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명록 겸 공지사항



로자노프의 대궁정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곳 주인장 로자노프는 역사 쪽에 관심이 많으므로 이 블로그 역시 역사 글 위주가 될 것입니다. 이글루스 블로거 여러분. 많이 방문해 주세요. 단 방문 시 다음 사항들은 숙지해주시기 바랍니다.




1. 욕설은 절대 금지입니다

2. 상호 간에 되도록이면 예의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3. 책사풍후,마광팔, 이재율, 정론직필, http://ll2kg.egloos.com 이 주소 쓰는 아이디는 절대 출입금지입니다.

4. 여기 방문해주시는 모든 분들께서는 http://khistory.yuku.com/ 여기 한 번 들러주시고 가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역사포럼이라고 하는 사이트입니다.

5. 글을 퍼가실 때는 해당 글에 덧글(해당 글에 덧글을 못 단다면 다른 글도 무방)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따로 글에서 언급하지 않는 한은 말이죠.

6. 아. 그리고 글을 봤으면 덧글을 답시다.





몇 가지 소소한 잡담 공작의 잡담 테이블

1. 그것이 알고 싶다 내일 위안부 터뜨리려나보네요. 거 참... 뭐가 터지려나... 사실 이 건은 전 대충 짐작하는 바가 있기는 합니다만...

2. 이번 연재글은 일단 자료가 모으기 쉬운 편입니다. 무엇보다 사기 번역은 넘쳐나는 덕에 말이죠. 그래도 지난번 조정서 건도 그렇고 파고나면 좀 괜찮은 떡밥거리가 나올 것 같기도 합니다.

3. 2번과 연관해서.. 사실 이번 연재는 스샷 구하긴 쉽지가 않습니다. 중국쪽에서 드라마로 초한지 찍은 건 많으니 그걸 활용해야 하나 싶긴 합니다. 초한전기는 이미 어느정도 들어가고... 사실 언급될 인물들 중 일부는 진나라의 통일을 배경으로 한 일본 만화 킹덤에도 나오기에 그쪽도 활용해볼 생각입니다. 시대가 겹치기도 하죠.

4. 세계 정세가 괴악해지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예측불허긴 한데 그래도 예측되던 대중강경책은 참 확실하게 진행되는 모양새입니다. 근데 우린 지금 중앙정부가 사실상 증발... 

5. 날씨가 이젠 좀 따뜻해지면 좋겠습니다. 추워죽겠어요. 

6. 진짜 요즘 좀 바쁘긴 한데 좀 나아지면 멸종동물 이야기도 하나 써야지. 연중 2년째니.. 

잡담 몇 가지. 공작의 잡담 테이블

1. 이글루스 4천왕에 대한 이야기가 갑자가 화제가 됬습니다. http://itnering.egloos.com/3196376 라든지, http://phdzz.egloos.com/3066704 라든지... 시초는 http://saga38.egloos.com/7304469 이거네요. 아. 그래서 누가 4천왕인가.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영원한 전사, 슴가마왕 혹은 요참마왕, 최애캐살해자, 전쟁의 신 누XXX 친구님, 오토코노코 감별사, 오토코노코마왕, 오토코노코의 신 네XX리님은 무조건 뽑히고, 그 외에 토XX투님이나 XXX시밤님, 혹은 총통XXXX님 이렇게 3분이서 나머지 두 자리를 다툰다고 하더군요.

아. 근데 이글루스에서는 저 4천왕에는 밀리나 다른 사이트에 가면 충분히 천왕의 자리를 차지하고도 남을 고수들이 많이 있지요. 잉XX님이나 모 당의 당수님이나 그 외 기라성 같은 분들이 많이 계시지요. 정말 이글루스는 무서운 동네입니다. 

