페체네그는 이 압박에 대한 대응으로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비잔틴과의 전쟁, 그리고 몰락>

 이 무렵 페체네그는 케겐과 투라크라는 두 명의 수령이 대립하고 있었다. 이 둘은 페체네그의 지배권을 놓고 충돌했고 그 결과 패배한 케겐은 비잔틴제국으로 망명했다. 투라크는 후환을 제거하고, 새로운 땅을 발칸 지역에 마련하고자 비잔틴제국을 공격했으나 1049년 비잔틴과 케겐의 협공으로 대패, 포로로 잡힌 후 비잔틴 제국의 신하가 되면서 정교회로 개종해야했다. 하지만 1046년에 시작된 전쟁 자체는 조금 더 지속되었고 이 전쟁은 비잔틴 제국의 재정을 파탄내었다.

 이 전쟁 당시 귀순한 것으로 보이는 일부 페체네그 족은 비잔틴의 용병으로 봉사했고 일부는 만지케르트 전투 당시 로마누스 황제의 용병으로 활동했다. 다만 이들은 꽤나 믿음직하지 못한 병사들이었다고 한다.

 - 오스프리의 비잔틴 기병 묘사. 1번은 트라페지토스(비잔틴의 토착 경기병) 2번은 페체네그 용병 -

 하지만 대다수 페체네그족은 얼마 안 가 다시 비잔틴 제국을 공격했다. 페체네그의 군대는 1064년 콘스탄티노플까지 육박했으며 이후 비잔틴 제국 내부의 혼란을 틈타 비잔틴 제국을 마음껏 약탈했다. 이 시기 오구즈가 비잔틴과 페체네그 양쪽을 모두 공격하기도 했지만 페체네그와 비잔틴은 오구즈를 격파했다. 하지만 오구즈의 후예 격이었던 쿠만족의 압박을 페체네그는 견뎌내지 못했다.

 페체네그족의 군대는 이후 1087년 트라키아를 약탈했다. 알렉시우스 콤네누스가 반격을 가하자 페체네그는 그들의 지도자 첼구를 전장에 내버려두고 도망쳤지만 같은해 가을 비잔틴의 군대를 드리스트라에서 패배시키며 다시 기세를 올리는데 성공했다. 이후 쿠만족의 압력이 강해지자 페체네그는 격렬하게 비잔틴을 압박했다. 그들은 1089년 경에 아드리아노플 남쪽의 입살라까지 공격했고 이듬해인 1090년에는 아예 소아시아의 셀주크 투르크와 동맹을 맺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이로써 400년 전 아바르와 사산조 페르시아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한 양상이 다시 한 번 재현된 상황이 연출되었다.

 물론 콘스탄티노플 3중 성벽은 626년에도 그랬지만 400년이 지난 1089년에도 아주 멀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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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니까.... 저 성벽을 뚫어야 된다고? 몰라. 이건 뭐야. 무서워." -

 물론 페체네그 역시 3중 성벽을 뚫을 수는 없었다. 거기에다가 이렇게 되자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는 쿠만족과 제휴하였다. 쿠만족은 예전에 페체네그가 마자르에게 그랬던 것처럼 페체네그의 후방을 공격함으로써 그들이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포위를 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비잔틴 제국의 군대는 쿠만족, 블라크족(2)과 연합하여 1091년 4월 레부니온 산에 있던 페체네그의 진영을 공격, 격파하고 페체네그 군대를 학살했다.

 이 살육의 현장에서 겨우 벗어난 일부 페체네그 족은 왈라키아에서 전열을 정비한 후 1121년 다시 한 번 비잔틴 제국을 공격했다. 하지만 알렉시우스 콤네누스의 아들 요한네스 2세의 군대는 베로이아 전투에서 페체네그 군대를 대파했다. 이로써 페체네그 족은 비잔틴 제국에 신속하거나 헝가리, 불가리아인들에게 동화되야 했다. 비잔틴 제국에 신속한 일부 페체네그족은 비잔틴 제국이 1150년대에 벌인 마지막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했다는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이것이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페체네그의 마지막 모습이다. 다만 몰도바 남쪽에 현재 거주하는 투르크계 민족인 가가우즈족이 페체네그의 후예라는 주장이 있다.

 <평화를 사랑하는 여린 양 마자르>

 마자르족은 그동안 소개했던 유목민들이 인도-유럽어계, 투르크 계 및 몽골계였던 것에 비해 특이하게도 우랄어족의 핀-우그리아계 언어를 사용하는 유목민족이다. 이들은 볼가강 및 우랄 산맥 지역에 걸쳐 살고 있었으며 이들의 조상은 안드로노 문화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본래 우랄산맥 지역에 살다가 5세기 경 남부 우랄 및 볼가강 지역, 현재의 바쉬키르 자치 공화국이 위치한 지역으로 이주했다. 

 특이하게도 마자르는 자신들을 훈족과 강하게 연관시키는 전통 신화를 가지고 있다. 이 신화에 따르면 대홍수 이후 거인신적 존재인 니므롯이 에네란 여자랑 결혼하여 후누르와 머고르라는 쌍둥이 형제를 낳았다고 한다. 이 쌍둥이 형제는 알란족의 왕 둘러의 두 딸을 납치하여 각각 혼인했는데 큰형 후누르의 후예가 훈족이 되었고 동생 머고르의 후예는 마자르족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훈족은 투르크 혹은 몽골계로 추정되는 데 비해 마자르는 핀-우그리아계 언어를 쓴다는 점을 볼 때 이 전통 신화는 마자르가 훈족의 위세를 빌려보고자 의도적으로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외에도 말갈의 후예가 마자르네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무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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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저렇게 착한 동생 둔 적 없어 -

 그러나 잔인하기 짝이 없는 훈족의 형제라고 주장하는 신화를 가졌음에도 마자르는 참으로 조용하게 살았다. 이들은 8세기경 흑해 북부의 스텝 지대 전체를 평정한 하자르족에게 복속되었다. 이들은 하자르가 믿을 수 있는 민족으로써 철저하게 하자르에게 복속했다. 830년 경에 이들은 하자르 카간의 허락을 받고 볼가강 중류 및 남부 우랄의 원 거주지를 떠나 드네프르강과 돈강 사이의 레베디아로 이주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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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자르인의 이주도. 1번은 우그라아계 어족의 원주지로 추정되는 우그라, 2번은 마그나 헝가리아. 3번은 레베디아, 4번은 에텔코즈. 5번은 카르파티아 평원 = 판노니아 이다. 빨간색은 카바르족으로 보이지만 노란색은 파악하지 못했다.-

 이후 얼마 안 되어 하자르 내에서 내전이 벌어졌고 이 때 반란을 일으켰던 투르크계 카바르족이 하자르 중앙 정부군에게 패배한 후 마자르족에게로 도주했다. 이것을 하자르측은 묵과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마자르를 바꾸어놓았다.
 
 이후 850년 경 페체네그가 마자르족을 공격하자 이들은 드네프르강 서쪽으로 도주했다. 아직 이들은 하자르와의 연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호전적인 카바르족을 중심으로 마자르는 조금씩 약탈에 손을 대고 곧 약탈에 맛을 들였다. 이들은 저지판노니아 공국과 대모라비아 왕국, 동프랑크 왕국 등을 상대로 노략질 원정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들을 눈여겨본 비잔틴 제국은 눈엣가시인 불가리아를 골탕먹이고자 895년 마자르족과 접촉. 이들이 불가리아를 공격하도록 사주했다. 마자르족은 곧장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그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3번이나 마자르에게 패한 불가리아의 차르 시메온은 페체네그족을 사주하여 마자르의 후방을 공격하게 했다. 이 공격에 놀란 마자르족은 얼른 후퇴했으나 곧 전열을 정비한 불가리아와 후방을 급습한 페체네그의 협공을 받게 되었다. 대군장 알모스도 이 와중에 전사하고, 북쪽은 페체네그, 남쪽은 불가리아, 동쪽은 흑해에 둘러싸인데다가 하자르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게 된 이들은 결국 유일한 탈출구인 서쪽으로 도주하고 그 곳에 정착했다. 그곳이 바로 판노니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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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노니아에 도착한 아르파드와 그가 이끄는 마자르인 -

 판노니아에는 당시 슬라브계 저지 판노니아 공국, 대모라비아 왕국과 게르만계 동프랑크 왕국, 그리고 1차 불가리아 제국이 난립하고 있었다. 거기에 아직 아바르족도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지 판노니아 공국은 너무 약했고 나머지 국가들의 판노니아에 대한 영향력은 약했다. 그 덕에 마자르족은 저지 판노니아 공국을 쓸어버리고 판노니아에 쉽게 안착했다. 판노니아에 안착한 마자르의 여러 부족의 부족장들은 세게드에서 회합을 가졌고 회합 결과 대군장 알모스의 아들 아르파드를 그들의 지도자로 옹립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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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다페스트에 있는 아르파드의 동상 -

 <마자르의 각성 - 아틸라가 부활했다!>

 아르파드를 지도자로 옹립한 이후 마자르족은 피의 본능이 각성이라도 했는지 이 곳 저 곳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이제는 연계가 끊어진 하자르제국의 신하였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참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들의 첫 희생자는 대모라비아 왕국이었다. 대모라비아 왕국을 견제하려는 동프랑크의 군주 아르눌프의 요청에 따라 마자르는 대모라비아 왕국을 공격했다. 대모라비아 왕국의 왕 스뱌토폴크는 아르파드의 군대에 대항해봤지만 제압당했고, 혼란 중에 사라져버렸다. 