2. 연재글에서 오류 발견. 글을 처음 날려먹고 겨우 남아있던 것을 기초로 다시 글을 쓰는 과정에서 글 순서가 바뀌었는데 그걸 미처 간과하지 못하고 주석을 초안 상태 그대로 둔 게 확인... 근데 노트북이 살짝 말썽이라 글 수정이 용이하지 않아 별수없이 놔둬야 될 것 같습니다. 

3. 2월달인데 왜 이리 추운지 모르겠습니다.

4. 김정남 피살사건은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지구촌에 또다른 혼란을 줄 것 같습니다. 뭐 일단 김정남을 자연사라고 우기는 북한은 개그가 따로 없군요. 누가 암살한건지 뻔한데 말이죠.... 아. 다만 독이 아직까지 안 나왔는데 이건 두가지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말레이 경찰의 무능함, 그게 아니면 정말 빠르게 분해되는 종류의 독이라던가... 독극물로 인한 살인이 의심되지만 독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타만 슈드와 어느정도 유사성이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독의 종류에 한정해서지만요. 

5. 탄핵 사태도 슬슬 끝날 때가 됬는데.... 벚꽃 대선으로 확실하게 확정이 나야.. 아. 뭐 솔직히 요즘 꽃 피는거 봐선 4월 말이면 벚꽃 다 지고 말지만요. 

대진망국기 <1> 모든 것은 사구에서 시작되었다. 공국 문화부 직할 역사연구소

<거인의 죽음>

  


- 진시황 순행도. 진시황은 통일 후 여러차례 순행을 했는데 그 경로를 나타낸 지도다. -

 

진시황 3710. 진시황은 5번째 순행에 나선다. 좌승상 이사가 그를 따라가고, 우승상 풍거질이 도성 함양에 남기로 했다. 작은 아들 호해가 따라나서기를 청해 그 청을 받아들였다. 순행을 나선 진시황 일행은 먼저 운몽에 들러 구의산에서 요순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 뒤 장강(양쯔강)을 건너 강동으로 가, 회계산에 올라 제사를 지내고 진나라의 공덕을 찬양하는 비석을 세운다.


상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 "핑계도 좋아. 나 때문에 출항을 못 하신다니! ㅋㅋㅋㅋㅋㅋ!" -

 

그 뒤 진시황은 다시 장강을 건너 해안을 따라 낭야로 간다. 이 때 불로불사약을 구하는 임무를 띄던 서불 등이 몇 해째 성과가 없는 것을 진시황이 추궁할까 두려워 커다란 상어 때문에 선약을 구하러 갈 배를 띄울 수가 없으니 활 잘 쏘는 자들을 보내 노로 상어를 잡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침 해신과 싸우는 꿈을 꾼 진시황은 해몽하는 자로부터 악한 신을 없애야 선한 신이 이르게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큰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

 

진시황은 지부 땅에서 큰 물고기를 잡았다. 서불 등은 별 수 없이 배를 타고 떠났다. 그 뒤 진시황은 계속 길을 가다가 평원에 이르러 병이 나고 말았다. 진시황 일행은 서둘러 수도인 함양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서둘러 돌아가기 시작한 진시황 일행은 사구(지금의 허베이성 핑샹현)에 도착했다. 하필 그 곳은 조나라 무령왕이 양위 후 후계자 분쟁으로 인한 내전에 휘말려 아들인 혜문왕에게 감금, 아사했던 불길한 곳이었다.

 


- "불로장생을 꿈꾸었지만 모두 헛된 것이었구나..." -

 

진시황은 그 곳에서 7월 병인일 사망한다. 하필 수도가 아닌 바깥에서 죽은 상황. 조정 관료들은 우승상 풍거질 등 일부를 빼면 모두 진시황을 따라 바깥에 나와있었다. 신속하게 대처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또 진시황은 평소 죽음이란 말을 신하들이 꺼내는 걸 싫어한 터라 후계자에 대한 명확한 언급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정해진 후계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굳이 따지면 진시황에게 간언하다가 북쪽 몽염이 주둔한 곳으로 추방된 장남 부소가 유력한 후계자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정해진 건 아니었으므로 20명에 달하는 진시황의 아들들이 난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거기다 아직 진나라에 대한 6국 백성들이나 6국 신하들의 반발도 상정해야 했다. 비록 진시황 생전에는 뚜렷하게 드러는 시도가 박랑사 사건 하나뿐이었지만 거인 진시황이 바깥에서 죽고 신하들도 바깥에 있어 우왕좌왕하기 쉬운 이 때 그 혼란을 이용하려고 할 자가 나타날 수도 있었다.


온량거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 뚜껑 덮힌 수레 온량거. 진시황이 순행 중에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

 

결국 우승상 이사는 황제의 붕어를 은폐하기로 한다. 그는 진시황의 시체를 온량거에 옮기고 평소처럼 식사를 가져오게 하고, 결제할 문서들을 가지고 오게 했다. 진시황의 죽음을 알고 있던 자는 우승상 이사 외에는 중거부령(1)이자 부새령(2)이던 조고, 진시황을 따라 순행 나온 작은 아들 부소, 그 외에 믿을만한 최측근 환관 5~6인 정도였다.

 

이들은 철두철미했다. 평소처럼 식사와 결제 문서를 올리게 하고는, 온량거 안에서 환관들이 그 음식들을 먹고, 문서를 결제하며 철저하게 황제의 붕어를 숨겼다.일행은 그렇게 중대한 비밀을 숨긴채 함양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때는 찌는 듯이 더운 여름이었다. 당연히 시체가 썩기 시작했다. 이사, 조고 등은 궁여지책으로 말린 생선 1석을 싣게 하여 냄새를 숨겼다. 그렇게 함양에 도착한 이사는 그제서야 진시황의 죽음을 공표한다.

 

<자살 명령>

 

한편 이 때 진시황의 장남 부소는 진시황에게 간언을 하다 쫓겨나 몇 년째 몽염과 같이 북쪽 변경에 가까운 상군(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옌안시 일대) 일대에 머무르고 있었다. 몽염은 상군을 거점으로 흉노를 감시하며 만리장성 축조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정의 사자가 상군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공손히 사자를 맞이했다. 두 사람은 아마 이 사자가 통상적인 칙사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부소는 아버지 진시황이 자신을 용서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사자가 뜻밖의 조서를 읊었다. 조서는 부소가 변경에 있으면서 공을 세우지 못 할뿐더러 자신을 비방하기만 하니 불효하므로 자결하고, 몽염 역시 곁에 있으면서 시정하지 않으니 자결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 "장난해? 뜬금없이 자살 명령을 내리면 의심이 안 갈 수가 없잖아!" -

 

몽염은 이 황당한 조서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부소는 조서의 내용을 알자마자 자살하려고 하였다. 몽염이 만류하였지만 부소는 듣지 않고 그대로 목을 매어 자살한다. 몽염은 자살을 거부했기에 사자는 그를 양주(지금의 산시성 옌안시 쯔장현)에 감금했다.

 

<조서 위조?>

 

조고 이사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 조고와 이사의 밀담. 사기에 실린 유명한 이야기지만 정말 이게 실화일까? -

 

이 사건에 대해 사마천은 자신의 저서 사기 이사열전에서 이런 설명을 하였다. 진시황이 죽자 환관 조고가 호해와 결탁한 뒤 승상 이사와 몰래 밀담을 나누며 진나라에서 2대 이상 간 승상이 없었다.’고 위협하고, 권세를 오래 유지할 수 있을 거라며 회유도 하고, 몽염에 대한 견제 심리를 부추겨 그를 설득, 부소를 불러오라는 진시황의 원래 유조를 자결하라는 명으로 위조한 것이라고 말이다. 얼핏 본다면 그럴듯한 설이다.