 마자르족의 활약에 만족한 아르눌프는 이제 이탈리아에 대한 공격을 마자르족에게 사주했다. 아르눌프는 당시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두고 이탈리아 왕국의 왕 베렌가리오와 대립 중이었기에 마자르의 손을 빌어 그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900년 마자르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이탈리아를 공격했고 실컷 노략질을 한 후 유유히 철수했다. 베렌가리오의 군대가 뒤늦게 마자르족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마자르는 후퇴를 애원함으로써 베렌가리오를 방심하게 한 후 기습적으로 포위 공격을 감행해 베렌가리오의 군대를 괴멸시켰다. 하지만 동프랑크와의 협력은 무산되었고 마자르족은 동프랑크와 이탈리아를 가리지 않고 약탈했다. 그리고 902년에는 아예 대모라비아 왕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렸다.

File:Great moravia svatopluk.png

 - 아. 우리 대모라비아는 한때 이렇게 잘 나갔거늘 이렇게 멸망하는구나. 화무십일홍이라더니 그말대로구나. -

 이에 견디지 못한 동프랑크의 새로운 왕인 '유아왕 루트비히'와 귀족들은 고전적인 '운몽의 연회' 수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마자르족의 2인자 쿠르잔을 바이에른에 초청한 뒤 잔치를 베풀다가 그를 암살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자르족의 공세는 전혀 무뎌지지 않았다. 이들은 어제의 적 베렌가리오의 사주를 받고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를 공격했다. 결국 참다 못한 동프랑크는 907년 대규모 병력을 모아 바이에른 후작 레오폴트의 지휘하에 마자르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하지만 마자르족은 아이제나흐에서 동프랑크 군대를 격파, 몰살시켰다. 어느 정도의 대패였냐면 동프랑크 측은 총지휘관 레오폴트도 전사해버릴 정도였다. 이제 서유럽은 해상에서는 바이킹의 약탈을, 육지에서는 마자르의 약탈을 고스란히 받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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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은 독일을 털었다! 내일은 이탈리아를 털리라! -

 마자르족은 이 기회를 한껏 살리며 유럽을 아주 탈탈 털어먹었다. 913년에는 비잔틴제국을 공격했고 919년에는 로렌을 공격했다. 920년대에는 베렌가리오와의 우호관계를 파기하고 이탈리아를 다시 공격, 파비아를 불태우고 922년에는 이탈리아 남부의 타란토까지 휩쓸었다. 이때의 약탈로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헝가리인의 화살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소서' 라는 기도문을 읊었다고 전해진다. 이탈리아를 턴 직후에는 프로방스와 부르군디가 쑥대밭이 되었고, 926년에는 상파뉴가 약탈당했고 마자르의 군대는 대서양까지 진격했고 이듬해에는 마자르의 군대는 로마 근방까지 육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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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헝가리 기마궁사를 묘사한 이탈리아의 프레스코화 -

 유럽인들은 이제 아틸라가 훈족을 이끌고 유럽을 휩쓸던 그 때의 악몽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아니 마자르족은 그들의 군장이 바뀌어도 그 기세가 전혀 꺾이지 않았고 훈족보다 더 많은 지역을 공격했으니 어떻게 보면 훈족보다도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서유럽은 이제 바이킹과 마자르의 공포 앞에 벌벌 떠는 신세가 되었다. 이 상황을 조금이나마 호전시킨 것은 유아왕 루트비히의 죽음으로 카롤링거의 혈통이 끊긴 독일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한 하인리히 1세였다.