 

파일:/image/144/2006/07/20/6a2185a.jpg


- 사마천. 그는 불세출의 역사가이기도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사구의 밀담은 너무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다. -


 

하지만 사마천은 도대체 밀담을 어떻게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도 조서 위조와 같은 중대한 사안에 대한 위조인만큼 이사 열전의 지나치게 자세한 묘사는 오히려 의구심을 자아낼 정도다.

 

물론 정황증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이사 입장에선 부소와 친한 몽염이 부담이 안 된다면 그게 이상하긴 하다. 그리고 조고 말대로 진나라에서 2대 이상 제대로 간 재상이 거의 없기도 했다. 거기다 이사 열전에 기록된 위조 조서에는 몽염에게 자살을 명했는데 진시황 본인은 정작 몽염 등 몽씨 일가를 존중하고 아낀 편이지만 조고는 몽염의 동생 몽의 때문에 사형에 처해질 뻔한 적이 있어서(3) 몽씨 일가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밀담이 너무 자세하게 기록됬다는 점에서 의심이 안 갈 수 없다. 특히 사기 열전이 민담을 많이 채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과 분서갱유의 여파인지는 몰라도 기원전 300~기원전 200년대 기록 중에 부정확한 것이 많이 발견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의심을 안 할 수가 없다. 이 민담의 채록 문제를 추측해볼 수 있는 기록이 사기 진섭세가에 있다.

 

내가 듣기에 2세는 작은아들로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자리에 오를 사람은 바로 공자 부소였다. 부소가 여러 차례 바른 말을 하는 바람에 주상이 그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변방으로 가게 했다. 지금 또 듣기로는 죄도 없는데 2세가 그를 죽였다고 한다. 백성들은 대부분 그가 어질다는 것만 들었지 그가 죽은 것은 잘 모른다.

 

진승이 반란을 모의하면서 한 말인데 호해의 즉위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민간에 많이 떠돌았음을 알 수 있다. 장자 상속이 어느 정도 상식화된 상황에서 호해가 갑자기 즉위하고 부소가 자결한 것은 민중들에게 이상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아니. 진승의 경우 부소가 죽었다고 확신하긴 하지만 말을 하는 뉘앙스를 보아할 때 부소가 실제로는 죽지 않았다는 소문까지 돈 것으로 보인다. 훗날의 가짜 드미트리처럼 말이다. 이런 민중들이 보기에 너무나도 이상한 상황이 도래했다면 여러 추측들이 난무할 것은 뻔한 일이다. 온갖 추측이 나돈 것도 지금 또 듣기로는 죄도 없는데 2세가 그를 죽였다고 한다라는 말로 알 수가 있다. 사기의 민담 채록 경향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여기에 더해서 하술하겠지만 몽염열전에서는 호해가 유력한 후계자로 검토되었다는 것을 암시할 수 있는 기록이 존재한다. 거기다 사기가 지어진 건 전한 시기인데 전한이 진나라를 대체한 나라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진나라의 정통성을 깎아내릴 수 있는 이야기가 널리 퍼지고 기록되기 쉬운 환경이기 때문이다.

 

趙正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 조정서 죽간. -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정황 증거, 추측에 불과하다. 하지만 물질적 증거도 존재하는 상황이다. 중국에서 도굴되어 국외로 유출되었다가 2009년 반환된 죽간들 중 조정서(趙正書)(4)란 죽간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죽간을 확인해본 결과 진시황이 순행 중에 이사, 풍거질의 건의를 받아들여 호해를 태자로 책봉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 및 물적 증거 등을 보았을 때 실제로는 조서가 위조되었을 가능성보다는 진시황이 살아있을 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호해를 태자로 세우고 부소에게 자살을 명하는 조서를 직접 내렸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왕 후계자를 호해로 정한 김에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가 될 부소는 죽어주는게 장래의 후계자 호해에게는 이롭기 때문이다.


사마천 사기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 사마천의 사기. 기전체 사서의 정수이자 무시하기 힘든 역사책이기도 하다. -

 

하지만 이것 역시 쉽게 장담하기 힘든 문제이다. 일단 사기 자체가 의심스러운 점들이 존재한다고는 해도 원체 뛰어난 역사서이므로 그 명성의 측면을 아주 무시하기 힘든 것도 있지만, 그 외에도 사기의 기록을 무시하기 힘든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진시황은 측근인 이사 혹은 진나라의 중요 직책을 여럿 차지한 풍씨 일족(5)을 의심한 적은 있지만 몽씨 일족을 의심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몽염 일가를 후대했다는 기록이 존재하며 실제로 30만에 달하는 대군을 오랫동안 맡긴 것을 본다면 진시황은 몽염을 굉장히 신뢰했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진시황의 죽음을 안 자들 중에는 조고, 이사, 호해 외에도 환관 5~6명이 존재했다. 정황상 이들에게 조고, 이사 등이 황제 붕어 후의 문서 결제까지 맡긴 걸 보면 조고가 믿을 수 있는 자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들이 조고와 이사의 밀담을 알고 있다가 진나라가 망한 후 이 밀담에 대해 증언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섣부른 추측은 금물이다. 이 조서 위조 사건에 대해선 후속연구를 기다려봐야 할 것이다.

 

<몽염 형제 숙청>

 

이렇게 여러 논란을 낳은 불안한 상황에서 호해가 즉위하였다. 호해는 일단 자신의 측근이자 법을 가르쳐준 스승 조고를 궁정 출입 등을 관장하는 낭중령에 봉하였다. 이로써 조고는 실권을 쥐게 된다.

 

한편 사기에 의하면 운구가 함양으로 다다르기 전 상군으로 갔던 사자가 돌아와 부소가 자결했고, 몽염은 감금했다는 것을 보고한다.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한 호해는 몽염을 풀어주려고 하였다. 하지만 몽씨 일가를 싫어한 조고가 호해에게 과거 진시황이 현명한 공자(호해를 가리키는 말로 보인다)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는데 몽의가 반대했다고 고하자 호해는 몽의를 대()에 가두었다.

 

호해가 정식으로 즉위한 뒤 낭중령이 된 조고는 자신이 싫어하던 몽염,몽의 형제를 계속 모함한다. 호해는 그 말을 듣고 몽염, 몽의를 죽이려고 한다. 자영이 이목(7) 등 진시황에 의해 멸망한 6국의 사례를 들며 반대했지만 묵살된다.

 


 - "난 지맥을 끊은 죄로 죽는다." "응~ 개소리. 헛소리~" -

 

어사 곡궁이 호해의 명을 받들어 먼저 대()에 갇힌 몽의를 처형한다. 몽의가 죽은 후 사자가 양주로 가서 몽염에게 자살을 강요한다. 몽염은 신중하게 생각해달라고 애원하나 사자에 의해 거부되자 억울하다고 외치다가 몽염의 죄가 죽어 마땅하다. 임조에서 공사를 일으켜 요동에 이르기까지 성을 만여 리나 쌓으면서 어찌 지맥을 끊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바로 몽염의 죄로다(8) 라고 말하면서 자결한다.

 

<공포정치>

   



- "황제가 되긴 했지만 불안하구나..." -


몽염 형제 등이 숙청됬지만 호해는 아직도 불안했다. 그는 아버지 진시황에 대한 제사를 강화하고, 진시황의 사당을 높이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검수(9)들이나 관리, 20명에 달하는 자신의 형제들 모두 호해의 걱정거리였다.