 <레히펠트-마자르의 기세가 꺾이다.>

 하인리히 1세는 918년 유아왕 루이의 뒤를 이은 콘라드가 후사 없이 병사하자 독일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마자르의 위협에 직면한 상태였다. 하인리히는 924년 군대를 일으켜 마자르 족장의 아들 졸탄이 이끄는 군대와 충돌했다. 이 때 하인리히 1세의 군대는 마자르에게 패배했으나 어쩌다 본대랑 떨어지게 된 졸탄을 생포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덕분에 하인리히 1세는 졸탄을 풀어주고 조공을 바치는 대가로 마자르족과 평화협상을 맺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하인리히는 그 동안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하인리히는 932년 적당히 힘을 키웠다고 판단하고 마자르족의 조공 요구를 거절하기로 결정했다. 당연히 마자르족은 이듬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독일을 침공했다. 하지만 하인리히 1세는 메르스베르크에서 마자르족을 경기병으로 유인한 후 중기병들을 돌격시켜 섬멸하고자 하였다. 마자르족이 독일 기병대가 돌격하는 걸 보고 재빠르게 후퇴한 덕에 마자르족은 피해를 별로 입지 않았으나 이 전투로 독일은 더 이상 마자르족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 "니들 좋은 시절은 이제 다 끝났어!"  -

 하지만 마자르족은 애초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고 따라서 약탈 원정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들은 934년 다시 한 번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15년간의 조공 약속을 비잔틴으로부터 받아내고 936~937년, 944년에는 독일을 다시 약탈하고 942년에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의 후우마위야 왕조까지 공격하는 위용을 보였다.

 그러나 하인리히 1세의 아들 오토가 세력을 키우자 마자르는 오토의 세력에 점차 눌리기 시작했다. 이런 위기 상황을 느낀 마자르는 오토에 대한 공세를 계획했는데 953년 독일에서 내분이 발생하자 마자르는 자신들과 동맹을 맺은 로렌의 콘라트를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독일을 침공했고 얼마 안 되어 다시 독일을 침공, 아우구스부르크를 포위했다.

 이에 오토 대제는 군대를 모아 아우구스부르크를 구원하기 위해 움직였다. 마자르족은 이 소식을 듣고 포위를 풀고 레히펠트에서 오토의 군대와 싸울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955년 8월 10일. 레히펠트에서 마자르와 독일은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였다. 마자르측은 별동대를 보내 독일의 수송부대를 공격, 강력한 타격을 주며 초반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갔다. 그러나 별동대는 약탈에만 정신이 팔렸다가 독일의 반격으로 괴멸당했고, 이후 오토 대제의 군대는 궁기병이 활동하기 불편한 좁은 지대로 마자르 군대를 유인한 후 포위, 섬멸하였다. 마자르의 패잔병들 다수는 독일의 군대에 의해 살육되거나 레흐강에 빠져 익사, 혹은 원한에 가득찬 독일 농민들에 의해 맞아죽었고, 몇 안되는 생존자들은 허둥지둥 판노니아로 도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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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7년에 그려진 레히펠트 전투 기록화. 이 전투로 마자르의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

 <레히펠트 그 이후>

 레히펠트의 패배로 마자르의 기세는 엄청나게 꺾여버렸다. 970년 마자르측은 루스, 페체네그 등과 함께 비잔틴제국에 대한 약탈 원정을 감행하기는 했지만 아르카디오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예전같지는 않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야 했다. 기세가 꺾인 마자르족은 이제 슬슬 다시 부활하려는 비잔틴 제국과 황제의 왕관까지 차지하면서 한껏 국력을 뽐내는 신성로마제국의 강력한 압박에 시달리는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이 상황에서 마자르족을 통치하던 대공 게자는 마자르의 앞날을 위해서는 유럽인들과 사이좋게 지내야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카톨릭으로 개종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자는 972년 경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한편 신성로마제국과 화친하였다. 게자 자신은 그렇게 독실한 신도는 아니었으나 게자의 뒤를 이은 맏아들 이슈트반은 열정적으로 마자르를 카톨릭화시켜 그 공로로 서기 1000년 교황 실베스테르 2세로부터 왕으로 인정받고 왕관을 받았다.(5) 이로써 헝가리는 유목민족의 일원이 아닌 유럽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헝가리 내의 이슬람교도 등의 존재(6)나 율리아누스의 고사 등으로 미루어보건대 13세기 정도까지는 어느 정도 스텝과의 연결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개인적으로 추측한다.(개인적인 판단이므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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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헝가리의 1대 왕 이슈트반 1세의 초상 -

(1) 러시아측 사료는 이 당시 페체네그가 비잔틴의 사주를 받고 퇴각하는 스뱌토슬라프를 기습해죽였다고 한 반면 비잔틴측 사료는 페체네그가 이 당시 키예프 공국과 동맹을 맺었는데 비잔틴과 굴욕적인 평화협상을 맺고 퇴각하던 스뱌토슬라프가 페체네그의 전리품 분배요구를 거절하자 격분한 페체네그가 스뱌토슬라프를 공격했다고 한다.