 

일단 검수와 관리들의 경우 진시황의 위엄이 대단했던 만큼 아무래도 막 즉위한 호해 자신의 위엄이 선제보다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명을 진시황보다 덜 따를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나 검수들 중 6국 출신들은 대놓고 드러내고 있지는 못 하지만 자신들의 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에 대한 반감이 꽤 크게 존재한다고 봐야 했다진시황 생전에는 이런 반발이 박랑사 사건을 제외하면 거의 드러나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위엄이 부족한 신임 황제인 자신의 치세에서는 박랑사 같은 것이 얼마나 터질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정통성이었다. 호해 자신은 진시황의 장남이 아니었다. 그는 작은 아들이었다.(10) 당시 중국은 이미 장자상속이 어느정도 상식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인 그가 황제가 됬다. 당연히 호해가 정식으로 진시황의 뒤를 이을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장남 부소를 죽였다고 해도 20명이 넘는 진시황의 아들들이 존재하는 만큼 그들이 제위를 주장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호해는 위엄을 세워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일단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야한다며 이사 등을 데리고 봄에 동쪽으로 순시를 떠났다. 그는 갈석으로 간 뒤 다시 남쪽 회계로 갔다. 갈석, 회계 모두 진시황이 비석을 세운 곳이었다. 호해는 그 비석들에 다시 글자를 새기고 요동으로 갔다가 함양으로 돌아온다그리고 망하지 않고 동군 야왕현에 잔존해있던 위()나라의 군주 각을 폐하고 평민으로 만들어 멸망시키기도 한다.

 



- "방법이 하나 있사옵니다. 몽둥이로 패면 되옵니다." - 


함양으로 돌아온 호해는 조고와 의논한 후 법령과 형벌을 더욱 엄격하고 가혹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를 이용해 여러 대신들과 자신의 형제들을 숙청했다. 공주 10명 혹은 공자 6(11)이 두현(지금의 시안 동남쪽)에서 사지가 찢겨죽었고, 그 외에도 많은 공자들이 처형되었다. 공자 장려는 자신이 무슨 죄를 짓고 죽는지 알고나 죽자고 말했지만 사자가 자신은 명을 받들어 일을 처리할 뿐이라고 하자 자신은 죄가 없다고 외치며 자신의 형제 3명과 함께 자결했다. 단 공자 고는 스스로 자살하겠다고 청원해 그 요청을 승낙하고 10만전을 장례비용으로 내려준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호해는 위엄을 드높일 목적인지 진시황의 죽음으로 중단된 아방궁 건축을 다시 시작하고 각종 토목공사를 벌인다. 거기다 함양으로 5만 병사를 모으고 훈련시키면서, 함양에 오는 병사들에게 식량을 스스로 마련해서 오라고 지시하는 한편 각 군현에 식량과 사료의 운반을 독촉한다.

 

호해는 이런 조치로 자신의 위엄이 세워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잇따른 숙청으로 사람들은 불안감을 느꼈다. 각박해진 법률에 관리나 검수들 모두 불만을 품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여러 신하들과 사람들이 위험을 느끼고 모반을 꾀하려고 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한다. 이것은 결국 냄비가 부글부글 끓는데 억지로 김도 안 빼고 억누르는 형국과 다를 바 없었다. 김도 안 빼고 냄비를 억누른다면 냄비가 결국 터지는 법

 

진승 오광의 난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 "어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더냐!"

 

결국 부글부글 끓은 채 억눌려있던 냄비가 터지고 만다!

 

(1) 수레를 담당하던 벼슬

 

(2) 옥새를 관리하던 벼슬

 

(3) 조고가 법을 어겨 몽의가 심의한 적이 있는데 몽의는 환적에서 조고의 이름을 빼고 사형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진시황이 조고를 아껴 사면한 덕에 조고는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4) 조정서는 아직 전문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중국 베이징대학에서 사기와 다른 부분에 대한 공개는 이루어졌다

 

(5) 진시황본기에 의하면 양산궁에 행차했을 때 승상의 마차가 많은 걸 보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기록되어있다. 보통 이 승상이란 건 이사를 가리키는 말로 추측하지만 풍거질 역시 승상으로 기록되고 있고, 풍씨 일족 역시 진나라의 명문가로 추측되므로 풍거질일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는 없다