(2) 루마니아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라틴계 민족. 왈라키아의 어원이 된 민족이다.

(3) 이 당시 일부 마자르족은 레베디아로 이주하지 않고 볼가강 중류에 남아있었다. 몽골 침공 직전 인구 부족에 시달리던 헝가리가 인구 확보 차원에서 이들을 데려오기로 하고 수도사 율리아누스를 파견했는데, 이 때 율리아누스와 볼가강에 남아있던 마자르인들은 서로 아주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했다고 전해진다. 임무는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몽골의 침공과 연관된 듯 하다. 율리아누스는 바투의 최후통첩을 헝가리측에 전달했다고 한다.

(4) 비잔틴제국 출신 콘스탄티노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알모스는 유력한 족장 레베디아스(레베디아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의 추천으로 하자르족에게서 마자르족의 대표로 책봉되었다고 전해진다. 아르파드가 세게드에서 옹립되기는 했지만 정황상 그는 이전부터 마자르족의 대표격인 존재였을 가능성이 있다. 

(5) 정작 이 왕관은 1040년 경 헝가리 내에서 왕위 계승 분쟁이 벌어질때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가 탈취한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현재의 왕관은 1070년대 중반 비잔틴제국이 선물한 왕관의 아랫부분에 13세기에 윗부분을 추가한 것이다.

(6) 헝가리 인구의 대략 5% 정도로 스텝 지역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1300년 경에 개종, 학살 등으로 존재가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덧글

  • RuBisCO 2012/02/11 18:26 #

    결국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하고 말뚝을 박지 못하면 한때는 반짝하더라도 DTD 하게 된다는 거군요.
  • 로자노프 2012/02/11 21:52 #

    뭐 그런 셈이죠. 쩝.
  • 훈갈이 2012/02/11 18:56 # 삭제

    페체네크랑 백제랑 발음이 비슷(?)하다고 페체네크가 백제 유민이 아닐까라고 주장했던 글이 떠오르는군요..ㅋㅋ;;
  • 로자노프 2012/02/11 21:52 #

    그런 주장도 있었나요?!
  • net진보 2012/02/11 21:50 #

    1300년 경에 개종, 학살 .........
  • 로자노프 2012/02/11 21:52 #

    일단 십자가와 초승달의 표현을 빌린다면요.
  • 모에시아 총독 2012/02/11 21:59 #

    중세로마제국이 저 페체네그와의 전쟁 때문에 그렇게 골머리를 앓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2차 전쟁이 어영부영 끝나는 바람에 군사력 주둔이 필요했고 그 때문에 방위비 부담에 휘청거린 제국 정부가 금화 가치 절하를 단행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아르메니아 테마군을 해체했다가 그만 투르크에게 ㅠㅠ
  • 로자노프 2012/02/11 22:04 #

    아아. 그 이야기라면 들었지요.
  • 셔먼 2012/02/11 22:40 #

    마자르족이 눈치 하나는 참 빠른 것 같습니다. 서유럽의 호구 국가들을 남김없이 탈탈 털어먹다가 슬슬 서유럽 국가의 세력이 강해지니까 바로 입 다물고 정착해 사는 걸 보면 말입니다.
  • 로자노프 2012/02/11 22:44 #

    확실히 그렇기는 하죠. 개종을 통해 유럽에 편입됨으로써 아바르와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있었죠.
  • 오스왈드 2012/02/11 22:48 # 삭제

    저 이슈트반이 바로 니벨룽겐의 노래에 나오는 훈족의 왕 에첼의 모델입니다
    거기 훈족은 착하거든요...

    그리고 저 스비야토슬라프의 죽음이 러시아가 정교회를 택한 중요한 이유가 되엇죠
    이제 혼자 살기는 좀 버거워졌으니 힘있는 친구가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 로자노프 2012/02/11 22:52 #

    1. 아 그런가요?

    2. 네. 아무래도 그걸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 Mr 스노우 2012/02/11 23:01 #

    잘 보았습니다. 학부에서 러시아사 들을때 이고르, 스뱌또슬라프 같은 끼예프 대공들 계보 외우느라 머리가 깨질뻔 했었지요 ㅎㅎ
  • 로자노프 2012/02/11 23:08 #

    아마 그 때 정말 미치도록 외우신 그 이름들이 다음 편에도 또 등장할 겁니다,. ㅎㅎㅎ
  • 2012/02/18 01:0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로자노프 2012/02/18 21:51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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