 

(6) 조고가 한때 죄를 지어 몽의가 심판한 적이 있는데 몽의는 조고에게 사형을 판결했다. 하지만 진시황이 조고를 아껴 조고를 사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적이 있었다

 

(7) 조나라의 명장. 진나라 군대를 연파하며 진나라의 골치를 썩이게 했지만 진나라에 매수된 간신 곽개의 모함으로 죽었다. 이목이 처형되자 조나라는 3달만에 진나라에게 망해버렸다만화 킹덤에서도 중요하게 나온다.

 

(8) 물론 백성들을 고달프게 했으면서 지맥을 운운한다며 사마천에게 엄청나게 비판받는다

 

(9) 진나라는 백성들을 검수라고 불렀다

 

(10) 흔히 막내아들이라고 묘사되지만 진시황이 사망했을 때 나이가 49세 정도밖에 안 됬다는 점. 호해가 즉위했을 때 21살이란 기록, 그리고 진시황의 아들들이 20명이 넘는다는 사기의 기록을 고려하면 막내보단 그냥 위에 형이 여러 명 존재하는 수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작은아들이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사기 원문의 少子는 막내아들 말고도 작은아들 정도의 용례로도 사용할 수 있다.

 

(11) 공주 10명은 이사열전, 공자 6명은 진시황 본기의 기록이다. 둘 중 어떤 것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대진망국기 <0> 서론 공국 문화부 직할 역사연구소

진나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 진나라의 천하통일 - 


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제나라를 멸망시키고 6국을 모두 제압한다. 이로써 중화는 진나라에 의해 하나로 통일되었다. 진나라를 통일한 진왕 정은 신하들의 주청을 받아들여 칭호를 황제로 바꾸고 자신을 시황제라 칭했다. 이것이 최초의 중국 통일이다.

 

진나라는 문자를 통일한다. 통화도 하나로 합치고 도량형도 고친다. 수덕을 주창하며 1년의 시작을 10월로 바꾸고 검은색을 숭상했다. 그리고 평화의 상징으로 무기를 거두어 그 무기를 녹여 거대한 금인을 세우게 한다.


- 진시황제의 초상 - 



하지만 진나라는 불안했다. 6국의 백성들은 원한에 가득차있었기 때문이다. 박랑사에서 누군가 진시황을 습격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나마 진시황은 천하통일을 이룬 명성과 위엄, 그리고 엄격한 법령으로 그걸 억눌렀다. 그 외에도 진나라는 장이, 진여 같은 위험이 될만한 명사들을 수배하기까지 하면서 천하를 계속 진나라 것으로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이 죽자 천하가 뒤집어졌다. 최초의 반란은 보잘것없었지만 금방 불길이 거세져 전국시대 동안 절대 뚫리지 않았던 함곡관이 뚫리기까지 했다. 그나마 이 반란은 곧 진압됬지만 이미 천하는 진나라에 대한 원한이 가득찬 세력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 우리 진나라가 이리 허무하게도 망하다니!!! 출처: 초한전기(KBS 더빙판) -


그 중 흔히 진나라에 대한 원한이 가장 극심하다고 여겨졌던, 반진의 상징이었던 초나라가 중심이 되었다. 이들을 억누르려는 진나라의 노력은 실패했다. 반란군은 물밀 듯이 함양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진나라는 어이없게도 건달 출신의 한 장수에게 항복하고 함양성의 문을 열어줘야했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도대체 진시황이 죽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에 대해 이 연재로 차차 알아보고자 한다




추신: 이번 연재에서 초한전기 관련 사진이 쓰인 경우 무조건 출처는 KBS 더빙판 기준으로 합니다.


1 2 3 4 5 6 7 8 9 10 다음